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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현철의 궁궐이야기 (24) 정희왕후, 정사를 청단(聽斷)하다 - 경복궁 정치 1번지 사정전 ③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알게 된 궁궐
  • 기사등록 2019-06-08 19:25:10
  • 기사수정 2019-06-08 19:5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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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현철 우리궁궐지킴이, 전 KBS PD


     

 

정희왕후는 세조의 부인이자 중전으로서 2남1녀를 두었다. 첫째 아들 도원군은 세조 1년에 의경세자가 되었지만 병약해서 죽었다. 둘째 아들 해양대군은 세조의 대를 이어 예종으로 왕이 되었지만 1년 2개월 만에 승하한다. 정희왕후는 남편인 세조와 두 아들을 모두 자신보다 먼저 보냈다. 

 예종 1년 11월 28일 조선의 제 8대 왕 예종의 병이 위급하다는 것이 알려졌다. 조정의 주요 중신인 승지, 의정부, 신숙주, 한명회, 구치관 등은 임금의 병문안을 하고 경복궁 사정전 밖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경복궁내에 있는 내불당이나 명산대천에서 기도하고 죄인을 풀어주었으나 예종은 중전의 처소인 교태전 동쪽 자미당에서 진시(아침7시~9시)에 훙(薨)하였다. 예종은 병으로 돌아가셨지만 전혀 예상하지 못한 급작스런 죽음이었다. 임금의 후사가 정해지지 않은 채였다. 

 조정 대신들은 임금의 승하소식을 듣고 실성할 정도로 통곡하지만 우선 할 일이 있었다. 상주를 결정해야 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는 왕이 승하하면 세자가 상주가 된다. 그러나 세자가 없는 상태였다. 상주는 차기 임금이 된다. 상주를 정하는 것은 다음 임금을 정하는 것이다. 이것은 신하들의 권한 밖이다. 당시 궁궐의 가장 큰 어른은 정희왕후였다. 세조의 부마 정현조가 조정대신들과 협의해서 정희왕후를 네다섯 차례 방문한다. 정희왕후를 중심으로 조정대신들이 모였다.  

 “누가 상주로서 좋겠느냐?” 정희왕후의 물음에 모든 신하들은 “이 일은 신 등이 감히 의논할 바가 아닙니다. 교지를 듣기 원합니다”라고 입을 모았다. 후사를 이을 대상자는 세 명이다. 예종의 첫 아들 원자(元子)와 돌아가신 의경세자의 두 아들 월산군과 자산군이었다. 정희왕후에게 이들 세 명은 모두 손자가 된다. 드디어 입을 열었다. “원자는 바야흐로 포대기 속에 있고 월산군은 원래부터 병이 있었다. 자산군은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세조께서 늘 그의 기상과 도량을 태조에게 견주기까지 하였다. 그를 상주로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자산군 즉 성종이 13세로서 임금이 되는 순간이다. 조선이 건국한 이래 처음으로 대비가 손자를 왕으로 결정한 것이다. 

 신숙주 등 조정대신들은 사정전 뒤뜰에 모여 여러 가지를 의논해야 했다. 궁궐의 모든 문을 굳게 수비해야 하며 왕의 상여가 나갈 때까지 왕의 시신을 모시는 빈전을 설치하고 왕의 승하를 종묘, 영녕전과 사직에 고해야 하며 상주로 결정된 자산군과 부인 한 씨(한명회의 딸)를 궁궐로 모셔 와야 했다. 그리고 13세의 어린 왕을 대신해서 정사를 청단(聽斷)해 주도록 정희왕후에게 청하는 일이었다. 청단은 자세히 듣고 판단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수렴청정이다. 수렴청정은 중국의 제도이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정사의 청단이라고 표현돼 있다.  

 정희왕후는 “내가 복이 적어서 자식의 흉사를 당했다. 별궁에서 몸을 다스리고자 한다. 더구나 나는 문자를 알지 못해서 정사를 청단하기 어렵다. 자산군의 어머니 수빈은 글도 알고 사리도 밝으니 이를 감당할 만하다”라고 두 세 차례 거절한다. 그러나 “어린 임금이 능히 정사를 총람할 때까지 군국의 기무를 맡아 달라”는 조정 대신들의 거듭된 요청에 승낙한다. 대왕대비가 된 것이다.

 정희왕후의 첫 결정은 두 가지였다. 예종이 승하한 날 바로 성종을 즉위하게 한다. 승하와 즉위가 같은 날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성종은 신시(오후 3-5시)에 경복궁 근정문에서 면복을 갖추고 즉위를 하고 조복을 입은 문무백관들의 하례를 받는다. 임금의 자리를 잠시 동안이라도 비워 둘 수 없고 인심을 안정시킬 필요성 때문이었다. 두 번째는 장례용품을 중국 물품대신에 우리나라에서 구할 수 있는 용품으로 대체하게 하고 새로 들어오는 중전의 살림살이나 빈전의 그릇도 새롭게 제조하지 말고 자신이 갖고 있는 것을 나누어 쓰게 했다. 궁궐을 검소하게 해서 백성의 수고를 줄이려는 그녀의 평소 생각을 읽을 수 있다. 



 정희왕후는 글은 몰랐지만 국정의 간접경험은 있었다. 세조는 연회 등 공식행사뿐만 아니라  조정대신들과 자주 하는 술자리에도 중전을 참석시켰다. 중전은 조강지처로서 참석할 수 있다고 했다. 세조는 후궁을 한 명밖에 두지 않았다. 세조와 신하들과 나누는 술자리는 개인적인 정에서 국정 전반의 이야기가 오고 갔다. 그 내용을 자연스럽게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 때 만났던 신하들은 성종 대까지 이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신하들의 얼굴이 낯설지 않은 것이다.  

