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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현철의 조선이야기 (15) 조준, 사직서를 내다 - <조선왕조실록>을 통해서 알게 된 조선-왕현철 우리궁궐지킴이/전 KBS PD (wang…
  • 기사등록 2020-06-06 21:06:59
  • 기사수정 2020-06-10 13:0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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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건국 초기 관리의 최고 직위는 문하좌시중과 문하우시중이었다. 태조 3년 시중을 정승으로 명칭을 바꿨다. 으뜸의 위치에 있어서 수상(首相) 또는 상상(上相)이라고도 했다. 각각 배극렴과 조준이 맡았다. 그러나 배극렴은 조선건국 4개월 만에 병으로 돌아간다.


 배극렴 사망 이후 좌정승은 조준, 우정승은 김사형이 맡았다. 태조 재위 7년 동안 그 자리는 한 번도 바뀌지 않았다. 제2대 정종이 즉위를 해도 좌·우정승은 그대로였다. 조준과 김사형은 좌·우정승을 거의 8년 동안 함께 맡은 것이다. 조준에 대한 태조의 신임이 매우 두터웠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의 인물을 알기 위해서는 그가 한 일이나 발언, 저서 등을 살펴보고, 또한 본인이 제출한 사직서나 사후 사관이 기록한 졸기(卒記)도 봐야 한다. 

 조선시대 관료들의 사직서는 현대인들이 즐겨 쓰는 ‘일신상의 이유로......’처럼 간단한 문장이 아니고 대부분 매우 길다. 사직서는 왕과 맺은 인연으로 시작해서 왕으로부터 입은 은혜, 자신이 한 일이나 물러나야 하는 이유 등을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어서 그의 업적이나 삶의 철학도 엿볼 수 있다. 

졸기는 사관이 쓰기 때문에 인물을 객관적으로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함벽루(경남 합천군 황강, 경남문화재자료 제 59호) 조준은 왜적을 소탕하기 위해 경상도에 파견됐다. 당시 황강 함벽루에 올라 시를 남겼다. 사진=합천군 홈페이지

 

조선왕조실록에는 조준이 정종에게 올린 사직서와 사관이 기록한 조준에 대한 졸기가 남아 있다. 

 조준은 정종 1년 8월에 사직서를 올린다. 그가 사직서를 올리는 시점의 5개월 동안 행적에 대한 기록은 없다. 

국정최고 책임자 좌정승이 조선왕조실록에 5개월 동안 등장하지 않는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조준은 왕과 사이가 나쁜 것도 아니었다. 그 이유를 보자. 


 연산군일기와 광해군일기를 제외한 조선왕조실록 대부분은 왕의 하루 일과를 거의 매일 기록하고 있고, 처리한 업무도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해서 양도 방대하다. 특히 세종실록과 정조실록은 그 내용의 질뿐만 아니라 양도 어마어마하다. 조선왕조실록은 조선시대의 역사이자 각 왕의 얼굴인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정종실록은 부왕 태조실록이나 다른 왕의 실록에 비해서 비교적 간단하다. 정종실록은 매일 쓰지 않았으며 한 달에 10일 이내의 기록이 대부분이고 심지어 하루만 기록한 경우도 있다. 정종은 스스로 포부를 갖고 왕위에 오르지 않았지만 의욕적으로 일을 하지도 않은 것이다. 

조준은 왕의 부름에 따라서 그의 역할이 없었던 것이다. 이것이 조선왕조실록에 조준이 5개월 동안 등장하지 않고 사직서를 올린 이유일지도 모른다. 

 

조준이 정종에게 올린 장문의 사직서를 보자. 

 조준은 사직서의 첫 머리에 한나라 고조를 도와서 천하를 통일한 소하와 장량(장자방)의 예를 들면서 ‘소하는 벼슬에 대한 욕심을 그치지 않아서 모욕을 당하였고, 장량은 스스로 물러나서 자신을 보전했다’는 것이다. 조준은 소하를 경계하고 장량을 법으로 삼아서 지극한 정리를 다하고 싶다고 했다. 

