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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이 한 가지 이슈를 오랫동안 제기하다 보면 결국 그 이슈가 그 정치인의 이미지로 굳어지게 된다. 케네디는 시민권을 옹호하면서 매우 용기 있다는 평을 듣게 됐다. 존슨은 베트남전에 거짓말을 하면서 정직하지 못하다는 비판을 받았다. 예술가는 베끼고 대가는 훔친다. 시대에 맞는 이슈라면 상대의 것이라도 과감하게 훔칠 줄 알아야 한다. 이슈가 기억에서 사라져도 이미지는 오랫동안 그 이슈의 잔재로 남게 된다.” <딕 모리스 신군주론> 


2011년 10월 26일 서울시장 보선에서 나경원 후보는 잘 싸우고도 패배했다. 참신한데다 똑똑하고 미모까지 갖춘 여성 후보여서 매력만점이었다. 그러나 이슈전에서 완패하면서 좋은 이미지를 구축하는데 성공하지 못했다. 

진보진영의 팟캐스트 ‘나는 꼼수다’가 정국을 뒤흔들고 있을 때였다. ‘나꼼수’는 나경원을 맹폭했다. 1억원짜리 피부샾 출입, 가족의 사학재벌 비리의혹이 터져 나왔다. 음모와 중상모략이 판을 쳤다. 하지만 이게 전부는 아니었다. 패인은 다른 데 있었다. 유권자의 의식변화를 간과했던 것이다.  

최고의 선거 이슈는 무상급식이었다. 나경원은 반무상급식의 슬로건을 내걸었다. 초중등학생에게 전면적인 무상급식을 실시하는 것은 포퓰리즘의 극치라고 반대했다. 무상급식은 나라의 재정을 좀먹어 나라를 망하게 한다. 이런 주장은 보수언론의 논리와 일맥상통했다. 밑바닥 흐름은 달랐다. 서울시민들은 “아이들 밥 먹는 문제 가지고 왜 그러지?”라며 한나라당을 이상한 눈빛으로 쳐다봤다. 

당시 재벌2세들의 무분별한 행태, 재벌사돈의 팔촌까지 끼리끼리 먹고사는 게 부각돼 있었다. 재벌가의 딸들이 골목길에 빵가게를 내 동네빵집을 무너뜨리고 재벌의 유통회사가 서민의 구멍가게를 몰아냈다. 사람들은 재벌들의 문어발식 침탈에 분노하고 있었다. 

무소속 후보 박원순이 일치감치 승기를 잡은 것은 밑바닥 정서를 읽고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민주당과 박원순은 무상급식 슬로건으로 선거전을 주도했다. 


나경원은 패전했지만 보수진영엔 ‘귀중한 패배’였다. 설마하던 나경원의 패전을 보고 공룡같던 보수정당은 진짜 위기를 절감했다. 이러다 동냥 바가지 찰 것 같다는 공포감이 하늘을 찌르면서 그토록 미루던 당의 변신을 본격화한 것이다.  

한나라당은 이때까지 연전연패였다. 그 전 지방선거, 재·보궐 국회의원 선거, 무상급식 찬반투표 등에서 연속 패배했다. 패전의 연결고리를 끊지 않으면 2012년 4월 총선이 위태롭다는 위기설이 퍼져 있었다. 만에 하나 나경원이 이겼다면 한나라당은 그냥 그렇게 웰빙당으로 정치적 운명을 끝냈을지 모른다. 무사안일하게 총선과 대선에 임했다면 실패는 예고된 비극이 될 수밖에 없는 흐름이었다. 

그 점에서 나경원은 보수반격의 '주춧돌'이었다. 그가 패배하면서 보수진영은 어쩔 수 없이 박근혜에게 비상대권을 주었다. 잘 싸우고도 패한 나경원이 결과적으로 그렇게 만들었다.



 박근혜는 나경원의 패전에서 알게 됐다. 비록 박근혜는 나 후보와 관계가 좋지 않아 따로 선거 지원 유세를 다녔지만 현장에서 배우고 얻은 게 많았다. 현장의 도도하고 큰 흐름을 읽은 박근혜는 민주당의 전면 무상급식을 베끼고 나아가 민주당에서 주장해온 무상의료 같은 진보적인 복지정책을 훔쳤다. 정체성과도 차이가 나는 경제민주화도 훔쳤다. 온전히 서울시장 선거전 패배의 경험에서였다. 

