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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현철의 조선이야기 (16) 정도전, 장자방인가 - <조선왕조실록>을 통해서 알게 된 조선- 왕현철 우리궁궐지킴이/전 KBS PD (wa…
  • 기사등록 2020-06-13 18:47:39
  • 기사수정 2020-06-16 12: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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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나라 고조(유방)가 항우를 물리치고 천하를 통일하는데 크게 기여한 세 명의 참모가 있다.

 장량(장자방), 소하, 한신이다. 장량은 책략, 소하는 행정, 한신은 군사에서 뛰어난 활약을 보여주었다. 

여기서 유래해 장량(장자방)은 책략이 뛰어난 참모를 일컫는 보통 명사로 사용하기도 한다. 자방은 장량의 자이다. 


 조선시대에 두 명의 장자방이 있었다. 정도전과 한명회다. 

 정도전은 조선이 건국할 즈음에 “한나라 고조가 장자방을 쓴 것이 아니라, 장자방이 한 고조를 쓴 것이다”라고 왕왕 술에 취하면 태조를 한고조, 자신을 장자방으로 비유하였다. 태조실록에 기록된 내용이다. 

 또한, 제7대 세조는 신하들과 술자리에서 “한명회는 나의 장자방이다”라고 자주 이야기했다. 서거정은 한명회의 신도비에 이 내용을 기록하고 있고 그의 문집 <사가집>에도 실어 두었다. 


 정도전은 스스로를 장자방이라 했고 한명회는 그의 주군 세조가 불러준 장자방인 것이다.

 정도전은 왜 장자방인가?

 정도전은 18세 고려의 과거 성균시(成均試), 그리고 2년 후 성균진사에 합격한다. 그는 공민왕 대에 충주사록 등으로 관직을 시작했으나 부모의 상을 연이어 당하자 3년 상을 치른다. 그는 이 기간 중에도 책을 손에 놓지 않고 경서를 연구해서 상제를 마친 후에는 성균박사에 임명된다. 그는 이색, 정몽주 등과 함께 성리학을 강론할 만큼 학문적 재능이 뛰어났다. 


정도전 초상 (1342~1398) :조선의 설계사로 자부했고 성리학적 이상 사회를 실현하고자 했다. 사진=네이버이미지 


 정도전이 이성계를 처음 만난 것은 그의 나이 42세 때다. 이 내용은 <태조실록>의 정도전 졸기와 정도전의 문집 <삼봉집> 제8권에 기록돼 있다. 삼봉은 정도전의 호다. 

 그 내용을 보자. 정도전은 고려 우왕 9년 동북면 도지휘사 이성계의 막료로 부임해서 함주의 막사로 따라 간다. 

정도전은 이성계가 군사를 엄숙하게 지휘하고 편성된 대오가 잘 정비된 것을 보고 “참으로 훌륭합니다. 이런 군대를 가지고 무슨 일을 못하겠습니까?”라고 조용히 아뢴다. 이성계는 “그게 무슨 말이오”라고 되묻자 정도전은 “동남쪽의 왜적을 물리치는 것입니다”라고 둘러댔다. 


 정도전은 이어서 시를 짓겠다고 하면서 병영의 문 앞에 있는 노송의 껍질을 깎고 그 하얀 부분에 시를 쓴다.

 “까마득한 세월의 한 그루 저 소나무 

첩첩한 청산 속에서 잘 자랐도다

잘 있거라 이 다음에 다시 볼 수 있을는지 

인간의 세월은 너무 쉽게 가는 구나” 

 (蒼茫歲月一株松/生長靑山幾萬重/好在他年相見否/人間俯仰便陳蹤)

 

이 시에서 첩첩 산중의 잘 자란 소나무는 이성계를 빗대었고 정도전은 천명의 소재를 알고 그 뜻을 붙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도전은 참모로서 어떤 구체적인 계책을 제시했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다. 

