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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현철의 궁궐이야기(11) 경복궁 최고의 미인 경회루 ① 세종을 만나다 - ↳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알게 된 궁궐
  • 기사등록 2019-03-02 18:52:25
  • 기사수정 2019-03-04 21:2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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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현철 우리궁궐 지킴이, 전 KBS PD 


  경회루는 경복궁 근정전 서쪽에 위치해 있다. 그 크기가 정면 7칸, 측면 5칸의 중층 구조로  사각형과 원형의 48개 하얀 돌기둥이 줄지어 서서 떠받치고 있다. 누각의 주위로 못을 파서 탁 트인 공간을 빚어낸다. 2층 누각에 올라서면 북악산과 인왕산이 손에 닿을 듯 눈을 시원하게 한다. 조선왕조실록에 “(누각은) 규모가 굉장하고 넓게 뚫렸으며 주위에는 못을 파서 사방을 둘렀다”고 표현돼 있다. 누각과 연못을 배경으로 관람객의 카메라 활약이 가장 두드러진 곳이기도 하다. 경회루를 경복궁 최고의 미인으로 꼽아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경회루는 태종이 지었다. 사연이 있다. 조선의 3대 태종은 개성 수창궁에서 즉위해 정무를 시작했다. 그는 즉위 5년에 한양으로 돌아와 자신이 지은 창덕궁에 기거한다. 태종은 경복궁을 중심으로 일어난 제1차 왕자의 난 때문에 경복궁을 꺼려했다. 그래서 창덕궁에서 정무를 보면서도 부왕이 지은 경복궁에 거처하지 않는 것에 대해 늘 마음의 부담감을 갖고 있었다. 

 태종은 한양으로 돌아온 이듬 해 경복궁에 대해 “크고 아름다우니 버리고 거처하지 않는 것은 옳지 못하다”라면서 수리한다. 궁궐 밖의 풍저창과 광흥창에 야적한 곡식과 각 도에서 배로 올라온 쌀을 각각 경복궁의 창고와 행랑에 보관한다. 태종은 5년 후 다시 경복궁을 수리하게 한다. 이번에도 태조께서 창업하고 세우신 것을 재차 강조하면서 “중국 사신의 칙명을 경복궁에서 맞이하겠다”고 했다. “앞으로는 제 때 수리하도록 하라”라는 말도 덧붙였다. 


 또한 풍수가들이 경복궁에 명당수가 없는 게 흠이라고 하니 “개천을 파라” 고 지시한다. 2개월 후 경복궁 서쪽 모퉁이를 뚫고 이 개천으로 물을 끌어들인다. 금천(禁川)이다. 금천은 흥례문과 근정문 사이에 있고 현재는 물이 흐르지 않는다. 개천에 물이 흐르면 경복궁이 더욱더 풍성해지리라. 태종은 이 개천을 팔 때도 경복궁에 자신이 거처해서 후손들에게 보여주겠다는 각오를 밝혔다. 

 태종11년 또 다시 경복궁 수리를 지시하면서 경복궁에 거처하겠다는 자신의 의지를 다시 다진다. 오늘날 건설부 장관에 해당하는 공조판서 박자청에게 “태조께서 세우신 궁궐에 내가 거처하지 않으면 자손들도 거처하지 않을 것이다. 즉시 수리하라”고 명했다. 이 때 경복궁 북쪽 누각 아래에 연못도 파라고 지시를 내린다. 감독관으로 안성군 이숙번과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 이응을 임명한다. 이숙번은 제1차· 2차 왕자의 난 때 개인 병력으로 태종을 도운 최측근이다. 


 태종 12년 이번에는 새로운 건물을 짓게 한다. 박자청의 감독으로 경복궁 서쪽 모퉁이에 큰 누각을 짓는다. 약 6백여 명이 한 달 여 걸린 공사였다. 이곳에는 원래 태조 대 지은 작은 누각이 있었는데 태종이 규모가 좁다고 해서 다시 짓게 한 것이다. 누각의 주변에 연못도 팠다. 이것이 오늘날의 경회루다. 

연못은 다 팠으나 문제가 생겼다. 연못의 물이 새는 곳이 있어서 물을 가득 채우지 못했던 것이다. 박자청이 꾀를 냈다. 연못의 물 흐름이 막힌 곳은 물을 흐르게 트고, 물이 새는 곳은 검은 진흙으로 메웠더니 물이 다시 고였다. 

 태종은 연못을 판 인부들에게는 저화 1천장을 내려주었다. 저화 1장은 쌀 두말이다. 저화는 닥나무 껍질로 만든 종이 화폐로 고려 대에 사용이 지지부진하다가 태종 원년 하윤의 건의로 사섬서(司贍署)의 부서를 만들어서 다시 유통시킨다. 

 경회루



태종은 신축한 연못의 시제를 주고 시를 짓게 한다. 시제는 ‘분지저한천(盆池貯寒泉)’이다. ‘물이 솟구치는 연못에 샘물을 저장하다’는 뜻이다. 세자 양녕대군의 스승 변계량이 지은 시다.

