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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현철의 조선이야기 (11) 태종, 민무구 형제를 처벌하다 - <조선왕조실록>을 통해서 알게 된 조선 - 왕현철 우리궁궐지킴이/전 KBS PD (wa…
  • 기사등록 2020-05-09 21:17:22
  • 기사수정 2020-05-14 13:2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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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그대들의 말을 듣지 않을 것이니 물러가는 것이 좋다.”

 “신들의 청은 그만 둘 때가 없을 것입니다.”

 

태종과 사간원·사헌부·형조 등 삼성(三省)의 관리들이 민무구 형제의 처벌을 두고 나눈 대화다. 서로 간 한 치도 물러설 의사가 없는 팽팽한 줄다리기다. 

여기에 의정부, 공신 등 조정의 거의 모든 원로·대신들까지도 가세를 해서 민무구 형제의 법적인 처벌로 생명을 빼앗고 반란의 싹을 잘라야 한다고 요구했다. 


하지만 태종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 줄다리기는 거의 4년간 지속된다. 


 태종은 조정의 요구에 대해서 민무구 형제를 자원안치=> 경기도 안치=> 공신자격박탈=> 직첩(임명장)회수=> 한양에서 더 멀어진 충북 여흥과 대구로 다시 옮기는 등 처벌의 강도를 차츰 높여왔다. 그러나 조정이 요구한 생명은 빼앗지 않았다. 

 

사헌부·사간원 관리들은 자신들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사직서를 내고, 새로 임명된 신하들도 전직과 마찬가지로 민무구 형제에 대해서 똑같은 처벌을 요구했다. 

 태종은 민무구 형제는 훈친이기 때문에 차마 인정으로서 처벌할 수 없다고 솔직히 고백하기도 했다. 중전 민 씨도 분을 참고 부모 생전까지는 목숨을 보전해 달라고 부탁했다. 

 

왕이 미온적 태도를 취할수록 조정의 요구는 점점 더 거세졌다. 조정은 민무구 형제와 관계를 맺어온 세력들까지 확대해서 붕당을 형성하는 위협적인 존재로 여겨서 없애야 한다고 요구했다. 그럼에도 태종은 여전히 조정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다. 

 

사간원과 사헌부는 “민무구 형제와 그 세력들을 마땅히 죽여야 하지만 (왕이) 인정에 이끌려서 그들을 제거하지 못한다면 모두 섬으로 유배를 보내자”라고 타협안을 제시했다. 태종은 타협안에 가타부타하지 않고 며칠 후 자신이 겪은 민무구 형제의 행동을 교서를 통해서 널리 알린다. 태종이 전위 소동을 일으킨 약 2년 후다. 


 “(민무구 형제는) 역심을 품어서 내가 세자에게 전위하는 것을 기뻐하고 복위하는 것을 분하게 여겼다.”

 “중전의 지친으로 부귀영화를 누림에도 불구하고 교만 방자하다.”

 “내가 종기로 병이 들었을 때도 나의 건강에 대한 염려보다 맏아들 양녕대군을 끼고서 권세를 쥐려고 했다. 적장자 외의 아들은 폐해야 한다는 뜻을 보였다.”

 태종은 이 외에도 민무구 형제의 불충과 겸손하지 못한 행위를 지적하면서 “법에 따라서 엄격하게 징계하겠다”라고 밝혔다.  

 

사헌부·사간원은 “전하께서 민무구 형제의 죄를 조목조목 신하와 백성들에게 밝혔으니 난적을 징계하라”라고 잇달아 상소를 올렸다. 형조는 “교서에서 열거한 내용은 반역에 해당함으로 국문을 해서 법에 따라 시행해야 한다”라고 요구했다. 

조정은 왕이 밝힌 교서를 통해서 민무구 형제를 처벌할 명분을 더욱더 얻었다. 

 

태종은 그래도 민무구 형제의 생명을 빼앗지 않고 민무구는 서해의 옹진, 민무질은 동해의 삼척으로 옮겼다. 태종은 두 도의 감사에게 농사지을 땅과 넓고 깨끗한 집을 마련해주게 한다. 태종은 그 대신 사헌부가 요구한 민무구 처의 외명부 벼슬을 회수하고 남편을 따라서 안치하게 한다. 

민무구 형제의 가속들은 한양을 떠나야 했다. 이들의 서울 집은 헐게 한다. 민무구 형제의 집 재목과 기와는 일본 사신을 접대하는 동평관과 서평관을 짓는데 사용한다. 


 민무구 형제의 집을 헐어서 한양으로 돌아올 희망을 없앴음에도 불구하고 조정의 처벌 요구는 계속됐고 태종은 여전히 미적거리는 태도를 취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차츰 민무구 형제의 뿌리에서 뻗어나가는 가지가 드러난다. 

 호군 이지성은 “민무구 형제는 죄가 없는데 쫓겨났습니다”라고 세자에게 누설하지 말라고 하면서 세자와 민무구 형제의 편에 서고자 했다. 세자가 민 씨 집에서 자란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지성이 세자에게 비밀을 요구하면서 말한 내용은 세상에 드러났다. 세자가 부왕에게 알렸기 때문이다. 이지성은 결국 재산을 몰수당하고 노비로 전락된다. 

