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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현철의 궁궐이야기 (8)경복궁, 길지(吉地)인가 흉지(凶地)인가 ① -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알게 된 궁궐
  • 기사등록 2019-02-09 21:07:08
  • 기사수정 2019-02-10 20:0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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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현철 우리궁궐지킴이, 전 KBS PD 


 인간은 기본적으로 땅에서 생명을 향유하며 그 생명의 마무리도 땅에 의탁한다. 그래서일까? 인간은 땅의 모습이 몹시 궁금한 모양이다. 조선의 정궁(正宮)인 경복궁도 풍수학의 관점에서 여러 번 논의를 거쳐서 결정한 곳이다. 그럼에도 6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경복궁 터의 모습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은 경복궁의 터를 어떻게 기록하고 있는 것일까? 

 

태조 이성계는 1392년 7월17일 조선을 세우고 도읍을 옮기고자 했다. 태조는 왕조가 바뀌면 도읍을 옮기는 것이 당연하다고 판단했고 터도 자신이 직접 결정하고자 했다. 태조는 자신이 그 터를 결정하지 않으면 후대 왕들이 신하들의 반대로 도읍을 옮기는 게 어려울 것이라고 여겼다. 


 태조가 조선의 첫 도읍지로 생각한 곳은 한양이었다. 태조는 즉위 1개월 후 국정의 최고 정무기관인 도평의사사에 한양으로 도읍을 옮기도록 지시를 한다. 이틀 후 태조는 삼사우복야(三司右僕射) 이염을 한양으로 보내서 궁실(宮室)을 수리하게 한다. 태조가 한양으로 천도를 하고자 한 것은 고려 말에 개성의 지덕이 쇠해서 한양으로 도읍을 옮기자는 서운관의 여러 차례 보고가 있었기 때문이다. 서운관은 천문·지리 등을 담당하는 부서다.


 그러나 태조가 도평의사사에 지시를 내린 20여 일 후 오늘날 국무총리 격인 시중(侍中) 배극렴, 조준 등이 태조에게 한양 천도의 보류를 건의한다. 아직 한양에는 궁궐, 성곽, 관청 등이 지어지지 않아서 민가를 이용해야 하는 폐해가 따른다는 것이다. 태조는 이 건의를 받아들인다. 천도에 대한 <조선왕조실록>의 첫 기록이다. 


 조선의 천도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는 태조 즉위 2년 새해 정초였다. 태조의 명을 받은 태실증고사(胎室證考使) 권중화가 태실의 길지를 살펴보고 아울러 계룡산을 도읍의 후보지로서 지도와 함께 바친다. 태조는 며칠 후 계룡산의 지세를 살피고자 여러 신하들과 함께 현장으로 간다. 

 그 사이 권중화는 도읍 후보지의 종묘, 사직, 궁궐, 시장터를 도면으로 그려 바쳤다. 태조는 풍수학자 이양달 등에게 땅의 형세를 살펴보게 했으며, 판내시부사(判內侍府事) 김사형에게 땅을 측량하게 하였다. 또한 삼사우복야(三司右僕射) 성석린 등에게는 뱃길, 도로, 성곽터 등의 조사를 시킨다. 조선의 도읍지로 결정하기 위한 매우 구체적인 움직임인 것이다.

 

태조는 계룡산에 도착해서 도읍 예정지 중심의 높은 언덕에 올라가서 지세를 살폈다. 태조의 왕사(王師)인 무학대사도 함께였다. 태조가 최종 결심을 앞두고 무학대사에게 자문했다. 무학대사의 답은 “능히 알 수 없습니다”이었다. 

 태조는 계룡산을 조선의 도읍지로 결정하고 예문춘추관(藝文春秋館) 대학사 김주 등에 도읍지 건설 감독을 맡긴다. 계룡산 답사를 끝낸 2개월 후 태조는 계룡산 도읍지를 중심으로 한 81개의 행정구역을 개편한다. 조선의 도읍지가 제도로서도 확정된 것이다. 


경복궁 근정전 뒤로 북악산이 보인다. 북악산 아래 청와대가 있다. 


  계룡산 도읍지에 제동을 건 이는 하윤이었다. 하윤은 조선의 도읍지가 결정된 9개월 후 이의를 제기한다. 하윤은 부친의 묏자리를 물색하기 위해서 풍수학을 공부했다고 밝혔다. 하윤은 경기 좌·우도관찰사였다. 그가 계룡산에 동행한 기록은 없다. 

 하윤은 “도읍지는 나라의 중앙에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런데 “계룡산은 지대가 남쪽에 치우쳐서 동면, 서면, 북면과는 서로 멀리 떨어져 있다”며 “산은 건방위(10시30분의 15도 범위)에서 오고 물은 손방위(4시30분의 15도 범위)에서 흘러간다고 하니 이것은 송나라 음양지리학자 호순신이 주장하는 ‘물이 오랜 생명을 다해서 쇠하고 패망이 곧 닥치는 땅’임으로 도읍지로 적당치 않다”고 주장했다. 


