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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현철의 궁궐이야기 (9)경복궁, 길지(吉地)인가 흉지(凶地)인가 ② - ↳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알게 된 궁궐
  • 기사등록 2019-02-16 22:02:59
  • 기사수정 2019-02-17 17:4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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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현철 우리궁궐지킴이, 전 KBS PD 

 

태조는 한양을 조선의 도읍으로 결정한 20여 일 후 그동안 천도 논의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판문하부사 권중화, 정도전 등 6명을 한양으로 다시 보내서 종묘, 사직, 궁궐, 시장, 도로의 터를 정하게 한다. 이들은 태조가 답사한 남경의 옛 궁궐 터(현 청와대자리)는 너무 좁다고 생각해서 그 남쪽에 평탄하고 넓은 터를 궁궐로 결정한다. 현재의 경복궁이다. 여기에는 여러 산맥이 굽어 들어와서 지세가 좋은 것도 한몫했다. 경복궁 터를 정하는 데 풍수적 판단도 고려했던 것이다.

 

태조 3년 도평의사사에서 나라를 세우면 세 가지를 먼저 해야 한다고 보고한다. 종묘, 궁궐, 성곽을 짓는 것이다. 종묘는 조종(祖宗)을 편안하게 해서 효와 공경을 높이기 위함이고 궁궐은 신하와 백성에게 국가의 존엄성을 보이고 정사를 돌보기 위함이며 성곽은 안팎을 가리고 방비를 해서 국가를 길이 튼튼하게 만들기 위한 것이다.  

 태조는 이 해(1394) 12월 중추원부사 최원을 종묘터, 첨서중추원사 권근을 궁궐터에 각각 보내서 오방의 지신(地神)에게 제사를 지내고 공사를 시작한다. 경복궁은 경기좌도민 4,500명, 경기우도민 5,000명, 충청도민 5,500명의 백성과 스님을 동원해 약 10개월 만에 완성한다. 

 대사헌 박경의 보고에 따르면 당시 스님은 인구의 30% 정도를 차지하고 있었다. 박경은 절에서 마음을 수양하는 스님은 상등, 불경을 강론하고 말을 타고 돌아다니는 스님은 중등, 제사나 초상집에 달려가 의식을 구하는 스님은 하등으로 분류하고 이 가운데 3분의 2가 하등의 스님이라고 했다. 이 하등의 스님이 농사철로 돌려보낸 백성의 빈 공간을 메꾸어서 경복궁 건설에 참여한 것이다.

 

태조 4년(1395) 경복궁이 완공된 후 정도전이 주요 전각의 이름을 짓는다. 경복궁은 <시경(詩經)>에서 따왔다. 旣醉以酒 旣飽以德 君子萬年 介爾景福(기취이주 기포이덕 군자만년 개이경복, 이미 술에 취하고 덕에 배부르니 군자는 영원토록 그대의 크나큰 복을 모시리라)는 뜻이다.

 

태조는 개성에서 한양으로 천도를 하고 경복궁에서 정무를 봤다. 그 후 정종은 개성으로 다시 환도해서 경복궁은 한 동안 주인을 잃는다. 3대 태종은 개성 수창궁에서 즉위해 그 곳에서 정무를 시작했다. 태종은 즉위 5년째 한양으로 옮기지만 경복궁이 아니었다. 태종은 한양에 궁을 하나 더 지었다. 이것이 이궁(離宮)으로 불렸던 창덕궁이다. 태종은 그 곳에서 정무를 본다. 태종은 중국 사신을 맞이하거나 국가적 주요한 행사에만 경복궁을 이용했다. 


 태종은 자신이 경복궁을 이용하지 않는 이유를 스스로 밝혔다. 태종 11년 사간원에서 태조가 창건한 경복궁에서 국사를 다루어야 한다고 건의한다. 태종은 “경복궁은 음양의 형세에 합하지 않는다”는 풍수가의 말이 있고, “무인년 규문의 일은 내가 경들에게 말하기에는 부끄러운 일이다. 어찌 차마 그 곳에 거처할 수 있겠는가”라고 했다. 

