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느냐 사느냐' 라는 말은 영국의 세계적 문호 세익스피어의 명작 '햄릿' 3장1막에 나오는 햄릿의 독백이다.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어느 게 더 고귀한가. 난폭한 운명의 돌팔매인가. 화살을 맞는 건가. 아니면 무기 들고 고난의 바다에 대항하여 싸우다가 끝장을 내는 건가. 죽는 것은 자는 것 뿐일지니, 잠 한 번에 육신이 물려받은 가슴앓이와 수천 가지 타고난 갈등이 끝난다 말하면 그건 간절히 바라야 할 결말이다.”
세익스피어 4대 비극 중의 하나인 '햄릿'은 수 많은 외국어로 번역되고 연극이 되고 영화화 되었다.
줄거리는 덴마크의 왕자 햄릿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 아버지의 유령이 나타나 자신을 죽인 사람이 왕의 동생이자 왕자의 작은 아버지 클로디우스라고 알려준다. 클로디우스는 형을 죽이고 왕이 되었으며 햄릿의 어머니 커트루드와 결혼을 했다. 햄릿은 미친 사람인척 하면서 복수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아버지를 죽이는 장면을 연극으로 만들어 사람들이 보게 했다. 클로디우스는 자신의 죄가 들어날 것을 염려해 햄릿을 죽이기 위해 술잔에 독을 탓다. 그러나 햄릿의 어머니가 이 잔을 마시고 죽는다. 햄릿은 클로디어스를 죽이고 자신도 검투장에서 독이 발린 칼을 맞고 죽으면서 비극의 막이 내린다.
햄릿은 죽을 때까지 삼촌에 대한 분노와 어머니에 대한 원망으로 죽어야 하느냐 살아야 하느냐의 갈등을 품고 살았다. 그런데 세익스피어가 단순히 '사느냐 죽느냐' 를 놓고 고민하는 햄릿의 독백을 표현했다면 'to live or to die'라고 하면 된다. be 동사로 표현한 데는 더 깊은 의미가 있다. 지금까지 수많은 문학자들이 이 독백의 의미를 논쟁하며 해석해 왔다. be동사는 '있다'는 존재를 뜻하는 동사다. 햄릿의 심각한 고민은 근본적인 자기 존재에 대한 것이었다. '죽느냐 사느냐' 보다 '있을 것인가 없어질 것인가' 가 더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왕자와 조카, 아들로 있을 것인지 버릴 것인지를 고민했다. 삼촌에 대한 복수를 할 것인지 포기할 것인지, 불의와 싸우다 죽을 것인지 양심의 고통을 안고 살 것인지를 놓고 괴로워했다. 비록 '죽느냐 사느냐' 로 번역했다 하더라도 담겨있는 깊은 의미를 읽어야 한다. 햄릿의 독백을 이럴까 저럴까 결단을 못하고 우유부단한 태도를 취하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햄릿의 독백은 자기 존재의 긍정과 부정에 대한 처절한 고뇌였다. '죽느냐 사느냐'는 오늘 내가 목숨을 버릴 것인가, 말 것인가의 선택이었다.
목숨을 버리고 순교자가 될 것인지 목숨을 부지하고 배신자가 될 것인지의 선택이다. 싸우다가 죽으면 육신은 죽지만 영혼은 살고 비굴하게 살면 육신은 살지만 영혼은 죽는다. 육신의 삶은 유한하지만 영혼의 삶은 영원하다. 그래서 의인들은 후자를 선택한다.
윤석열 대통령이 죽느냐 사느냐의 기로에 처해있다. 정치적인 생사의 운명을 어떻게 넘어갈 것인가. '투비 오어 낫 투비 이것이 문제로다' 는 햄릿의 처절한 독백을 해야 한다.
대통령이 비상 계엄을 선포했을 때 이 길이 옳고 이 길 밖에 없었다면 실정법이 그를 탄핵한다하더라도 역사적 법이 그를 다시 복권시킨다.
나의 주장과 행위가 정의라면 최선을 다해 국민과 법관을 설득해야 한다. 만약 재판관과 국민이 진영 논리에 잡혀있다면 예수와 소크라테스처럼 십자가에 못 박히고 독배를 마시고 죽는 길밖에 없다.
그러나 아무런 죄가 없이 죽는다면 정치적으로는 죽었지만 역사적으로는 다시 살아난다. 당하는 자는 양육취골, 육참골단의 처절한 결기를 지녀야 한다. 나의 신념이 진리인가 아닌가. 정의인가 아닌가가 중요할 뿐이다. 진리는 거부당할수록 빛이 나고, 정의는 피를 흘릴수록 견고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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