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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현철의 궁궐이야기(23) 주초위왕(走肖爲王), 대학자를 잃다 - ↳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알게 된 궁궐
  • 기사등록 2019-06-01 18:27:23
  • 기사수정 2019-06-02 12:3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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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현철 우리궁궐지킴이, 전 KBS PD


사진= 네이버 이미지. 오른쪽 글자는 사헌부대사헌 증영의정정암조광조지상. 정암은 조광조의 호, 증은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는 의미다.


 주초위왕(走肖爲王), 즉 주(走)와 초(肖)를 더한 조(趙)씨가 왕이 된다는 설이다. 여기의 조(趙)는 중종대의 문신 조광조(趙光祖)를 가리킨다. 이 네 글자로 인해서 조선의 제11대 왕 중종은 자신이 발탁해서 같이 국사를 논하던 조광조를 비롯한 젊은 문신들을 죽이고 귀양을 보낸다. 중종이 일으킨 기묘사화다. 그럼에도 주초위왕은 중종실록에는 기록이 없다. 

 주초위왕은 제14대 선조실록에 기록돼 있다. 중종이 기묘사화를 일으킨 49년 후다. 선조1년 9월 21일의 기록이다. “남곤은 조광조 등에게 교류를 청하였으나 조광조 등이 허락하지 않자 남곤은 유감을 품고서 조광조 등을 죽이려고 하였다. 남곤은 꿀로 나뭇잎에다 주초위왕(走肖爲王) 네 글자를 쓰고서 벌레를 놓아 갉아 먹게 하고 경복궁 뒤에 있는 자신의 집에서 대궐로 통하는 개천으로 흘려보내서 중종이 보게 하는 고변(告變)을 일으킨다. 이 일은 <중종실록>에 누락되었기 때문에 여기에 기록한다”고 밝히고 있다. 고변은 반역행위를 고발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주초위왕’은 역사의 정사로서 기록된다. 역사의 잘못된 부분은 시간이 지나도 그 정확함을 기록하려는 조선시대의 기록 정신을 엿볼 수 있다. 


 중종 14년 11월 15일 밤 경복궁은 소란스러웠다. 경복궁의 서문인 연추문이 활짝 열려 있고 근정전 섬돌 아래에는 군사들이 좌우로 서 있으며 임금의 집무실인 사정전 밖에는 병조판서 이장곤, 병조참지 성운, 화천군 심정 등이 앉아 있었다. 중종은 사정전 안에서 홍경주, 남곤, 김전, 정광필 등과 함께 조광조 등을 감옥에 보낼 의논을 하고 있었다. 왕의 비서실 승정원에서 숙직하던 신하들도 모르는 일이었다.

 잠시 후 임금의 말씀을 전하는 승전색 내시 신순강이 나와서 성운에게 ‘당신이 승지가 되었으니 임금의 명령을 들으시오’라고 전했다. 성운은 안에 들어가서 종이쪽지를 들고 나와서 의금부에 가둘 명단을 발표했다. 대사헌 조광조를 비롯해 대사성, 도승지, 홍문관원, 우참찬, 형조판서 등 최근까지 중종과 밀접하게 국정을 논했던 15명의 이름이었다.

 

중종이 밝힌 이들의 죄목은 “조광조 등이 서로 붕당을 맺고 자신들에게 붙은 자는 천거해서 요직을 차지하고 후진을 유인해서 말을 과격하게 하고 국정을 잘못 운영했으며 그 세력이 두려워서 아무도 입을 열지 못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조광조가 우두머리라고 했다. 영의정 정광필은 우의정 안당에게 “임금이 도대체 왜 이런 일을 하는지 모르겠다”고 하면서 이것은 반드시 누군가 헐뜯는 밀고가 있었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중종은 반정을 통해서 왕위에 올랐다. 바로 앞의 왕, 연산군의 폭정을 교훈삼아서 귀를 열고 언로를 트이게 했다. 조광조의 도학정치에 귀를 기울였고 현량과를 설치해서 신진세력을 발탁하고 조정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으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중종은 하루 밤 사이에 조광조와 신진세력에 대한 태도를 확 바꾼 것이다. 사람의 태도가 바뀌는 중간 과정이 완전히 생략된 것이다. 누군가 임금에게 조광조에 대해서 참소를 했을 것이라는 정광필의 의심은 설득력이 있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기록돼 있지 않지만 개인 문집에 전하는 참소는 다음과 같다. 조광조를 몰아내는 데 앞장선 사람은 남곤 심정 홍경주다. 이들은 찬성(贊成)이 되었으나 모두 다 조광조 등에게 탄핵을 받아서 분함을 품고 있었다. 홍경주는 중종의 희빈이 된 그의 딸을 통해서 “조정의 권세와 백성들의 마음이 모두 조광조에게로 돌아갔다”고 중종에게 베갯머리송사를 하게 했고, 심정은 경빈 박 씨의 문안노비를 꾀어서 “조씨(조광조)가 나라를 마음대로 하고 모두가 그를 칭찬한다”라는 말을 궁중에 퍼트리게 했다. 근거 없는 말도 여기저기서 자꾸 쑥덕대면 위협을 느끼게 된다. 중종의 처지가 그랬을지도 모른다. 