무인년 규문의 일은 경복궁을 중심으로 일어난 제 1차 왕자의 난을 말한다. 이 난으로 태종의 배다른 형제이자 세자였던 방석, 방번, 정도전 등이 태종 세력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경복궁을 조선의 정궁으로 활용하는 것은 세종부터다. 세종도 즉위 초에는 주로 창덕궁에 기거했으나 부왕 사후부터 본격적으로 경복궁을 이용한다. 


 

종로구 안국역 현대사옥 뒤 승문원터(위)  오른쪽 주황색 차일 밑에 승문원터 표식이 있다.(아래) 


경복궁 터에 처음으로 이의를 제기한 사람은 최양선이다. 그는 세종 15년(1433) “북악산의 주혈 자리는 경복궁이 아니라 승문원 터”라고 하면서 “어째서 경복궁을 승문원 터에 짓지 않았을까요?”라고 세종에게 아뢴다. 그는 “만약 개인이 주산(主山)의 혈(血)자리에 있으면 자손이 쇠잔해진다”는 내용이 지리서에 있다고 하면서 “창덕궁을 승문원 자리로 옮기면 만대의 이익이 됩니다”고 주장했다. 경복궁 터에 대한 논란의 시발점이다. 승문원은 외교문서를 관장하는 기구로 종로구 안국역의 현대사옥 바로 뒤에 있었다. 

 최양선은 어떤 사람인가? 그는 <태종실록>에 풍수학생으로서 처음 등장한다. 그는 “장의동 문과 관광방 동쪽 고갯길은 바로 경복궁의 좌우 팔로서 길을 열지 말아야 한다”고 진언한다. 즉 경복궁 서쪽의 창의문과 북쪽의 숙정문을 닫아야 한다는 것이다. 태종은 이 건의를 받아들여 두 문을 닫고 대신에 서쪽의 새로운 문인 서전문을 열어 백성들을 이용하게 했다. 백성들은 풍수로 인해 먼 길로 돌아 가야하는 불편을 감수해야 했다. 


 최양선은 세종 12년 두 번째로 등장한다. 이번엔 전 서운장루(書雲掌漏)로서 “태종의 능인 헌릉(서울 서초구)의 고갯길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선다. 헌릉에는 민가가 상당히 많아 사람들의 발자취가 끊어지지 않았던 곳이다. 행부사직(行副司直) 고중안은 풍수학적 관점에서 이 길을 막아야 할 이유가 없다고 즉각 반박했다. 

 세종은 부왕 능의 길을 두고 주장이 엇갈리자 의정부, 육조로 하여금 진위를 따져보게 했다. 세종은 풍수학자 이양달과 최양선을 직접 만나 의견을 듣는다. 이양달은 지리에 정통해 최양선과는 견줄 바가 아니라고 세종이 인물평을 했던 사람이다. 세종은 또 형인 효령대군, 예조판서 신상, 우부대언 윤수 등에게 헌릉 고갯길의 개방 여부를 조사시켰다. 최양선의 주장에 동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럼에도 세종은 완전하게 납득하지 못했고 이 논란은 3년 여 동안 이어진다. 


 세종은 결국 집현전에 자문을 구한다. 최양선은 헌릉의 길을 막아야 하는 이유를 일곱 가지로 제시했다. 집현전은 10권 이상의 지리책을 강론하고 연구해 최양선의 이론이 그릇된 것으로 조목조목 반박한다. 집현전은 “길이 있어서 사람이 다닌 흔적이 많으면 그것은 좋은 땅으로서 후일 흥하게 될 수 있다”고 결론을 내린다. 이후 헌릉의 고갯길 폐쇄에 대한 논란은 잦아드는 듯 했다. 


 세종은 부왕의 묘인 헌릉에 1년에 한 두 번 가서 참배를 했다. 집현전의 자문이 있은 4년 후 세종은 헌릉을 참배한 뒤 길의 개방 여부를 다시 거론하고 이 고갯길을 폐쇄한다. 세종은 음양풍수는 성현의 말씀이 아님으로 진실로 믿지 않는다고 전제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아버지이자 임금을 봉안하는 마음에 터럭만한 흠도 있어서는 안 되므로 도리를 다하는 것이라고 이유를 밝혔다. 

 그러나 세종이 돌아가신 후 1년이 채 안 돼 그의 아들 문종이 다시 이 고갯길을 개방한다. 풍수의 해석에 따라 길이 닫혔다 열렸다 했다. 이것이 풍수의 생명력일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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