 정희왕후는 국정의 최고 의결권자이지만 이를 보필하는 원상(院相)이 있었다. 세조는 승하하기 몇 개월 전에 원상이라는 임시기구를 두어서 병조 등 군사의 일을 제외하고는 승지들과 의논해서 일반적인 업무를 처결하도록 했다. 예종은 즉위년에 신숙주, 한명회, 구치관 등 9명의 원상을 임명한다. 이들로 하여금 승정원에 날마다 번갈아 나오게 해서 모든 정무를 처리하도록 했다. 이 원상들은 세조대부터 국정의 주요한 역할을 했던 인물로 정희왕후가 정사를 청단할 때까지 거의 변동이 없었다. 국정의 일관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정희왕후는 자신만의 색깔을 드러내기도 했다. 원상과 승지 등이 예종의 병세를 잘 살피지 못한 내의와 내시의 처벌을 요구했다. 정희왕후는 임금의 발병을 내의로부터 사전에 보고를 받았고 치료과정도 알고 있었다. 예종은 뜸의 치료를 거부했고 진맥도 하지 못하게 해서  병의 원인을 내의가 알 수 없었다고 했다. 그래서 죄 없는 내의에게 죄를 줄 수 없다는 단호한 입장을 밝혔다. 이후에도 사헌부와 대사헌 등이 거듭해서 내의와 내시의 처벌을 요구했으나 그녀의 입장은 변함이 없었다. 정희왕후가 국정의 최고 책임자임을 확인시킨 것이다.

 정희왕후는 호패법을 개혁하려고 했다. 그녀는 호패법이 백성을 불편하게 하고 고통을 준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세조대에도 호패법의 폐지 여부를 논한 적이 있었다. 원상 한명회와 최항은 육조 판서 이상이 참석하는 확대회의가 바람직하다고 했다. 정인지 등은 양민과 천민의 정확한 인구를 파악하기 위해서 실시한 호패법은 이제 그 수효를 파악한 목적을 달성했고 죽은 사람이 호패를 반납하지 않은 폐단도 있다고 하면서 폐지를 주장했다. 반면 원상 김질 등은 기존의 제도를 유지하도록 주장했다. 호패는 양민과 천민을 구별하고 도망이나 떠돌아다니는 것을 금지하고 도적을 줄이는 순기능도 있었다. 정희왕후는 깊이 생각하겠다고 하면서 이 날 회의를 끝냈다. 그리고 이틀 후 의정부에 호패법을 폐지해서 전국적으로 실시하라고 한다. “호패법을 실시한 목적인 인구수는 이제 파악이 됐다. 그러나 죽은 사람은 호패를 반납하지 않고 호패가 없는 사람이 대신 이 호패를 차서 법을 어기고 형벌이 가혹해져서 백성들이 고통스럽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녀는 형벌을 가할 때 둥근 몽둥이 사용을 잠정적으로 못하게 했다. 둥근 몽둥이는 예종 대에 도둑이 너무 극심해서 도입했으나 맞아서 죽는 자도 있었다. 도둑들이 “우리가 차라리 장사치가 될지언정 도둑질하지 말자”라고 할 정도로 둥근 몽둥이는 도둑들이 무서워했던 형벌 도구였다. 정희왕후는 포악한 무리를 징계시켜야 하지만 그 중에 원통하고 억울한 백성이 있을까 염려되어서 둥근 몽둥이 사용을 금지한다고 했다. 이후 원상에게 명해서 강도 등의 형벌에서 둥근 몽둥이 사용 원칙을 정하도록 했다.

 정희왕후는 약 7년간 정사를 청단했다. 백성들이 궁궐에 바치는 물품의 수를 줄이게 해서 백성의 수고와 고통을 덜려고 했다. 자신에게는 엄격했고 신하들에게는 너그러웠다. 원상과 대신들이 여러 차례 육선(肉膳) 즉 고기 먹기를 청했으나 49재를 지낼 때 까지는 먹지 않았다. 반면 70세 이상과 병이 있는 신하들의 명단을 파악해서 고기를 먹도록 했다. 성종이 훌륭한 임금이 되도록 공부 방법까지 세세하게 신하들과 의논했다. 

 그러나 정희왕후는 오점을 남기고 정사의 청단을 그만두어야 했다. 친척관리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인사를 주관하는 이조판서에게 “내가 정사를 청단하는 동안 자격이 없는 친인척을 천거하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다. 자신은 친인척의 재능과 능력을 판단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나 직책이 없는 언니가 노비 소송에 관여되어서 자신의 이름이 거론되었다. 그녀는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지는 격”이라고 억울한 심정을 누르고 “세조와 주상에게 욕되게 하지 않으려고 늘 마음속에 조마조마했다”고 자신의 심경을 밝혔다. 이제 “주상이 장성했고 학문도 성취되어 정무를 결정할 수 있다”고 하면서 언문 편지로 자신이 물러나야 할 의지를 밝혔다. 신하들은 물러나지 말아야 할 여러 가지 이유를 들었지만 정희왕후의 의지를 꺾지 못했다.

 그녀는 이러한 오점에도 불구하고 존재 그 자체로도 성종과 국정에 큰 버팀목이 됐다. 어머니와 할머니 등 보호막이 없이 12세로 임금이 된 단종과 비교하면 알 수 있다. 정희왕후가 정사를 청단하는 동안 국가의 크고 작은 변란은 없었다. 정희왕후는 대왕대비로서 성종과 국가의 문물과 제도가 부드럽게 안착되도록 징검다리 역할을 잘 한 것이다. 정희왕후는 66세까지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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