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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 대통령 이름과 1993년9월1일이 새겨진 무궁화동산 표지석.  왕현철 



2022년 5월, 청와대가 개방된 뒤 청와대 오른쪽에 있는 칠궁과 무궁화동산에 대해서도 관심이 높아졌다. 


칠궁은 조선에서 왕을 낳은 생모이지만 왕비가 되지 못한 후궁 7명의 신위를 모신 곳이다. 

무궁화동산은 현대사의 의미가 있는 곳이지만 그냥 무궁화가 많이 심어져 있는 동산으로 지나쳐 버리기가 쉽다. 


무궁화동산의 역사성에 대해서 아무런 설명이 없기 때문이다. 무궁화동산에 숨어있는 역사와 그 속에 담겨진 비밀의 코드를 풀어보자. 


1979년 10월 26일 저녁 7시 40분 즈음, 청와대 인근서 울려 퍼진 총소리는 역사의 흐름을 바꿨다. 

18년 간 대한민국을 통치한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쏜 총탄에 서거했다. 10·26의 비극이 터진 곳은 궁정동 안가였다.


 

 그날로부터 14년 후 김영삼 대통령이 취임해서 ‘문민정부’를 내세우고 대대적인 개혁조치를 취한다. 그 첫 번째가 ‘안가(安家)’를 철거하는 것이었다. 


안가는 안전가옥의 준 말로 대통령의 비공식적인 모임 장소를 말한다. 청와대 바로 곁에 있었고 행정구역은 궁정동이었다. 통상 ‘궁정동 안가’로 불렀고 박 대통령이 서거한 곳이다. 


그 장소는 청와대의 오른쪽, 이름은 무궁화동산으로 바뀌었다. 이름은 김영삼 대통령이 지었고, 무궁화동산을 조성한 사람은 반도환경개발(주) 대표이던 이승율· 박재숙 부부였다.


무궁화동산을 조성한 이승율 이사장이 박정희 대통령 서거 장소를 가르키고 있다.  

 

 

궁정동 안가는 5채(본관, 구관, 가동, 나동, 다동)가 있었다. 다 철거되었는데 박 대통령의 서거 장소는 ‘나동’이다. 


반도환경개발(주)은 궁정동 안가에 동산을 조성하는 사업체로 선정되었다. 청와대 공사의 실적이 있는 업체의 지정 입찰이었고 턴키방식이었다. 동산의 설계, 시공, 마무리를 모두 할 수 있기 때문에 자신의 구상을 담을 수 있었다. 

 

 이승율 이사장(현 동북아공동체문화재단)은 조경을 전공한 부인과 더불어 어떤 개념으로 동산을 조성할 것인가를 숙고하면서 공사를 진행했다. 


동산의 전체 모습은 인왕산의 경관을 빌려오는 차경유도의 형식을 취해 성터를 조성하고, 나무와 꽃을 심고, 산책길을 마련해서 한 바퀴 돌 수 있도록 했으며, 의자를 두어서 휴식을 취할 수 있게 했다.  


 오래된 회화나무(1968년 보호수로 지정, 지정일 기준 430년)는 그대로 살렸다. 여기까지는 일반적인 동산의 모습이다. 



기단석과 태극무늬 오석.


이승율 이사장은 여기에 더해 박 대통령이 서거한 장소의 의미와 역사성을 부여하고자 했다. 우선 동산의 장소가 궁정동(宮井洞)임을 표현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노력을 했다. 

 

 동산의 한복판에 상당한 크기의 원석을 깎아 가로 세로 4m의 통돌로 우물 정(井)자 기단석을 만들었다. 궁정동의 ‘정(井)’자를 나타낸 것이다. 


그 위에 포천에서 가져 온 오석에 태극무늬를 넣어서 대한민국을 상징했고, 지하에 물탱크를 설치해서 태극무늬로 물이 나와서 아래로 흐르고 다시 올라오는 순환의 과정을 거치도록 했다. 


그 주변에 8그루의 나무를 심어서 우리나라의 팔도를 상징했다. (나무는 한 그루가 죽어서 7그루다)


 우물정자의 통돌, 순환과정의 물, 8그루의 나무를 통해서 사통팔달, 대한민국의 기운이 뻗어나가서 국운이 번창하기를 염원한 것이다. 

 

현재 이곳은 물이 흐르지 않는다. 물이 흐르는 공간은 메꾸어졌다.  동산 조성이후 종로구청이 관리하기 때문에 그 이유는 알 수 없다. 


궁정동 우물의 물이 흘러 대한민국의 기운이 번창하기를 염원한 공원 조성자의 의도가 퇴색한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 서거 장소. 새부리 모양의 돌을 얹고 그 아래 묘실을 만들었다. 


