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가 “문재인 대통령이 김정은의 수석대변인이라는 말을 듣지 않도록 해달라”는 내용의 대표연설을 한 지난 12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가장 힘든 하루를 보낸 사람은 문희상 국회의장이었을 것이다.
여당 의원들의 ‘샤우팅’과 야당 의원들의 야유가 뒤섞여 본회의장이 난장판으로 변했지만 국회의장의 권위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문 의장이 수도 없이 손가락을 입에 갖다 대며 “조용히 하세요”라거나 “그만, 그만 하세요”라고 외치고 “싫어도 들어야 한다. 그게 국회다”라고 인내심을 호소했지만 여당 의원들은 소 닭 보듯 무시했다. 제 잘난 맛에 사는 일부 초선 여당 의원들은 “않으세요”라는 의장 호소에도 요지부동으로 선 채 버티기도 했다. 하기야 집권 여당의 원내지도부가 의장 단상까지 올라와 문 의장 코앞에서 침 튀겨가며 항의해도 꼼짝없이 당했으니 의장 권위에 대해 더 말할 필요가 있을까 싶다.
나 원내대표의 원고내용은 사전 배포돼 의원들에게 다 알려졌다. 여당 지도부도 국회의장도 본회의장이 소란스러워 질 것을 예상하고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여당이 연설을 방해하고 야당이 맞대응하면서 난장판이 됐는데도 국회의장은 읍소 외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가 “의장이 Order(질서)를 외치고 지팡이로 내려치면 회의장이 조용해지는 영국 의회처럼 만들어야 하는데...”라고 혼잣말을 할 땐 측은지심이 생길 정도였다.
문 의장이 언급한 영국의회라면 이 같은 난장판은 일어날 수가 없다. 영국 의회도 야유와 지지 함성으로 종종 시끄럽다. 하지만 존 버카우 하원의장이 “오더(order·질서)”를 길게 외치면 본회의장은 정숙을 되찾는다. 의장이 “자제하세요. 성인처럼 굴지 못하겠다면 나가세요”라고 쏘아대면 그 순간 하원의원은 본회의장을 쫓겨나는 신세가 된다.
영국의회. 메이 총리가 지척에 마주한 야당의석을 향해 연설하고 있다. 여당 의원들이 벤치에 비좁게 앉아 있다. 사진=OBS
영국의 의회는 긴 벤치형 의자가 서로를 마주보도록 좌우로 나뉘어 배치됐다. 의회 바닥에는 붉은 선이 그어져있다. 흥분해서 이 선을 넘으면 즉시 퇴장된다. 하원의장이 수위를 불러 직권으로 퇴장시킨다. 미국 의회엔 의원들이 의장석 근방으로 접근하지도 못한다. 지명 받지 않은 사람이 단상으로 올라가면 즉각 체포대상이다. 의회의 복장규정도 엄격하다. 드레스코드를 지키지 않고 후드티셔츠를 입은 의원을 하원의장이 퇴장시킨 게 불과 몇 년 전 일이다.
문 의장은 영국과 미국 의회의 의장 권위가 부러울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다. 영국과 미국의 의원들이 의회의 독립성을 획득하려고 얼마나 많은 피를 뿌렸는지는 역사에 생생하게 남아있다. 이런 역사성과 전통을 잘 아는 문 의장이 도깨비 방망이를 든 것도 아닌데 한국 국회가 환골탈태할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염치없다는 소리를 들을 뿐이다.
문 의장도 다른 선배 국회의장처럼 의장자리에 오른 순간 소속당을 탈당했다. 당적을 갖지 않는 것은 국회의 독립성을 지키기 위해서다. 문희상 국회의장엔 그날 나경원 원내대표가 연설한 날이 천재일우의 기회였다. 한국 국회를 바로 세울 수 있는 그런 역사적인 장면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문 의장은 이랬어야 했다. “자제해달라”고 호소하는 대신 잘난체하는 초선의원들을 호통으로 야단치고, 의장 단상까지 올라온 여당 원내대표와 토론을 하는 대신 엄하게 질타한 뒤 그런데도 말을 안 들으면 국회 경위를 불러 단호하게 퇴장시켰어야 했다. 문 의장이 인내를 당부하기 전에 영국 의회의 선조들처럼 현재 권력 앞에서 스스로 용기를 냈다면 한국 국회가 제법 달라질 수 있었다.
필요한 것은 말이 아니고 행동이다. 문 의장은 “여러분, 이건 공멸의 정치이다. 상생의 정치가 아니다”라고 말을 했지만 공멸의 정치를 중단시키는 어떤 행동도 하지 않았다.
문희상 의장은 74세의 6선 의원이다. 이 시대의 큰 어른이다. 어른이 어른다워야 국회도 품격을 확보할 것이다. 문 의장은 국회의장 당선사에서 “국회는 민주주의 꽃이며 최후의 보루”라며 “국회가 펄펄 살아있을 때 민주주의도 살고 정치도 살았다”는 아름다운 연설을 했다. 하지만 난장판 국회를 목도한 국민들은 ‘과연 국회가 펄펄 살아 있는지’ 문 의장에게 묻게 된다.
‹이 글은 에너지경제 19일자 전문가시각에 ‘국회의 품격’이라는 제목으로 실린 칼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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