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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현철의 궁궐이야기 (10) 경복궁, 길지(吉地)인가 흉지(凶地)인가 ③ - ↳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알게 된 궁궐
  • 기사등록 2019-02-23 19:52:56
  • 기사수정 2019-02-24 08: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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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현철 우리궁궐지킴이, 전 KBS PD 


  세종 15년 최양선은 장의동문, 헌릉의 고갯길 폐쇄 주장에 이어 “북악산의 주혈 자리는 경복궁이 아니라 승문원 터”라고 세 번째 이의를 제기했다. 이번에는 최양선의 편에 선 사람도 있었다. 세종은 ‘경복궁을 승문원 터에 지어야하지 않았을까’라는 최양선의 주장을 확인하기 위해 전 판청주목사(判淸州牧使) 이진을 목멱산(남산)에 올라가서 살펴보게 했다. 이진은 최양선의 말이 맞는다고 세종에게 보고했다. 반면 세종이 풍수가로서 높이 평가했던 이양달, 고중안, 정앙은 “경복궁이 명당”이라고 맞섰다. 경복궁 풍수를 두고 견해가 다시 갈린 것이다.  


 세종은 영의정 황희, 예조판서 신상과 경복궁은 명당이라고 주장하는 이양달, 고중안, 정앙과 그렇지 않다고 주장하는 이진, 최양선 등을 모두 청명한 날에 목멱산에 함께 올라가서 주산의 혈맥을 보라고 지시한다. 세종은 자신도 지리공부를 하겠다고 나섰다. 지난번 헌릉 고갯길 논의에서 주장이 엇갈릴 때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 못한 것을 이번에는 스스로 극복하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세종은 집현전에서 지리의 이치를 강론하고 싶으니 지리에 밝은 자를 추천하라고 승정원에 지시한다. 승정원은 왕의 비서실이다. 비서실장인 지신사 안숭선은 “풍수학은 잡된 술수로 황당하고 난잡한 것으로서 임금이 배우는 것은 옳지 않다”고 반대했다. 세종은 풍수학이 잡된 술수라도 그 근원을 캐 보고 싶다는 강한 의지를 보였다. 이렇게 해서 예문제학 정인지를 단장인 책임자로 삼고 집현전에서 부교리 이명겸 등 4명을 뽑아 세종을 위한 지리자문단을 꾸렸다. 


 예조 좌참판 권도가 장문의 상소를 올렸다. 그는 왕이 집현전에서 지리를 공부한다는 사실에 “온 조정이 수군거린다”고 했다. 그는 “전하처럼 슬기롭고 총명하신 분이 허황된 말에 동요를 일으키는 것에 놀랍고 임금의 학문은 학자의 학문과는 격이 다르기 때문에 집현전에서 지리의 강론을 그만두고 간사한 학설을 멀리하라”라고 간언한다. 

 권도는 풍수학 자체를 아예 무시했다. 그는 성인인 공자나 주공(周公)이 나라와 세상을 근심하고 걱정하는 데에 풍수학을 활용한 바가 없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풍수학 창시자가 과연 공자나 주공보다 뛰어난지 물었다. 그는 중국의 하·은·주는 물론 한·당나라의 흥망도 모두 사람에게서 비롯됐고 고려도 도참사상을 믿고 이곳(한양)에 궁궐을 지어 임금이 머무르기도 했으나 결국 조선의 건국을 막지 못했다는 역사적 근거도 들었다. 

 지하철 경복궁역에 걸려있는 경복궁 원경(2003년) 


세종은 권도의 간언에 대해서 김종서와 안숭선을 불러 자신의 심경을 밝혔다. “지리가 간혹 허황하고 망령되지만 아주 무시할 수는 없다”고 했다. 우리 조상도 나라를 세우고 도읍을 정하는데 지리를 이용했고 백성들도 부모의 묏자리를 고를 때는 산수의 지형을 보는 것은 예로부터 있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세종은 유학자들의 이중적 잣대도 비판했다. 유학자들은 조정에서는 불교행사나 귀신제사를 하지 말라고 간언하지만 정작 자신의 집에서는 스님에게 공양하고 귀신제사를 지낸다면서 조정대신의 언행에 모순이 있다는 것을 질책했다. 


 세종은 경복궁이 명당인지 판가름하기 위한 본격적인 조치를 취한다. 영의정 황희, 예조판서 신상, 유후(개성시장) 김자지, 전 대제학 하연, 예문제학 겸 세종을 위한 지리자문단장 정인지, 지신사 안숭선 등 조정의 핵심 관료들에게 삼각산 보현봉에 올라서 그 산의 내맥을 살피도록 명령을 내린다.

 이들은 경복궁터에 대해서 엇갈린 주장을 하는 양 쪽을 모두 데리고 백악산과 봉황암에 올라가서 조사활동을 시작한다. 이진, 신효창, 최양선은 “(삼각산)보현봉의 바른 줄기가 승문원 터로 들어왔으니 승문원이 나라의 명당”이라고 했다. 반면 이양달, 고중안, 정앙은 “보현봉의 바른 봉우리가 직접 백악산으로 내려 왔다”고 반론을 폈다. 백악산 아래에 경복궁이 있다. 삼각산 보현봉의 바른 줄기가 승문원 터로 왔는지 백악산으로 직접 내려 왔는지 그 차이에 따라 양쪽 의견이 갈라진 것이다. 