금원의 분지 벽옥처럼 둥글어라 / 禁苑盆池碧玉圓

오색구름 짙은 곳에 샘물을 끌어 왔네 / 五雲深處引寒泉

신령스러운 물 근원이 삼각산서 나왔으니 / 靈源定自三山出

흐르는 물줄기 사해까지 뻗치겠지 / 流派應將四海連


 누각의 이름은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 하윤이 정한다. 그 이름 짓는 과정이 독특하다. 태종은 경회,납량,승운,과학,소선,척진,기룡 등 7개의 누각 이름 후보를 뽑아서 하윤으로 하여금 결정하게 한다. 조선의 궁궐에서 건물 이름을 정할 때 일반적으로 신하가 후보를 올리고 임금이 결정하는 방식과는 반대로 이루어졌다. 

하윤은 7개의 후보 이름 중에서 경회로 정한다. 하윤은 정사를 잘하고 잘못하는 것은 사람에게 달려 있다고 전제하면서 “경회는 군신 간에 서로 덕으로서 만나는 것”으로서, “임금의 정사는 사람을 얻는 것이 근본이다. 사람을 얻은 뒤에라야 ‘경회’에 이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 기록은 동문선 제 81권 <경회루 기(記)>에 남아 있다. 하윤은 태종의 명으로 경회루 기(記)를 지었다. 경회루 편액은 당시 세자였던 양녕대군이 부왕의 명을 받아서 크게 썼다는 기록이 있으나 전해지지는 않는다. 

 

태종은 경회루를 “내가 편안히 놀고자 지은 것이 아니라 중국 사신의 잔치나 위로하는 장소로 삼고자 한다”고 사용 목적을 밝혔다. 중국사신을 맞이했던 궁궐 밖의 모화루와 용도가 같다고 한 것이다. 

 그러나 태종은 경회루를 외교 목적 외에도 상왕인 정종, 세자, 종친, 부마 등을 위한 연회, 병환 중인 중전을 위한 스님의 기도, 문·무과의 과거시험, 정무나 피서장소 등 다양하게 활용한다. 


 특히 경회루는 충녕(세종)에게 인상적인 장소가 된다. 태종 16년 7월 상왕인 정종을 맞이해서 술자리를 베푼다. 이 연회에는 정종, 태종 외에도 세자와 종친, 재상들이 참석했다. 연회는 군사들의 무예시범이나 재상들의 시 짓기 등으로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어느 재상이 ‘노성(老成)한 사람을 버릴 수 없다’ 고 시를 짓자 충녕이 ‘기수준(耆壽俊)이 궐복(厥服)에 있다’고 <서경(書經)>의 글로 맞장구를 쳤다. ‘많은 경험을 쌓은 사람을 버릴 수 없다’와 ‘나이와 경험이 많고 뛰어난 사람은 그 일이 있다’는 뜻이다. 태종이 들었다. 태종은 충녕의 학문이 이치와 논리에 맞는다고 감탄을 보낸다. 태종은 이 칭찬으로 그쳐야 했는데 한 발 더 나갔다. 세자 양녕을 돌아보면서 “너는 학문이 어째서 이만 못하냐?”고 힐난한다. 

 

양녕은 이전에도 가끔 3살 아래 충녕과 비교 당했다. 이날은 상왕, 부왕, 종친, 재상들이 모두 모인 자리다. 세자 양녕에게 경회루는 아픈 장소일 것이다. 충녕은 후일 임금이 되어 이 곳 경회루를 산책한다. 부왕으로부터 들은 칭찬이 좋은 기억으로 작용했으리라. 

 충녕은 글씨와 그림, 꽃돌(花石), 비파와 거문고 등 모든 예능에도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이것은 사실 부왕으로부터 일찍이 ‘너는 할 일이 없으니 그냥 편안한 삶을 즐기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충녕은 예능 외에도 책에서 손을 떼지 않고 학문에도 정진하고 있었고 그의 감추어진 실력이 때에 따라 번득였다. 부왕의 눈에 세자 양녕은 차츰 멀어지고 충녕은 다가오고 있었다. 

 

태종 18년 세자를 양녕에서 충녕으로 바꾼다. 그리고 2개월 후 태종은 세자 충녕에게 왕위를 물려준다. 태종은 왕의 비서실장인 지신사 이명덕, 좌부대언(左副代言) 원숙, 우부대언(右副代言) 성엄 등을 경회루로 부른다. “나는 18년을 재위했으나 하늘의 뜻에 보답하지 못했고 지병이 심하니 세자에게 전위(傳位)하려고 한다.” 온 조정이 발칵 뒤집혀서 반대를 하지만 결국 태종의 뜻을 꺾지는 못했다. 신하들이 재차 복위를 요청했을 때 태종은 “18년 동안 호랑이를 탔다. 이것으로 충분하다”고 했다. 

 이틀 후 세자 충녕은 내선(內禪)을 받고 근정전에서 즉위한다. 세종이 왕으로 결정된 장소도 경회루였던 것이다. 세종은 후에 자신의 자문기구인 집현전도 바로 이 경회루 앞에 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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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칸(간,間) : 궁궐 등 건물 크기의 단위로 사용된다. 건물의 기둥과 기둥 사이가 한 칸이다. 한 칸의 크기가 반드시 일정한 것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의 크기를 짐작케 한다. 경회루는 정면 7칸 측면 5칸으로 35칸이다. 경회루 바로 앞의 수정전은 정면 10칸 측면 4칸으로 40칸이다. 근정전은 정면 5칸 측면 5칸으로 25칸이다. 칸 수로는 수정전>경회루>근정전>이고, 실제의 크기는 경회루>근정전>수정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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