 

원평군 윤목과 한성소윤 정안지도 순금사에 가둔다. 이들은 중국 사신으로 갔을 때 “민무구 형제는 국가에 공이 큰데 임금이 잘못 처벌을 했다”라고 나눈 대화가 드러났기 때문이다. 윤목은 자신뿐만 아니라 아들까지 직첩을 회수당하고 유배를 가야 했다. 정안지는 장 90대를 맞는다. 

 윤목의 공초에서 이름이 나온 호조판서 이빈, 평강군 조희민, 서성군 유기를 순금사에 가두었다. 이빈은 민무구 형제의 집을 네 번 방문했고 조희민은 “민무구 형제가 후일 등용되면 운명은 알 수 없다”라고 했으며 유기는 민무구 형제를 친구로서 불쌍히 여겼기 때문이다.  

 

또한 전라도 병마도절제사 강사덕, 전 총체 김첨도 체포하게 한다. 강사덕은 “민무구 형제가 서울로 돌아오면 같이 놀겠다”라고 했고, 김첨은 민무구 형제의 부친 민제가 돌아갔을 때 몰래 문상을 했기 때문이다. 김첨은 석방됐으나 모두들 재산을 몰수당하고 유배를 간다. 

 정사공신 이무도 처벌을 받는다. 정사공신은 제 1차 왕자의 난에서 이방원의 편에 서서 공을 세운 사람이다. 이무는 원래는 정도전의 사람이었다. 


그는 제1차 왕자의 난 때 정도전의 거사를 이방원에게 밀고한다. 

그는 친분이 있는 민무질을 통해서 이방원에게도 다리를 걸쳤던 것이다. 이무는 제1차 왕자의 난 당일에도 애매한 태도를 취하지만 이방원은 밀고의 공을 인정해서 그의 벼슬을 높여준다. 

 이무의 양다리 걸침은 이후에도 계속 됐다. 

그는 민무구 형제를 과감하게 처단해야 한다고 태종에게 아뢰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민무구 형제의 세력들에게 후일을 대비하도록 다독거렸다. 


이무는 결국 처형된다. 민무구 형제도 제주도로 유배를 간다. 

 

제주도. 태종은 신하들과 4년여를 논의한 후 민무구 형제를 유배지 제주도에서 자결하게 한다. 사진=네이버이미지


조정은 이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조정은 역모로 여겨진 과거의 일을 들추어내어서 처벌을 요구한다. 현재의 기준으로는 일사부재리 원칙의 위배였다. 

 호조판서를 지낸 평원군 조박의 녹권(공신자격)을 빼앗고, 그 자손도 금고에 처한다. 

조박은  민무구 형제의 사건과 직접 관련이 없었고 이미 죽었다. 태종과는 동서였다. 

 조박은 정종이 즉위한 이후 자신의 친척 유 씨의 아들 ‘불노’를 정종의 아들이라고 해서 원자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을 했다. 

정종은 불노는 자신의 아들이 아니라고 부인해서 유야무야 되었던 10년 전의 사건이었다.


 제1차 왕자의 난에 관련된 정도전, 남은, 심효생 등의 녹권도 빼앗고 그들의 논밭과 노비도 몰수를 했다. 

유배를 보낸 윤목 등 민무구의 세력들을 유배지에서 참형에 처한다. 조정은 역모로 연상되는 사건들을 다시 끄집어내서 처벌을 요구한 것이다. 


태종도 강경한 자세를 누그러뜨려서 서서히 조정의 요구를 받아들인다.

 상소를 올리는 부서도 늘어난다. 

사헌부·사간원·형조 등 임금에게 상소를 올리는 전담부서뿐만 아니라 의정부·공신 등 조정 대신들, 평소 상소를 올리지 않는 실무부서 육조·삼군·대소 신료와 제군(諸君)들도 참여한다. 제군은 종친이나 훈신에서 군으로 봉해진 사람들이다. 


 마지막으로 세자 양녕대군이 정부·백관의 말이 옳으니 유음을 내려달라고 청을 올렸다. 태종은 “나라 사람들이 참여하는데 세자가 또 무엇 때문에 참여하느냐”라고 짐짓 나무라는 듯 했다. 

영의정부사 하윤은 “사건이 종사에 관계되는 것이기 때문에 세자가 말씀드리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면서 세자를 옹호했다. 세자까지 처벌 요구에 참여했으니 모든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태종은 4년 여 끌어온 민무구 형제 사건의 종지부를 찍는다.

 “유배지 제주해서 자결하라.”

 

태종은 민무구 형제가 역심이 있다고 스스로 밝혔음에도 즉결 처분을 내리지 않고 4년여를 끌었다. 

왜 그랬을까? 태종의 속내를 알 수 없다. 그 진의를 직접 설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태종의 전위 소동에서 민무구 형제의 처벌까지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으로 볼 때 필자는 다음과 같이 추측한다. 


 태종의 전위 소동은 세자를 위한 것이었다.

 태종은 세자가 민무구 형제(뿌리)와 그들을 따르는 세력(가지)에 휘둘리지 않고 왕권을 행사하기를 바랐던 것이다. 

태종은 가지는 자신의 독단으로 자를 수 있지만 그 뿌리를 제거하는 데는 세자의 자발적 동의가 필요하다고 여겼던 것이다. 


세자가 거리낌 없이 정치를 펼칠 수 있기 때문이다. 태종이 4년여 끌어왔던 이유다.  


민무구 형제의 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태종의 치밀함과 무서울 정도의 인내력을 엿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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