 

조선왕조실록에는 각 왕마다 총서(總序)가 있다. 왕의 이력과 특징을 간단히 요약한 것이다. 태조실록 총서는 다른 왕들에 비해서 그 내용이 매우 많다. 태조의 4대 조상과 태조가 고려에서 활약한 공을 전부 뭉뚱그렸기 때문이다. 여기에 정도전과 이성계가 만난 기록이 나온다.


 공민왕은 후사가 없었다. 그 뒤를 이은 우· 창왕은 정치를 올바르게 하지 못했고 ‘왕 씨’가 아니라는 논란에도 휩싸였다. 명나라 황제도 우·창왕은 ‘왕 씨’가 아님을 책망했다. 고려의 중신 이성계, 정몽주, 심덕부 등은 명나라 황제의 뜻과 더불어서 두 왕을 폐하기로 힘을 모으고 흥국사에 모였다. 군사도 동원해서 무력을 과시했다. 고려의 중신들은 우·창왕을 폐하고 왕 씨 요를 세운다. 왕요는 고려의 마지막 왕 공양왕이다. 

 

정도전도 흥국사 모임에 밀직부사의 자격으로 참여해서 공양왕을 세우는 데 기여했다. 그 공을 인정받아서 봉화현 충의군으로 봉해진다. 봉하는 정도전의 본관이다. 이 모임을 통해서 정도전은 이성계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음을 알 수 있으나 어떤 계책을 제시했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다. 


 이후 이성계는 공양왕을 옹립해서 왕실에 협력을 했지만 참소를 받는다. 이성계는 그 위기를 벗어나고자 가솔을 데리고 짐을 꾸려서 개성을 떠나려고 했다. 이성계의 주변에 정도전, 남은, 조인옥등이 있었다. 

 정도전 등은 “공의 몸은 나라와 백성이 매여 있어서 거취를 경솔히 할 수 없습니다. 공이 국토의 한 모퉁이에 물러나 있으면 참소가 눈덩이처럼 불어나서 더욱더 화가 커질 것입니다. 공은 여기에 남아서 어질고 현명한 사람을 등용시켜서 기강을 바로잡으면 참소하는 말이 사라질 것입니다”라고 극구 말렸다. 

이성계의 가신 김지경은 세 명의 조언을 반대했으나 이방원은 그 내용을 전해 듣고서 아버지와 세 분은 근심과 기쁨을 같이 하는 사람이라고 가신을 나무랐다. 

정도전은 남은, 조인옥 등과 함께 이성계에게 조언을 할 만큼 사이가 가까워졌으나 계책을 단독으로 아뢴 것은 아니었다. 

 

공양왕 재임 마지막 해 이성계는 중국에 사신으로 가서 돌아오는 태자를 맞이하는 임무를 맡는다. 이성계는 태자를 맞이하려 가는 도중 해주에서 사냥을 하다가 말에서 떨어져 큰 부상을 입는다. 정몽주는 이것을 기화로 해서 우선 이성계의 세력을 제거하기로 한다. 

이성계의 핵심 세력으로 여겨진 조준, 정도전, 남은 등을 탄핵시키고 감옥에서 죽이려고 했다. 이방원은 조준, 정도전, 남은 등이 죽임을 당하는 것은 자신 집안 세력의 약화로 이어진다고 보고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선수를 쳐서 정몽주를 선죽교에서 죽인다. 이로써 조준, 정도전, 남은 등은 감옥에서 풀려나고 이성계의 힘이 될 수 있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해서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자는 움직임은 급물살을 탔다. 태조실록 총서에 의하면 그 최초의 모의자는 남은이다. 남은은 이성계의 위화도회군을 계기로 해서 조인옥 등과 비밀히 추대 논의를 하고 차츰 이방원, 조준, 정도전 등에게도 범위를 확대해나가서 52명을 모았다. 정도전은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는 52명에 포함되었으나 최초의 기획자는 아닌 것이다. 