 중종은 조광조를 한 번 공초하고 바로 사약을 내리게 한다. 조광조는 공초에서 “선비가 세상에 태어나서 임금의 마음을 믿고 국맥을 무궁한 터전으로 새롭게 하고자 했을 뿐”이라고 진술했다. 반역이나 모반과 같은 대역죄에 해당하는 진술이나 증거는 터럭만큼도 없었다. 그럼에도 중종은 거의 연산군 수준에 버금가는 폭정의 결론을 내리고 말았다. 


 사실 중종은 이때까지만 해도 대간이 가혹한 벌을 요청해도 자신의 뜻으로 사람을 죽인 일이 없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대간이 조광조를 더 죄주자는 청을 올리지 않았음에도 스스로 결정 내렸다. 사관은 마치 “두 임금을 보는 것 같다”고 평했다. 

 중종의 결정에 조정의 거의 모든 대신, 유생들이 임금에게 조광조를 처벌하는 이유를 밝혀 달라고 요구했고 그 억울함에 상소를 올렸으며 궁궐 뜰에서 곡을 하는 자, 감옥에 같이 보내 달라는 관리도 있었다. 그런데 조광조를 구하려는 이러한 움직임조차 중종에게는 ‘참소’를 더욱더 믿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사관은 평하고 있다. 

 

중종은 “조광조 등이 국사를 그르친다 해서 조정 대신들이 죄주기를 청하므로 죄주는 것이다”라고 조정 대신들에게 그 책임을 돌렸다. 그러나 중종이 언급한 ‘조정 대신’들은 그 이유를 몰랐고 오히려 조광조가 사약을 받을 근거가 없다는 주장을 펼쳤다. 

영의정 정광필도 ‘조정이 죄주기를 청했다’는 것은 옳지 않다고 분명히 했다. 조정이라는 단어에는 영의정인 자신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중종이 언급한 조정 대신들과 실제의 조정대신들의 생각은 전혀 달랐던 것이다. 

 조광조의 자리에 새로 임명된 사헌부·사간원 양사가 합동으로 “선비를 죄주는 것이 무엇이 두려워서 밤에 밀지를 내려서 비밀히 하십니까? 이렇게 하면 나라가 위태롭고 망합니다”라고 눈물로써 간언을 올렸다. 그럼에도 중종은 요지부동이었다. 이후 중종은 조광조를 사형에서 유배로 바꾸었으나 결국 사사(賜死)시킨다. 


 지도자가 ‘참소’를 듣고 정보를 공개하지 않은 채 판단을 내리는 것은 무서운 것이다. 그것이 은밀한 참소일수록 더욱더 그렇다. 공개적이고 합리적인 토론을 모두 집어 삼킨 것이다. 그동안 조광조의 행적이나 학문적 태도, 논리와 조정 대신들의 공개적인 의견도 은밀한 ‘참소’를 못이긴 것이다. 

 우리 돈 천 원짜리 지폐의 앞부분은 퇴계 이황이다. 이황은 조선의 대학자로서 평가받고 있다. 선조수정실록에 기록된 이황의 졸기 마지막 부분은 이렇게 돼 있다. “이황은 이 세상의 대 유학자로서 조광조 이후 그와 겨룰 자가 없다. 이황은 재주나 도량은 조광조에 미치지 못하지만 의리를 깊이 파고들어 정미한 경지까지 이른 것은 조광조가 미치지 못한다.” 


 조광조는 38세까지 살았다. 그 때까지의 학문적 경지가 69세까지 학문적 업적을 쌓은 이황이 미치지 못할 정도라고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조광조의 학문적 깊이와 도량이 어느 정도인지 상징적으로 설명을 해 준다. 중종이 조광조와 그 일파를 죽인 기묘사화에는 20,30대의 젊은 청년들이 많았다. 

 은밀한 ‘참소’로 조선은 대 유학자와 유능하고 젊은 인재들을 잃고 말았다. 주초위왕은 참소의 대가가 참혹했음을 설명해 준다. 조광조는 사후 49년 선조 1년에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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