 태조는 하윤의 주장을 검증해야 했다. 그동안 새 도읍지 건설이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태조는 계룡산을 후보지로 물색했던 권중화, 판삼사사(判三司事) 정도전,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 남재 그리고 하윤으로 검증단을 꾸렸다. 검증단은 고려왕조의 여러 능의 길흉을 조사했다. 그 결과 하윤의 주장과 일치했다. 태조는 계룡산의 도읍지 건설을 중지시킨다. 

태조는 서운관의 모든 비록 문서(秘錄文書)를 하윤에게 주어서 천도의 땅을 다시 고르게 한다. 


 태조의 도읍지 건설 중지 결정에 중앙과 지방에서 크게 기뻐하였다고 <조선왕조실록>은 기록하고 있다. 

앞서 태조가 계룡산 답사를 출발할 때도 “왕후가 아프다” “지역에 도적떼가 일어났다”는 보고가 있었다. 태조는 “권문세가들은 자신이 사는 곳을 옮기려고 하지 않는다. 이 보고는 나의 출발을 중지시키려는 구실이다”라며 언짢은 표정으로 보고자를 처벌하려고 했다. 

조선의 천도는 태조의 강력한 의지에 비해 신하들은 매우 소극적인 자세로 임한 것으로 보인다.


 그 후 조선의 새로운 도읍지로 거론된 곳은 무악(毋岳), 남경(南京), 불일사(佛日寺), 선고개(鐥岾), 부소(扶蘇)등이었다. 불일사, 선고개, 부소는 당시의 도읍지였던 개성에 있는 지역으로 추정된다. 이 중에서 태조는 무악과 남경을 직접 둘러본다. 

계룡산을 반대했던 하윤은 “무악(서울 서대문구)은 그 형세가 낮고 좁지만 궁궐의 터가 넓고 나라의 중앙이며 뱃길도 있고 산과 물이 또한 증빙할 만하다”고 추천했다. 중추원 학사 이직도 무악에 힘을 보탰다.

 그는 <비결>에서 주장하는 세 가지 ‘삼각산 남쪽으로 하라’ ‘한강에 임하라’ ‘무산(毋山)이라’는 것이 무악이라고 주장했다. 다만 그는 무악은 명당이지만 터가 좁다고 토를 달았다.

 서운관 책임자를 겸직했던 최융과 윤신달, 유한우 등은 부소를 첫째로 남경을 두 번째로 추천했다. 이들 후보지 모두다 의견이 분분했다. 유학자, 서운관, 풍수학자 등 거의 모두가 참가한 논의였다.

 

태조는 새로운 도읍지를 둘러싼 분분한 의견에는 천도를 싫어하는 신하들의 마음도 깔려 있다고 보았다. 이런 와중에 판삼사사(判三司事) 정도전은 국가의 성패는 사람에게 달려있는 것이지 지리의 성쇠와 관련이 없음을 중국의 여러 왕조의 예를 들기도 했다.  

 태조는 “내가 의심을 해결하리라”고 하면서 남경으로 행차한다. 신하들의 반발에 대해 정면 돌파하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이다. 

 

당시는 고려의 제도가 남아 있었다. 남경은 한양을 일컫는 다른 이름이다. 태조는 남경의 옛 궁궐터를 직접 가서 산세도 관망했다. 남경의 옛 궁궐터는 현 청와대 자리다. 태조의 현장 답사에는 서운관 책임자 윤신달과 무학대사도 동행했다. 태조는 윤신달에게 물었다. “여기가 어떠냐?” 윤신달은 개성이 으뜸이고 여기는 그 다음이라고 하면서 “여기는 건방위가 낮아서 물이 마른 것이다”라고 대답했다. 

무학대사는 “사면이 높고 수려하며 중앙이 평평하니 성을 쌓아 도읍을 정할 만합니다. 그러나 여러 사람의 의견을 따라서 결정하소서”라고 했다. 태조는 재상들에게 논의를 부쳤다. 재상들은 “꼭 도읍을 옮기려면 이곳(남경)이 좋습니다”고 논의 결과를 보고했다. 

소수의견도 있었다. 하윤은 “(남경의 옛 궁궐터는) 산세는 비록 볼 만한 것 같으나, 지리의 술법으로 말하면 좋지 못합니다”고 했고, 양원식은 “적성 광실원(廣實院) 동쪽에 있는 산인 계족산이 좋다”고 했다. 

 태조는 그동안 새 도읍지에 대한 여러 신하들의 의견을 문서로 올리도록 했다. 또한 직접 불러서 의견 청취도 했다. 태조는 개성도 단점이 있을 것이라고 하면서 “이곳(남경)의 형세를 보니 왕도가 될 만한 곳이다. 더욱이 뱃길이 있고 사방의 이수도 고르니까 백성이 편리할 것이다”고 기뻐했다. 

태조와 신하들, 서운관, 그리고 무학대사 등이 모두 참가해서 논의하고 현장 답사를 거친 다음에 한양은 조선의 서울이 된다.(계속)



*이수(里數)가 고르다: 이수는 거리를 재는 단위(里)로서 ‘사방의 이수가 고르다’는 것은 동서남북에서 사람이 오고가는 거리가 같다는 의미로 국토의 중심이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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