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덕의 소치”.
고위공직자가 공개사과를 할 때 쓰는 용어다. 풀어쓰면 “제 잘못입니다”라는 말이다.
조선의 왕들은 일식이나 황사기습, 홍수나 가뭄이 져도 “부덕의 소치”라고 했다.
조선의 왕들만 쓴 게 아니다. 김영삼 전 대통령도 김대중 전 대통령도 대선실패 등 역사의 고비에서 “부덕의 소치”라며 “깊이 자성하고 사과드린다”고 했다.
가까운 예로는 김현종 국가안보실 2차장이 지난해 하반기 물의를 빚은 뒤 “제 덕이 부족했다”고 사과한 적이 있다.
‘파안대소(破顔大笑).’
한자 의미를 풀어쓰면 “얼굴이 찢어지도록 크게 웃는다”는 뜻이다. 즐거운 표정으로 한바탕 크게 웃음을 이르는 말이다.
사진=TV조선9뉴스 캡처.
문재인 대통령 내외가 20일 청와대에서 영화 기생충 봉준호 감독팀과 화기애애한 점심자리를 가졌다.
문 대통령은 “내 아내가 여러분에게 헌정하는 ‘목살 넣은 짜빠구리’ ”라고 했다. 봉 감독이 뭐라 농담했는지 문 대통령 내외가 크게 웃어 제쳤다. 파안대소의 낱말풀이 그대로였다.
이 영상을 보는 순간 ‘파안대소’와 ‘부덕의 소치’라는 단어가 동시에 떠올랐다.
두 말은 연관성이 없다. 하지만 어떤 행동이 엇박자를 낸다는 느낌 하나만은 유별나게 잘 전달해준다.
이날 코로나19 지역감염 확산으로 대구 등 전국이 초비상이었다.
사람들은 사람이 죽어나가는 그 뉴스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고, 불안감이 전국에 엄습했다..
이런 살풍경한 모습과 청와대의 한바탕 큰 웃음은 엇박자였다.
국민의 고통이 대통령 내외의 웃음에 엇박자를 낼 수는 없다. 불가항력이기 때문이다.
엇박자는 대통령 내외가 낸 것이다. 국민의 아픔을 고려해 행사를 취소하거나, 비공개로 하거나, 어쩔 수 없이 열기로 했다면 고통 받는 국민을 의식해 좀 살살 웃어야 했던 것이다.
나라의 전염병 창궐에 대해 조선의 왕들이 아니더라도 김영삼 전 대통령이나 김대중 전 대통령은 아마 “부덕의 소치”라고 크게 자신 탓을 하면서 행사를 취소했을 거라 믿는다.
야당은 청와대의 점심행사와 김정숙 여사의 큰 웃음에 대해 “기괴한 파안대소”라고 논평했다.
무심하고 공감능력이 부족하다는 야당의 비판은 과거에도 있었다.
시행착오는 한 번에 그쳐야 하는데 이어지고 있어 유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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