이승율 이사장이 가장 고민한 것은 박 대통령의 서거 장소를 어떻게 알릴 것인가였다.  그 장소에 표지석을 세우고 역사적 장소임을 알리고 싶었다. 


청와대는 경호실을 통해 어떤 표식도 허락하지 않는다고 통보했다. 이승율 이사장은 나름의 비밀 코드를 만들어야 했다. 


 박 대통령의 서거 장소는 공원의 뒤쪽에 꾸몄다. 인왕산의 흐름을 이어받아 낙락장송의 소나무를 두르고 성터를 만들었다. 

성터의 돌도 신경을 썼다. 박대통령과 인연이 있는 경주 보문단지에서 가져왔다. 무심한 듯 쌓인 돌로 보이지만 숨은 뜻이 있고 정성이 담겨 있다. 


그는 성터를 이어지다가 툭 끊어지게 하고, 그 사이에 빈 공간을 두고 다시 성터가 이어지도록 만들었다. 

박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서거로 역사는 단절된 듯 보이지만 그럼에도 역사의 흐름이 이어지는 것을 표현 한 것이다. 


그 끊어진 공간에 새부리 모양의 돌을 얹어서 날아가는 영혼을 상징하고, 그 돌 아래는 묘실을 만들었다. 박 대통령이 누워 있는 공간으로 삼은 것이다. 


실제의 묘실을 만들 수 없었기 때문에 박 대통령의 영혼을 마음으로 담는 묘실인 셈이다. 



술잔을 올릴 수 있도록 설치한 상석.  



묘실 앞에는 상석(평평한 돌)을 두어서 꽃다발이나 술잔을 올릴 수 있도록 했고, 상석 앞부분에는 잔디밭을 조성해 참배객이 추모할 수 있도록 했다. 


10·26의 갑작스러운 비극으로 역사의 단절과 연속성, 박 대통령이 잠든 영혼과 추모의 공간을 고심해서 조성한 것이다. 

박 대통령의 서거 장소라는 어떤 표식도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승율 이사장만이 알 수 있는 비밀코드였다. 


박 대통령은 흉탄에 쓰러졌지만 그 비극은 지울 수 없는 역사이기 때문에 최소한의 흔적을 남기고 싶었던 것이다. 


이 공간도 세월이 흐르면서 약간 변형이 되었다. 


묘실 앞에는 제법 큰 주목나무가 심어져 있다. 안을 볼 수 없게 된 것이다. 아무리 좋은 것도 제자리에 있어야 빛을 발하는 법이다. 주목나무는 묘실의 가림막이 돼버렸다.



묘실로 조성된 곳을 주목나무가 막고 있다. 왼쪽은 상석.  


 

 추모 공간으로 조성한 잔디밭에는 김상헌 집터 표지석과 시비가 세워져 있다.  마치 무궁화동산의 주인처럼 커다랗게 우뚝 세워져 있다. 


김상헌 집터의 표시도 원래 이 장소로부터 약 70미터 뒤에 있었으나 어느 사이 무궁화동산으로 옮겨왔다고 현지 주민 장지환(1957년생)씨는 증언했다. 이 장소로 옮겨온 이유는 알 수 없다.


무궁화동산의 역사성은 ‘궁정동 안가’와 직결된다. 

이 공간에서 일어난 10·26의 비극적 사건과 인물을 통해서 우리는 현대사의 명과 암을 이야기할 수 있다. 


궁정동안가가 무궁화동산의 주인이 되어야 하는 이유이다. 


박 대통령의 서거 장소를 흔적도 없이 없앤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박 대통령의 시해가 인구에 회자되는 것을 꺼리는 분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역사는 감추고 싶어도 기록과 증언으로 이어진다. 그 때문에 역사의 기록과 보존은 있는 그대로일 때 가장 생생하다. 


조선왕조실록과 경복궁이 있어서 조선의 역사를 눈과 귀로 확인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박정희 대통령의 서거 장소는 흔적도 남기지 않으면서 병자호란 때 척화파 김상헌의 집터 표지석은 큼지막하게 설치돼 있다. 



 

 청와대의 오른 쪽에 있었던 5채의 궁정동 안가 중에 역사의 현장인 박 대통령이 서거한 ‘나동’이라도 복원해야 할 것이다. 


 생생한 비극적 현장을 통해 박 대통령과 김재규의 공과 과를 이야기 하면서 역사의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 

또한 역사의 현장을 숨기지 않고 미래의 유산으로 전하는 것은 오늘을 사는 우리들의 책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또한 청와대를 관람하면서 무궁화동산에 들러 역사의 현장인 궁정동 안가를 찾아보는 수고로움도 마다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KBS PD 출신 필자 왕현철은 '왕PD의 토크멘토리 조선왕조 실록' 1,2편을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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