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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정남자가 아니었다. 사회남자, 대문 밖의 남자지 집안의 남자가 아니었다. 일에 미쳐서 집안은 다 나에게 맡기고 자기는 영화만 하러 다녔다.'' ''연기(煙氣)로 왔다가 연기로 떠서 세상을 돌아다니고 그래서 또 연기로 만난다. 사람은 숨이 끊어지면 목석과 같다. 그 사람 아무리 잘났다 하더라도 눈 딱 감으면 자연으로 돌아간다. 그러니 너무 욕심을 내지 말자.'' 

지난 4일 폐암으로 별세한 배우 신성일의 아내 배우 엄앵란씨가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 빈소에서 기자들에게 한 말이다. 신성일은 향년 81세 본명은 강신영이다. 그는 1937년 대구에서 태어났다.1959년 신상옥 감독의 영화사 신필름의 신인 모집에 갔다가 2640 대 1의 경쟁에서 전속 배우로 발탁 되었다. 그때 '넘버원 스타' 라는 뜻인 신성일 이름을 얻었다. 1960년 '로맨스빠빠'로 데뷔했으며 1964년 '맨발의 청춘' 1974년 '별들의 고향' 1977년 '겨울 여자' 등의 영화를 찍으면서 최고의 주연 배우로 떠올랐다. 주연 배우만 맡은 회수가 507회, 평생 출연한 영화는 524편이며 전성기에는 한해에 65편의 영화에 주연으로 출연했다. 그는 1993년 '망각 속의 정사' 이후에 20년 만인 2013년 '야관문 욕망의 꽃'으로 스크린에 복귀해 최근까지 왕성한 활동을 했다. 미국에 그레고리 펙이 있고 프랑스에 알랭 들롱이 있다면 한국엔 신성일이 있다. 그의 수상경력은 1968년, 1990년 대종상영화제 남우주연상, 부일영화상 남우주연상, 백상예술대상 남자 최우수 연기상, 한국영화평론가 협회상, 청룡영화상 인기스타상, 대종상영화제 공로상, 부일영화상 공로상 등 수 많은 상을 받았다. 1971년 '연애 교실'로 영화감독에 입문했고, 1989년 성일시네마트를 설립해 제작사 운영을 했다. 1979년 한국영화 배우협회 회장, 1994년 한국영화제작업 협동조합 이사장, 2002년 한국영화배우협회 이사장 등을 맡았으며 대구대학교에서 방송 연예 학과 겸임교수를 하기도 했다. 2000년에 제16대 총선에서 한나라당 후보로 대구 동구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의정활동도 했다.



그는 한국영화의 별이요 역사다. 그를 꽃미남의 원조이며 청춘스타의 모델이라고도 한다. 그는 영화 인생을 영화처럼 살다가 별들의 본래 고향으로 떠났다. 그의 빈소를 찾아 조문한 후에 몇 마디 추모의 말로는 그를 다 평가할 수가 없다. ''내 남편은 대문 밖의 남자다''라 하고 ''인생은 연기로 왔다가 연기로 떠나간다''고 한 그의 동지인 아내가 남긴 말이 산중의 메아리 같은 여운으로 들린다.


=이동한 DM(dream making)리더십포럼이사장 전 세계일보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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