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차 이산가족 상봉행사에 참가하는 우리 측 방문단이 8월 21일 북측 가족들을 만났다. 남측 방문단은 20일 2박 3일 간의 방북 일정을 시작했다. 오전 8시 30분쯤 1차 상봉 행사에 참여하는 남측 이산가족 89명이 강원도 속초한화 리조트에서 버스를 타고 금강산으로 출발했다.
가족의 구성원이 본의 아니게 흩어짐으로써 서로 만날 수 없게 되는 원인으로는 지진·홍수 등 천재지변과 같은 자연적인 것도 있지만 오늘날 대부분이 국제적 무력충돌·내란 또는 그 밖의 사회적·정치적 불안정으로 인해 발생하고 있다.
근·현대 들어 우리나라 이산가족의 역사는 조선시대 말기에서 일제강점기까지 해외로 이주한 사람들에게서 시작되었다. 당시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중국이나 구소련, 일본으로 떠난 상당수의 이주자들이나 일제의 강제 징용·징병 정책 때문에 사할린이나 동남아 등지로 끌려간 사람들 가운데는 오랫동안 고향에 두고 온 가족들과 상봉이 어렵거나 연락조차 하지 못하던 경우가 적지 않았다. 상당수의 사람들은 1945년 8월 15일 광복과 더불어 귀환했지만 중국과 구소련에 남아 있던 수백 여만 명은 냉전체제에 가로 막혀 가족상봉이 봉쇄 되었다.
한반도내에서 남과 북으로 떨어져 살던 가족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1950년에 발생한 한국전쟁은 이 땅에 이산가족을 낳는 새로운 악조건이 되었다. 전쟁 중 많은 사람들이 강제로 납북되거나 자유를 찾아 월남하게 되면서 생이별을 하게 되었고 70년이 가까워지는 오늘까지 자유롭게 만나지 못하고 있다. 1990년대 중반 이후 북한의 경제난으로 인해 북한을 탈출한 이탈주민 역시 새로운 이산가족의 한 모습이다.
중국과 구소련 등에 남아 있다가 이산가족이 되어 버린 사람들은 냉전체제 붕괴 이후 자유로운 왕래가 가능해졌지만 남북분단으로 발생한 약 1,000만 명의 이산가족 상봉은 여전히 막혀있다. 지난 1985년에야 역사적인 첫 상봉이 성사된데 이어 지금까지 20차례의 만남이 이뤄졌으나 아직까지 정례화의 길을 트지 못하고 있다. 2000년 6·15 남북정상회담 공동선언에서 인도적 차원에서 이산가족 문제를 조속히 해결하기로 합의함에 따라 이산가족의 수시 상봉, 생사·주소 확인, 서신교환 허용 등을 논의하였으나, 북한은 여전히 미온적 자세를 보이면서 어떤 계기가 있을 때마다 상응하는 대가를 요구하거나 마치 선심을 쓰는 듯 이산가족방문단 교환을 허용하고 있을 뿐이다. 2014년 2월 20~25일까지 진행된 설날 계기 이산가족 상봉행사에서는 전시·전후 납북자 5명이 포함되면서 이에 대한 해결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르기도 하였다.
21세기 글로벌 시대에 대한민국의 여권만 가지면 전 세계 어느 나라이든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데 유독 북한만은 예외에 속한다는 현실은 서글프기 짝이 없다. 이산가족 1세대가 고령화되어 가고 있는 상황에서 고향을 방문하고 헤어진 가족들을 마음대로 만날 수 없다는 것은 정말 가슴 아픈 일이다.
이들의 아픔을 어떤 거래 대상으로 생각하는 북한 공산정권을 생각하면 더욱 화가 난다.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을 가리지 않는 것이 공산주의자들이다. 그들에게는 이산가족 상봉과 같은 인도적 문제 역시 한반도 적화통일이나 김정은 정권 유지라는 정치적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 것이다. 문재인 정부 출범 이래 북한 핵 문제 해결을 위한 두 차례의 남북정상회담이 진행되었고 9월에 3차 정상회담을 갖기로 합의하였다고 하는데, 북한과의 대화·협상에서 가장 유념해야할 요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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