 이어서 조준은 고려의 관리가 되어 태조를 만나서 사전을 개혁하고 태조의 덕으로 조선이 건국되었으며 자신은 개국 공신의 맨 앞자리에 올라서 많은 식읍을 받았고 그 은혜가 끝이 없음을 밝히고 있다. 

 또한 조준은 정도전, 남은 등과 처음에는 같은 처지에서 함께 공을 세우고 터럭만큼도 틈이 벌어지지 않았으나 요동정벌 문제로 사이가 나빠졌고, 결국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서로가 다른 길을 걷게 되는 것도 되돌아보고 있다.

 

조준은 참소를 받아서 자신의 생명이 경각에 달렸을 때 태조께서 무죄로 밝혀주어서 삶을 되찾은 것도 사직서에 기록하고 있다. (조준은 한 때 자신의 첩이었던 국화로부터 ‘반역할 뜻이 있다’라고 고발을 당했다)

 조준은 끝으로 최근 꼬리별(혜성)이 꾸짖고 산의 돌은 무너지고 뭇 까마귀가 밤에 우는 자연재해가 모두 자신이 어리석고 자리에 눌러 앉아 현명한 사람에게 길을 터주지 않는 탓으로 돌리고 있다. 


또한 중국의 책 <서전>을 인용해서 ‘신하는 총애와 이익으로 성공에 처하지 말라’ ‘족한 것을 알면 욕되지 않고 그만두는 것을 알면 위태롭지 않다’라고 자신이 물러나야 할 이유를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있다. 

 

정종은 조준의 사직서를 예감하고 있었다. 정종은 도승지 이문화에게 “조준이 공민왕과 인연을 맺은 후 자신이 한 일을 이야기 하면서 사직을 하고 싶다”는 지난밤의 꿈 이야기를 할 무렵에 사직서가 올라왔던 것이다. 

 정종은 꿈에서 그랬던 것처럼 사직을 받아들이지 않고 답서를 써 우승지 이숙으로 하여금 조준의 집에 전달하게 한다. 정종도 예를 다해서 조준을 중히 여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정종은 답서에서 조준의 영민함과 학문의 깊이, 부왕을 도와서 나라를 반석위에 올려놓고 백성을 편안하게 한 공을 치켜세우고 자신도 “(그대의) 보필을 받아서 태평성대를 누리고 싶다”는 간절한 염원을 담았다. 

 조준은 왕의 답서에 감격해서 눈물을 흘리지만 두 번 더 사직을 청한다. 마지막에는 우정승 김사형과 같이 사직을 올렸다. 정종은 결국 부왕 태조의 허락을 받아서 조준과 김사형의 사직을 받아들인다. 


 제3대 태종은 조준을 다시 부른다. 태종은 그를 판문하부사, 영의정부사, 좌정승 등의 직책을 주어서 국정을 총괄하게 한다. 조준은 태종 5년 병으로 돌아간다. 그의 나이 60세였다. 

 

조선왕조실록에 ‘졸기’를 검색하면 2,116건이 나온다. 졸기는 사관이 어떤 인물의 사후에 그의 업적이나 인물평을 기록한 것이다. 대부분은 조선의 관리들에 관한 내용이고 왕의 종친인 대군이나 공주들에 관한 것도 있다. 매우 특이하게도 단양군사 남의(南儀)의 아내 이 씨의 졸기가 실려 있다. 그녀가 남편의 죽음에 아랑곳하지 않고 재혼하고 바람을 피우는 내용이다. 그녀가 바람피운 것이 문제가 돼서 공초를 받았기 때문에 기록으로 남았을 것이다. 그런데 정작 그의 남편 남의의 졸기는 없다. 

 

졸기는 업적과 인물평으로 구성돼 있다. 업적은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하고 있지만 인물평은 사관의 주관이 담겨져 있다. 특히 인물평에서 사관은 매우 엄격한 잣대를 대서 비판적 의견이 많다. 

