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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라톤칼럼〉(9) 적폐청산과 직무유기, 직권남용, 국고손실
  • 기사등록 2018-08-16 10:05:45
  • 기사수정 2018-08-16 16:1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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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검찰엔 불문율이 하나 있었다고 한다. 공무원이 일하다 잘못을 해도 사리사욕 위해 돈 먹지 않았으면 형사처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공직자들에게 적용되는 형법조항은 직무의 대가로 부당한 이익을 얻는 뇌물수수죄나 국가나 공공단체의 운영자금을 불법으로 가로채어 가지는 공금횡령 죄가 대부분이었다는 얘기다. 직권남용·직무유기·국고손실과 같이 직무를 수행하다가 잘못한 죄로 처벌하는 경우가 드물었던 이유다. 그런데 과거엔 좀처럼 보지 못하던 이 형법조항들이 유독 이번 정부 들어서는 적폐청산이라는 이름하에 수시로 들려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직무유기죄는 ‘공무원이 정당한 이유 없이 그 직무수행을 거부하거나 직무를 유기함으로써 성립하는 죄’(형법 제122조)이다. 직권남용죄는 ‘공무원이 직권을 남용해 사람으로 하여금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하거나 권리행사를 방해함으로써 성립하는 죄'(형법 제123조)를 말한다. 법원은 대체로 직무유기를 ‘공무원이 고의로 직무를 이행하지 않거나 포기한 경우’로 엄격히 해석하고 있으며, 직권남용도 역시 ‘외압을 행사한 구체적인 정황과 물증’이 있어야 유죄를 인정하고 있다. 국고손실죄는 ‘국가나 지방자치단체의 회계사무집행자가 그 직무에 관하여 배임·횡령죄를 범한 경우 일반인보다 가중처벌’(특정범죄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제5조)을 받도록 한 규정이다. 이 역시 고의성이 명확하게 입증될 경우에 처벌할 수 있다.
지금 문재인 정부의 대표상품인 적폐청산이란 용어를 발명하고 무기로 활용한 정치인은 사실 박근혜 전 대통령이다. 그는 2014년 4월 세월호 사건이 나자 그 원인으로 '적폐'를 지목하고 '적폐 청산'을 국정목표의 하나로 내걸었다. 그런데 그를 탄핵하고 집권한 문재인정부가 적폐청산을 기치로 과거 정부에서 일했던 공무원들을 잡아들이는데 여념이 없으니 참 아이러니컬하다 그때 적극적으로 일했던 공무원은 직권남용으로 몰리고, 그게 두려워 발을 뺐던 사람들은 직무유기라는 덫에 걸렸다. 사실 감사원 감사를 받고 검찰에 불려가고 법정에 선 공무원들 대부분의 '겉 죄목(罪目)'은 여러 가지지만 '속 죄목'은 직권남용과 직무유기 둘 중 하나이다. 그나마 죄목이 불분명하면 국고손실죄를 적용하였다.
지금 무사한 공무원이라 해서 다음 정권에서도 무사하리란 보장이 없다. 4대강 사업 관련 공무원들은 세 정권을 거치면서 네 차례 감사원 감사를 받았다. 감사결과는 정권 따라 달라졌다. 현재 원전(原電) 정책을 만지는 공무원들이 다음 정권에선 같은 처지가 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심지어는 문재인 대통령이 원전정책 때문에 직권남용죄로 처벌 받을지 모른다는 얘기도 나온다.
검찰이 직무유기와 직권남용이라는 형법조항을 처음 적용한 것은 1997년 외환위기 직후였다. 검찰은 강경식 경제부총리와 김인호 청와대 경제수석을 이 두 가지 혐의로 구속하였다. 외환위기 심각성을 대통령에게 제대로 보고하지 않았다는 이유이다. 당시에도 무리한 법 적용이란 지적이 나왔지만 검찰은 "누군가는 책임져야 한다"는 새 정권의 기류와 여론에 올라탔다. 결과는 1·2·3심 모두 무죄였다. 이는 사실상 정책 판단의 잘못은 형사처벌 대상이 아니라는 판결이었다. 그런 잘못된 전철을 이번 정부에서는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고 있다. 전직 대통령부터 장차관, 청와대 수석·비서관, 일반 공무원에 이르기까지 무차별적으로 이 혐의를 적용했다.
공무원의 신분과 정치적 중립성은 헌법(제 7조)으로 보장받고 있다. 그런데 정권이 바뀔 때마다 과거 정권에서 ‘부역’한 사람들을 가려내어 인사 상 불이익을 주고 형사처벌까지 받게 한다면 어떤 공무원이 소신을 갖고 일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상급자의 지시에 대한 복종은 공무원의 중요한 의무 중 하나이다. 일을 하다보면 접시를 깰 수도 있다. 정치권에 줄을 대거나 개인의 영달을 위해 한 행위가 아니라면 정책적 판단이나 지시이행 과정에서 생긴 잘못을 처벌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공직사회는 ‘복지부동’을 넘어 ‘배를 깔고 엎드려서 눈동자만 굴린다’는 ‘복지안동’의 분위기로 갈 수밖에 없다. 그로 인한 피해는 온전히 국민들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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