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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현철의 조선이야기 (10) 태종, 속내를 감추다 - <조선왕조실록>을 통해서 알게 된 조선 -왕현철 우리궁궐지킴이/전 KBS PD wan…
  • 기사등록 2020-05-02 19:36:57
  • 기사수정 2020-05-05 18:3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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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제 3대 임금 태종은 무인의 색채가 강하다. 

그는 고려 말 정몽주를 죽이는 지휘자로서 아버지의 창업을 도왔다.

 또한 조선이 건국된 뒤 1 ·2차 왕자의 난을 주도해 형제들과 그 세력을 제압하고 세자에 이어 왕이 되었다. 

 

그의 또 다른 면모를 보자. 

그는 13살에 부모 슬하를 떠나서 원주 각림사로 간다. 과거 공부를 위해서다. 

그가 어린나이에 개성의 부모 곁을 떠나서 상당히 떨어진 원주 치악산의 자그마한 절을 택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2년 여 노력 끝에 고려 진사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병과(丙科) 7등으로 합격한다.

 

그는 16살에 과거에 합격한 문인으로서 세상에 진출한 것이다. 태종실록 총서에 의하면 이방원(태종)은 글 읽기를 좋아했으며 지혜롭고 총명했다고 한다. 

 이방원의 문학적 재능은 정몽주의 마음을 떠보기 위해서 지은 하여가(何如歌)에서도 엿볼 수 있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성황당 뒷담이 다 무너진들 어떠하리(만수산 드렁칡이 얽어진들 또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하여 아니 죽으면 또 어떠하리.”

 

태종은 왕으로서 불교를 배척했지만 그가 공부를 한 각림사의 추억은 꿈속에서도 잊지 못했다. 그는 “부처의 땅에 가는 이유를 모르겠다”는 사간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군사훈련을 내세워서 원주 각림사로 가서 옛 추억을 그리기도 했다. 


 각림사에 대한 지원도 각별했다. 

태종은 각림사가 세금을 많이 거두었다고 고소한 사건을 원주목사에게 덮어두라고 했으며, 전지 1백결과 노비 50구도 내렸다. 각림사 중창을 위해서 철 1천 근, 목재 1천 주를 지원하고 단청을 칠하기 위한 화원 15명도 보낸다. 이 외에도 새로 간행한 화엄경과 향을 보내며 쌀·콩 수백 석도 내린다. 


 태종은 왕으로서 국가 정책을 어기면서도 각림사에 대한 개인적인 추억과 은혜를 잊지 않았던 것이다. 태종의 인간적인 면을 엿볼 수 있는 기록이다.

 태종이 공부해서 과거에 합격했고 그 은혜를 기려서 중창했던 치악산 각림사는 임진왜란 때 불탔다. 지금은 남아 있지 않아서 아쉽다. 


치악산 국립공원 (강원도 원주). 조선 3대 태종은 치악산 동쪽 각림사에서 공부해 과거에 급제한다. 사진=네이버이미지. 




 태종 6년 8월 18일 창덕궁에서 부엉이가 울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부엉이, 올빼미, 까마귀 등 새가 우는 것을 기록하고 있다. 이런 새들의 울음은 재난이나 재앙을 예고하는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엉이 등의 새가 울면 스님을 궁으로 모셔서 재앙을 물리치는 기양(祈禳)을 올렸고, 천문·역일을 담당하는 서운관에서 괴이함을 풀어주는 해괴제(解怪祭)를 지내기도 했다.

 

이날의 부엉이 울음소리는 어떤 재앙을 예고한 것일까? 

 태종은 장인 민제, 좌정승 하윤, 우정승 조영무, 안성군 이숙번을 비밀리에 불러 세자에게 왕위를 넘겨주겠다는 뜻을 전했다. 당시 태종은 39살로 건강했고, 2년 전 세자로 책봉된 양녕대군은 12살이었다. 

또한 태상왕과 상왕으로 물러나 있는 태조와 정종도 살아 계셨다. 태종이 밝힌 전위(傳位)의 이유는 천재지변이 자주 나타난다는 것이었다. 

 

조선에서 천재지변이 자주 나타나면 왕은 공구수성(恐懼修省)해야 한다. 

공구수성은 (임금으로서) 자연의 재이를 몹시 두려워하고 수신하고 반성해야 하는 것이다. 천재지변만으로 왕위를 물려주는 것은 뚜렷한 명분이 될 수 없었다. 

그러나 태종의 뜻은 확고해 보였다.


 영의정부사 성석린을 필두로 해서 조정의 거의 모든 대신들이 반대를 한다. 

이날부터 왕위를 물러나겠다는 태종과 물러나야 할 이유가 없다는 신하들 사이에서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진다.  

신하들은 상소가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자 태상왕 태조에게 알리겠다고 몰려갔고 태종은 지신사(비서실장)황희를 보내서 부왕에게는 알리지 말라고 신하들을 만류했다. 

태종은 왕의 말씀을 전하는 내시, 승전색을 시켜서 밤에 몰래 세자궁에 국새를 갖다 놓게 했으며, 이를 본 세자는 울면서 국새를 다시 왕의 정전에 가지고 와서 부왕의 뜻을 감당하지 못하겠다고 했다.


 신하들이 면담을 요구하자 태종은 최근에 침을 맞고 뜸뜨기를 했기 때문에 나갈 수 없다는 핑계를 대고 5~6일 후에 만나겠다고 했다. 