 사관이 기록한 정도전의 졸기를 보자. 정도전의 졸기에는 “무릇 태조를 도울 만한 것은 모의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라고 기록돼 있다. 

 신숙주가 쓴 삼봉집 후서(後序)에도 “조선 개국 초기의 큰 정책은 다 정도전에서 나왔다”라고 평가하고 있다. 


 이성계와 정도전의 만남을 조선왕조실록과 <삼봉집>을 통해서 조선의 건국까지 살펴봤다. 

위의 기록을 종합하면 정도전은 이성계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많은 조언을 한 것은 사실로 보인다. 다만 조선의 건국까지만 보면 정도전이 스스로 장자방이라고 부른 것을 뒷받침 할 만큼의 구체적인 기록은 미흡하다.  


 역사와 기록은 어떻게 정의해야 하는가. 기록에 없는 것은 역사가 아닌가. 반대로 기록에 없는 것을 역사라고 주장할 수 있는가. 참으로 어려운 문제다. 

 

장량(장자방)은 한고조가 천하를 통일한 후 내리는 토지와 벼슬을 버리고 적송자(고대의 신선)를 따라서 신선이 되고자 은거하였다. 반면, 조선의 장자방은 현실 정치에 참여한다.

 정도전은 조선건국 후 많은 업적이 기록돼 있다. 정도전은 태조의 즉위교서를 짓고 태조의 명에 의해서 조선을 경영하는 <조선경국전>을 저술하며 그의 후손에 의해서 엮어진 <삼봉집>도 남겼다. 그는 경복궁 전각의 이름을 지어서 임금이 정치를 하는 기본 철학을 담기도 했다. (계속)

* 정도전의 이력은 한국고전번역원의 <한국문집총간 저자행력정보>를 참고했다.  


삼봉집 (정도전의 문집) : 삼봉집은 네 번 증보·증간되어서 현재 14권으로 돼 있다.


***태종 이방원의 냉정함과 승자의 태도***

 태종 이방원은 선죽교에서 정몽주를,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정도전과 남은 등을, 왕이 되어서는 자신의 처남 민무구 형제를, 상왕으로서는 세종의 장인 심온을 죽인다. 이로써 그는 냉정한 인물로 각인될 수 있다. 그가 판단하는 정치적 대의를 위해서였다. 

 그러나 태종 이방원을 이것만으로 평가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이방원은 왕이 되어서 조선의 개국에 대한 공을 논하면서 조준과 남은을 맨 앞에 두었고 정도전은 5,6등 사이에 있다고 평가를 했다. 태종은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정도전, 남은과 맞섰으나 조선 개국의 공은 인정했다. 

 제1차 왕자의 난에서 이방원은 승자이고 패자는 정도전, 남은 등으로 역적이 된다. 조선에서 역적은 그 형제와 남자의 자식까지 다 죽이는 것이 일반적이다. 

 태종은 남은의 형 남재를 벌해야 한다는 주장을 일축하고 보호한다. 태종은 남재의 능력을 평가해서 그의 재위 기간 좌·우의정을 거쳐서 영의정까지 올려준다. 남재는 69세까지 수를 누렸다.

 제1차 왕자의 난 사건 당일 남은을 수행한 하경, 최운은 오히려 발탁해서 임용한다. 그 주인을 위해서 충성을 다했다는 이유였다. 최운은 태종 18년 경상도 병마도절제사가 된다. 

 정도전은 네 명의 아들을 두었다. 정도전의 세 아들은 제 1차 왕자의 난 당일 아버지와 운명을 같이한다. 나머지 한 명 정진은 살아남는다. 태종은 나중에 그의 직첩을 돌려주고 판안동대도호부사로 임명한다. 정진은 세종 대에 형조판서까지 오르고 67세에 졸한다. 정진은 두 아들을 두었으니 정도전의 가계는 이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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