 조선의 관리로서 많은 업적을 남겨도 사관은 졸기에서 형편없는 인물로 평가하는 경우도 있다. 사관은 객관적 사실을 기록하는 것이 임무였으나 인물평을 통해서 자신의 의견을 후대에 전한 것이다. 


 조준의 졸기는 고려에서 태종까지 활동한 이력을 상세하게 기록한 장문이다. 조준의 졸기는 고려에서 세종까지 오랫동안 벼슬을 한 황희와 더불어 조선왕조실록에서 가장 긴 졸기가 아닐까 추측한다. 사관은 그의 업적을 자세하게 전하고자 한 것이다.

 사관은 조준의 인물평에도 후한 점수를 줬다. 사관은 조준을 ‘두뇌가 명석하고 올곧은 성품으로 공정했다’라고 평가했다. 조준의 졸기는 업적이나 인물평에서도 모두 긍정적 평가 일색인 것이다. 

 다만 사관은 ‘임금의 사랑을 독점하고 권세를 오래 잡고 있었기 때문에 원망하는 사람이 많았다’라고 사족을 달았다. 그러나 이 사족도 어쩌면 좋은 평가일지도 모른다. 

 조준이 다른 사람으로부터 원망을 받은 대표적 사례를 보자.

 

정종2년 조준은 순군옥에 갇힌다. 간의대부 권진은 조준이 사병혁파에 대해서 부정적인 이야기를 했다고 사헌부에 고발을 한다. 사병혁파 반대는 ‘역모죄’ 의심을 받을 수도 있다. 사헌부에서 국문을 청하고 조준은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라고 부인을 했으나 위기에 처했다. 

 이 고발의 배후에는 민무구 형제가 있었다. 민무구와 민무질은 당시 세자빈 민 씨의 동생이다. 민무구 형제는 미래권력 세자빈을 업고 조준에게 인사 청탁을 했으나 거절을 당했다. 그 앙갚음을 한 것이다. 세자였던 이방원은 고발의 배후에 민무구 형제가 있음을 알아차리고 조준을 위기에서 구해준다. 이방원의 현명한 판단이 아니었다면 조준은 ‘역모죄’로 본인뿐만 아니라 집안 자체가 풍비박산될 수도 있었다. 조준은 미래권력의 인사 청탁을 거절할 만큼 강직하고 공정한 잣대가 원망을 받은 것이다. 

 

조준과 더불어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다. 조준은 강직하고 과감한 결정을 내린 반면 부드러움으로 조정을 이끈 우정승 김사형이다. 김사형은 한 번도 탄핵을 받지 않을 만큼 모가 나지 않았다. 사관은 김사형의 졸기에서 “조준과 김사형 두 정승은 8년 간 호흡을 맞추어서 국정을 잘 다스렸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조선건국 초기 태조의 지도력 아래서 강직함과 부드러움으로 좌·우 날개를 잘 펼친 조준과 김사형이 있었던 것이다. 

 


사관은 “조준은 자리에서 물러났을 때는 일체 손님을 받지 않았고 시사도 말하지 않았다. 그는 풍채가 늠연하고 선과 악을 구분했으며 역사에 능했고 시를 호탕하게 지었으며 사람 됨됨이도 그러했다”라고 평가를 했다. 


송당집 (조준의 문집) 조준의 시 170여 편과 상소문 등이 실려 있다.  
사진=한국학중앙연구원 

 


그의 문집으로 <송당집>이 있다. 여기에는 170여 편의 시와 상소문 등이 실려 있다. 

 조준이 왜적을 소탕하기 위해서 파견돼 합천군 황강의 함벽루에서 지은 시 한 편을 소개한다.


아득한 곳에 말을 달려서 홀로 누각에 오르니 / 驅馬悠悠獨上樓온 세상 어지러움에 십 년의 시름이 겹네 / 風塵宇宙十年愁제갈량처럼 평화로운 계책 낼 수 없어 한스럽구나 / 恨無諸葛開平策고운 풀 난 모래톱서 말 타고 창을 비껴들고 시만 소리 높여 읊네 / 橫槊高吟芳草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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