좌정승 하윤은 자신이 수상의 자리에 있는 한 절대로 교지를 받들 수 없다고 하면서 “누구와 더불어 전위의 예를 행할 것인가”라고 태종을 압박했다. 사헌부, 사간원 등에서도 “전위는 불가하다”는 상소가 이어졌으나 태종은 여전히 완고한 자세를 취했다. 


 태종은 열흘 후 최측근 이숙번만을 비밀리에 또 부른다. 

태종은 “너는 나를 굶기려고 하느냐”라며 어머님이 꿈이 나타나서 우신다고 이숙번에게 자신의 꿈 이야기를 했다. 

이숙번은 “어머님을 굶기지 않으려면 왕위를 물려주어서는 안 된다”라고 해몽을 해주었다. 태종은 “내가 자식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것이 왜 이리 어려운가”라고 말을 흐렸다. 


 이숙번은 태종의 의중을 파악하고 밖으로 나와서 대신들에게 왕의 꿈 이야기를 퍼뜨렸다. 태종은 어머님을 굶기지 않기 위해서 전위를 해서는 안 된다는 명분을 얻었다. 태종은 자신의 꿈 이야기를 대신들에게 옮긴 이숙번의 탓으로 돌리고 국새를 상서사(尙瑞司)에 다시 갖다 놓게 한다. 


 태조는 뒤늦게 이 소식을 듣고 태종을 불러서 자신에게 알리지 않는 등 전위의 잘못된 점을 지적하고 큰 벌주 잔을 내린다.

 태조는 아들에게 내린 벌주 잔을 스스로 먼저 마셨다. 이날 태종도 몹시 취하도록 마셨다. 이것으로 태종의 전위 소동은 완전히 마무리 됐고 조정은 일상으로 되돌아갔다. 

 

그러나 전위의 파동 속에는 태종의 매의 눈이 감추어져 있었다. 태종은 물결치는 파도 속에서 어떤 맥락을 포착하고자 했다. 태종의 속내는 약 1년 후 드러난다.  

 

그 속내는 태종 7년 영의정부사 이화 등의 상소에서 비롯된다. 태종의 처남 민무구·민무질과 취산군 신극례의 죄를 청하는 것이었다. 

“지난해 전위를 하려 할 때 민무구 형제는 기뻐하는 얼굴빛이었고 복위를 할 때는 도리어 슬프게 여겼다. 이것은 대부분의 신하들과 다른 행동이다.”

“어린 세자를 끼고 임금처럼 행세하려 했다.”

“‘임금의 적장자 외에는 없애도 좋다’라고 말했다.”

“전하가 우리들을 의심하고 꺼리시니 장차 어떻게 할까?”


 상소는 지난해 왕의 전위 소동에서 민무구 형제가 보여 주었던 말과 행동으로서 왕을 의심하고 딴 마음을 품고 있기 때문에 국문을 해서 반란의 근원을 막아야 한다고 결론을 맺고 있다. 상당한 후폭풍을 예고하는 상소다. 

 

반란, 즉 역심은 왕조 국가에서 최고의 형에 처하고 가장 경계하는 것이다. 조선에서 반란 혐의자는 3심제도를 거치지 않아도 되는, 즉각 처리가 일반적이었다.

 태종은 상소를 대내에 두고 해당부서에 내리지 않았다. 태종은 상소를 받아들이지 않거나 즉각 처리하지 않겠다는 뜻을 보여 준 것이다. 

반란 혐의를 담고 있는 상소를 바로 처리하지 않는 것은 이례적이다. 


 민무질은 조정의 상소에 대해서 자신을 변호했고 관련자들을 불러서 대질 신문을 했으나 민무질에게 유리한 증언은 없었다. 여러 공신들은 민무구·민무질 형제와 신극례의 죄를 다시 청했다. 


 태종은 첫 조치로서 이들을 자원안치하게 한다. 자원안치는 스스로 머물 곳을 정하는 비교적 가벼운 처벌이다. 이에 대해서 조선 초기 정무를 총괄하는 의정부는 왕은 사적인 은혜에 젖어서 국가적 대의를 결단하지 못한다고 판단해서 다시 상소를 올리고 법에 따른 처벌을 요구했다. 왕과 민무구 형제는 처남· 매부 관계였을 뿐만 아니라 세자 양녕대군은 민 씨 집에서 자랐다. 


 사헌부·사간원에서도 국문을 해서 반란의 근원을 막아서 악을 없애야 한다고 상소를 올렸다. 개국·정사·좌명공신들도 “간사한 자들을 없애서 국가의 대계를 보전하라”라고 상소를 올렸다. 이들은 조선의 창업을 함께한 개국공신, 제1차 왕자의 난을 평정한 정사공신, 제2차 왕자의 난을 도운 좌명공신들로 태종이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세력들이다. 


 태종은 다시 처벌을 바꾼다. 민무구는 연안, 민무질은 장단, 신극례는 원주에 안치시킨다. 이것도 상대적으로 가벼운 처벌이다. 반란 혐의는 국문을 해서 생명을 빼앗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이들을 국문하지 않은 채 한양과 가까운 경기도의 연안과 장단에 안치했기 때문이다.


 며칠 후 태종은 조정의 핵심 관료들을 창덕궁 광연루로 불러서 술을 베풀고 “민무구 등 세 사람의 죄를 논하지 말라. 서울로 불러들이지 않고 타고난 수명을 마치게 할 것이다”라고 당부를 했다. 

 조정대신들은 왕의 뜻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로부터 거의 3년간 태종과 신하들이 사이에 민무구 형제들의 처벌을 논하는 줄다리기가 시작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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