 경제민주화 이슈를 과감하게 내세운 것은 시대의 흐름에 따른 행동이었다. 경제민주화를 제기한 쪽은 그보다 10년 전 진보정당 민주노동당이었다. 5년 전에 민주당이 받아 줄기차게 제기해왔다. 다른 정당의 등록상표였지만 개의치 않았다. 경제민주화는 당내 보수파 의원들의 반발을 샀다. 하지만 이게 노이즈 마케팅이 되면서 새누리당의 경제민주화 공약은 자연스레 국민에게 알려졌다. 유권자들에게 “이게 새누리당 공약이야? 진보정당 공약이야?”라고 헷갈리게 만드는 데 성공했다.

공약도 베끼는 수준에 그치면 그저 평범하다. 훔치는 정도가 돼야 눈길을 끈다. 훔치는 수준은 어떤 것인가? 다른 당의 공약이지만 자신들이 만든 것처럼 국민에게 알리는 것이다. 경제민주화 정책을 두고 새누리당은 수차 당내 대립과 투쟁과정을 거쳤다. 선거 캠프위원장 김종인과 당 원내대표 이한구가 경제민주화 개념을 두고 시끄럽게 싸웠다. 박근혜는 원내대표이던 이한구를 경제민주화 논의에 손을 떼도록 했다. 대신 국민행복추진위원장이던 김종인에게 일임하며 힘을 실었다. 이로써 박근혜는 이슈 훔치기를 완결할 수 있었다. 


박근혜는 위기에 처할수록 더 독하고 강해지는 면모다. 작은 전투에서 지고 그것을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아 큰 전쟁에서 이기는 법을 그 때 보여주었다. 박근혜가 서울시장 보선이후 한나라당에 대한 절대통치권을 부여받는 과정을 보면 그의 유별난 인내심과 임기응변적 정치력을 재발견하게 된다. 물론 임기말에 탄핵당하는 것을 보면 당시에 천운이 그에게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서울시장 선거에서 패배한 이후 홍준표 대표는 최대한 버텼다. 그 해 7월에 대표가 된 홍준표는 자리에 집착했다. 오세훈 서울시장이 주도한 무상급식 찬반 주민투표에서 지고 난 뒤 “사실상 이긴 선거”라고 강변했다. 서울시장 선거에서 나경원이 졌지만 “청와대가 책임질 일”이라고 우겼다. 

소설가 이외수의 표현을 빌리자면 ‘존버정신’의 발로가 아닐 수 없다. ‘존나게 버티는 정신’으로 홍준표는 자리를 지키려고 했다. 홍준표는 기가 센 정치인이다. 이명박 정부에서 법무장관을 원한 그는 이 대통령이 노동장관을 제안하자 거부했다. 그 후 스스로를 비주류라며 독립군처럼 행세했다. 그간 서울시장, 대통령선거에 계속 도전한 이력도 갖고 있었다. 하지만 박근혜를 당해 내지 못했다. 


 박근혜는 선거 패배 이후 조용히 물러나있었다. 때가 무르익기를 기다리는 작전이었다. 그는 은둔했지만 보수언론이 나서 그의 등판을 종용하기 시작했다. 당내서도 친박근혜 세력뿐 아니라 적대적 세력인 친이명박계 국회의원들도 대거 나섰다. 그 중에 정두언 의원도 있다. 그는 2012년 4월 총선승리를 위해 “박근혜에게 비상대권을 주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들이 그토록 박근혜 독재권을 외친 것은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서였다. 국회의원 선거에서 살아남으려면 당이 먼저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홍준표는 유승민의 일격으로 무너졌다. 친박계 유승민 최고위원이 최고위원직을 던지고 중립파인 남경필 최고위원이 가세하면서 홍준표 체제는 한 순간에 붕괴됐다. 사양하던 박근혜는 마지못해 독약을 마신다는 표정으로 비상대책위원장을 수용했다. 한나라당이 넝쿨째 박근혜의 품속으로 굴러들어간 순간이었다. 당헌당규상 대선에 나갈 후보는 선거 1년 전부터 당대표를 하지 못하도록 돼 규정돼 있었다. 박근혜에게는 예외조항이 됐다. 명실상부한 독재권이었다. 

아무리 비상대권을 손에 쥐어주었더라도 보수혁신이 없었다면 말짱 도루묵이 됐을 것이다. 박근혜는 비상대권을 부여받자 당을 환골탈태시켰다. 20대 청년을 당 지도부의 일원으로 모시고 당 상징색을 파란색에서 빨간색으로 바꿨다. 당명도 새누리당으로 바꿨다. 이를 통해 그는 총선에서 이기며 연전연패의 고리를 끊고 대권으로 직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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