 세종도 백악산 중봉에 올라가 삼각산의 내맥을 살펴본 뒤 봉황암으로 내려와 승문원의 형세를 보고 양 쪽의 주장을 들었다. 세종은 북악산에 올라가 본 소감을 안숭선에게 밝힌다. “보현봉의 산맥이 바르게 백악으로 들어왔으니 경복궁은 명당이다. 그러나 승문원의 내맥도 보통이 아니다”라고 했다. 양 쪽 주장에 다 공감을 표시한 것이다. 세종은 이양달이 지적한 승문원 터의 단점 세 가지 즉 ‘승문원 터가 낮고 미약하다’ ‘산수가 좀 곧다’ ‘정면으로 마주보는 남산이 높다’는 것에 대해서는 좀 더 연구하라고 안숭선에게 지시를 내린다. 

  최양선이 경복궁 터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 한 달여 후 그동안 세종의 지시로 경복궁과 승문원 터를 조사한 영의정 황희, 예조판서 신상, 유후 김자지, 전 대제학 하연, 예문제학 겸 지리자문단장인 정인지 등은 그동안 활동결과를 보고한다.

 그들은 삼각산(북한산)은 화공을 시켜서 산세를 그리게 했고 풍수가들의 의견은 문서로 써 올리라고 해 집현전에 검토시켰다. 목멱산, 백악산, 보현봉에는 직접 올라가서 산세를 살펴봤고 양쪽의 주장도 들었다. 

 

그들은 승문원 터는 “네 짐승인 청룡, 백호, 현무, 주작이 지리학에서 꺼리는 형세를 하고 있고, 또한 터도 협소해서 명당이 아니다”라고 판단했다. 반면 경복궁 터는 “(삼각산)보현봉에서 내려와서 두 번이나 낱봉우리를 일으켜 백악산에 이르렀고 남쪽의 목멱산과 주객이 서로 호응하고 있어서 백악의 정맥이다. 네 짐승도 어느 정도 형세를 갖추고 있다. 경복궁은 그대로 명당자리를 얻어서 삼각산의 중심에 응하고 있다”고 결론을 내린다. 단점으로는 “물줄기의 흐름이 약하다”는 게 지적됐다. 

세종은 이 보고를 받은 후 더 이상 경복궁 터에 대해서 언급을 하지 않았다. 이들의 조사 보고로 한 달여간 조정을 떠들썩하게 한 경복궁 터의 논란이 끝났다. 

 다만 세종은 경복궁에 물이 없다는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궁궐의 동, 서, 북에 연못을 파게 한다. 그리고 경복궁의 오른 쪽에 산세가 낮고 미약한 점을 보충하려 남대문 밖에도 연못을 파는 조치를 취한다. 

 


숭례문과 남지터


세종은 최양선이 경복궁 터에 이의를 제기했을 때 최양선에 대해 미치고 망령된 사람으로 실로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그의 인물됨을 낮게 평가하고 있었다. 이조나 사헌부에서 망령된 말을 한 최양선을 벌주고 파면시키라는 상소가 이어졌다. 그러나 세종은 최양선의 말을 막지도 않았고 벌주지도 않았다. 나무꾼의 말도 성인이 가려들어야 하고, 또한 자신의 전문분야에 대해 의견을 내는 것을 막을 수 없다는 게 이유였다. 이것이 불씨였을까? 최양선은 몇 년 후에도 계속해서 조정에 파문을 일으킨다. 

 최양선은 창덕궁 수강궁 터의 문제점을 지적했으나 그의 상관은 근거가 없다고 했고, ‘돌이 울었다’는 요망스런 말로 형조에서 국문을 당했으며, 경복궁 터 논란이 끝났음에도 다시 경복궁을 옮기자는 주장을 펼쳐 징계 받을 뻔 했고, 세종의 수릉(壽陵)의 혈 자리를 잘못 골라서 의금부에 갇힌다. 예조, 의정부, 승정원에서 다시 최양선을 벌주고 파직을 청했으나 세종은 그의 견해로 벌 줄 수는 없다는 논리를 계속 폈다. 

그랬지만 세종의 인내도 한계에 도달했다. 길흉화복 주장이 반복되자 최양선을 끝내 지리 업무에 배제시키고 음양설을 아뢰지 못하게 했다. 그의 글이 허망하고 상식에 어긋난다고 해서 불사르게 한다. 최양선의 주장을 그대로 펴게 한 혹독한 대가였던 셈이다.  


 최양선에 대한 사관의 평이 조선왕조실록에 남아 있다. “최양선은 지리에 통달하지 못했고 자기의 의견만 고집하는 등 언어와 행동이 극히 좋지 않은 사람이다.”

 세종 재위 27년 풍수가 승원로, 안효례가 왕의 건강을 염려해 거처를 옮겨야 한다고 권한다. 이 때 세종은 "내가 음양지리의 괴이한 말을 믿지 않는 것은 경이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고 하였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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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수릉(壽陵) : 왕이 살아 계실 때 자신의 장지로서 마련해 두는 능을 말한다. 세종은 재위기간에 자신의 능을 부왕인 태종의 능이 있는 헌릉 서쪽에 정한다. 이후 문종, 단종 등 세종의 아들 손자들에게 불행이 닥치자 예종이 할아버지인 세종의 묘를 옮긴다. 현재 여주에 있는 세종의 능은 원래 우의정을 지낸 이인손의 묏자리였다. 이인손은 아들 다섯을 두었는데 모두 과거에 올랐고, 이들 중 이극배와 이극감은 공신으로 봉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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