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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의 정치판을 풍미한 3김은 독자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1980년 대 만화 ‘왈순 아지매’가 3김의 이미지를 잘 표현했다. ‘왈순 아지매’는 김대중을 펄펄 끓는 물이 담긴 컵으로 그렸다. 김대중의 레드 콤플렉스를 비유한 것이다. 김영삼은 물이 반 정도 찬 컵이었다. 지식이 부족하다는 의미였다. 김종필은 불순물이 떠다니는 컵이었다. 군사쿠데타로 때가 묻어있다는 의미다.

 3김은 부정적 이미지를 장점으로 바꿨다. 김대중은 통일 전문가로, 김영삼은 포용력 있는 덕장으로, 김종필은 애국심으로 스스로의 이미지를 승화시켰다. —­


김대중은 용공 이미지를 희석시키는 게 급선무였다. 1997년 대통령 선거에서 신의 한수를 선보였다. 진보적 야당지도자였던 김대중이 보수 우파 김종필과 손을 잡았다. 많은 사람들의 허를 찌르는 가장 확실한 묘수였다. 군복을 입고 전방부대를 시찰하는 장면을 아무리 TV 광고에 내보내도 바뀌지 않을 부정적 면모를 한 번에 끝냈다. 이미지와 평판의 포로가 되는 길은 재기불능의 길이다. 김대중은 너무나 푸르디푸른 김종필과의 연대로 빨간색을 탈색시킬 수 있었다. 

김영삼은 자신의 단점을 장점으로 만드는 기술이 있었다. 넉넉한 인간적인 매력과 대담하고 선 굵은 정치행보를 통해 자신의 이미지를 만들었다. 조깅하면서 “머리는 빌리면 된다”고 한 그의 말은 유명하다. 그가 군 출신 노태우 대통령과 김종필의 손을 잡고 합당한 것도 선 굵은 정치의 이미지를 부각시키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 그는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한다”고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했다. 논리보다는 감성에 강한 김영삼이었다.  

대법관 출신 이회창은 자신의 장점을 지키지 못해 실패했다. ‘대쪽’이라는 청렴이미지를 훼손한 것은 반대파의 ‘귀족’이라는 공격이었는데 이를 효과적으로 제어하지 못했다. 아들의 병역기피 의혹, 호화빌라 거주, 며느리의 미국 원정출신이라는 삼각펀치에 무너졌다.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사과할 것은 사과하면서 그래도 대쪽이미지를 살려야 했다. 

하지만 그는 겉모습을 다르게 보이려고 애쓰면서 죽도 밥도 아닌 것으로 자신의 이미지를 만들었다. 아들을 소록도에 봉사활동 보내고, 갑자기 양복대신 잠바를 입고 시장 통에서 상인들과 퍼져 앉아 밥을 먹었다. 사람은 갑자기 변할 수 없다. 그는 근엄한 이미지로 포청천의 지도자가 돼야 했다. 자신의 대쪽 이미지를 살려 강력한 법치를 주장하고 군과 수사기관, 국정원 등을 바로 세우는 데 주력했다면 결과는 달라졌을 것이다. 

1997년 대선에서 박찬종은 대통령후보 지지도 조사에서 1등을 구가했다. 꽤 오랜 시간 인기가 높았는데 3김정치에 반대하면서 개혁적인 이미지를 구축했다. 깨끗하고 똑똑하며 참신하게 보였다. 

1997년 대선의 유력후보들은 모두 60,70대였다. 이 가운데서 버버리 코트를 걸친 박찬종의 깔끔한 외모는 젊은 층에 크게 어필했다. 그가 무균질 우유라는 광고를 한 것도 이미지 형성에 도움이 됐다. 무균질 우유라는 광고 문구처럼 그는 청렴하고 깨끗한 정치인으로 자신을 만들었다. 

역설적이게도 그의 이미지가 ‘빛 좋은 개살구’로 드러나면서 박찬종은 실패했다. 깔끔한 외모에 알맹이를 채우지 못한 것이다. 정치적 현장에서 답을 구하지 않고 실적 대신 이미지를 만드는 데만 주력한 것은 부메랑으로 작용했다. 정책을 두고 싸우는 투쟁의 과정이 없었고 콘덴츠를 공부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그저 독불장군 모습이 부각되면서 김영삼 대통령이 ‘독불장군에겐 미래가 없다“고 한마디 하자 그대로 무너졌다. 

이미지는 양면을 갖고 있다. 남을 비판하면서 개혁적 이미지를 축적할 수 있지만 그것을 정책과 콘덴츠로 채우지 못하면 이기적 독불장군으로 비쳐진다. 

광고를 통해 깨끗한 이미지를 만들고 유력정치인이 된 경우로는 오세훈 전 서울시장이 있다. 그는 정수기 광고를 찍었다. 잘 생기고 훤칠한 오세훈이 요가를 하면서 정수기 광고를 하는 모습은 세련된 제 2의 박찬종이었다. 노무현 정부 시절 치러진 2006년 서울시장 선거전은 노란색으로 온몸을 휘감은 강금실이 선두였다. 그 뒤를 한나라당의 맹형규 홍준표 후보가 추격하고 있었지만 역부족이다 보니 오세훈이 대안으로 차출됐다. 오세훈은 강금실을 대파하고 서울시장에 당선됐다. 

박찬종은 실패했는데 오세훈은 어떻게 해서 성공했는가? 오세훈은 정치개혁의 한계를 느낀다면서 2004년 총선에 출마하지 않았다. 한 줌의 권력에 미련을 갖지않는다는 대범함을 과시했다. 2보 전진을 위해 일보 후퇴하는 통 큰 전략이었다. 국회에서 돈 선거를 없애는 오세훈 선거법을 만든 것도 실적 있는 개혁가로서의 명성을 높였다.

 오세훈은 의원직을 버리고 서울시장직을 얻었다. 오세훈이 정책과 콘덴츠로 참신함을 돋보이게 한 데 비해 박찬종은 참신한 외양과 날카로운 논리 만큼 실적이 없었다.  

오세훈 시장은 권력을 쉽게 던진다. 무상급식 주민투표에서 패배하자 다시 서울시장직을 버렸다. 그런 그가 7년 만인 2018년 11월 자유한국당에 복당했다. 오세훈에게는 책임 있는 자리를 너무 쉽게 버린다는 꼬리표가 붙었다. 그것은 그의 장점이었는데 이젠 단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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