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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현철의 조선이야기 (1) 태조 즉위와 조선의 탄생 - <조선왕조실록>을 통해서 알게 된 조선 - 왕현철 우리궁궐지킴이/전 KBS PD (wa…
  • 기사등록 2020-02-15 21:36:08
  • 기사수정 2020-02-21 23:2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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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왕현철의 궁궐이야기>를 사랑해 주신 독자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앞으로는 <왕현철의 조선이야기>로 그 범위를 넓히고자 합니다. 계속 관심을 기울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조선의 건국은 1392년 7월 17일이다. 오늘날 제헌절은 이 날을 따왔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도 이 때부터 시작된다. 


조선왕조실록 첫 문장은 “태조가 수창궁(壽昌宮)에서 왕위에 올랐다”이다. 수창궁은 고려왕조 개성에 있는 왕의 정전이다. 제 3대 태종도 수창궁에서 즉위한다.


 그 날의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배극렴, 조준, 정도전 등 대소신하 50여 명과 한량기로(閑良耆老, 70세가 넘어서 퇴직한 2품 이상의 벼슬아치) 들은 하루 전 16일 국새를 받들고 태조의 저택으로 찾아간다. 

사람들이 골목을 빼곡히 메우고 있었다. 태조는 두 번째 부인 신덕왕후 강 씨와 물에 만 밥을 먹고 있었다. 태조의 첫 번째 부인 신의왕후 한 씨는 태조가 왕위에 오르는 것을 보지 못한 채 1년 전 돌아가셨다. 


 이 날 친척의 여러 부인들도 태조와 강 씨에게 문안인사를 드리려 와 있었는데 사람들이 집 주변에서 웅성거리니까 이들은 놀라서 달아나 버렸다. 


태조는 문을 걸어 잠그고 신하들을 집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한다. 밖에서 기다리던 배극렴 등 신하들은 해 질 무렵 대문을 밀치고 마당으로 들어가서 국새를 마루 위에 놓았다. 태조는 그 국새를 보고 두려움에 떨어서 행동거지를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보다 앞서 시중 배극렴 등은 공민왕의 부인 왕대비에게 “현재의 왕(공양왕)이 도리를 잃고 백성의 민심도 떠나갔음으로 사직과 백성을 다스릴 수 없으니 왕을 폐하소서”라고 아뢰었고 왕대비는 신하들의 건의를 받아들여서 공양왕을 폐한다. 


 남은과 문하평리 정희계가 왕대비의 교지를 받들어서 공양왕이 머물고 있는 궁으로 가서 교지를 선포한다. 공양왕은 “내가 원래 임금이 되고 싶지 않았다. 여러 신하들이 강제로 나를 왕으로 세웠다. 내가 성품이 어리석어서 조정이 돌아가는 형편을 잘 몰랐다. 어찌 신하의 심정을 거슬린 일이 없었겠는가”라고 소회를 밝히고 두서너 줄기 눈물을 흘렸다. 


고려의 마지막 왕 공양왕은 왕위를 물려주고 원주로 내려간다. 왕의 자리가 빈 것이다. 태조가 왕위에 오르기 5일 전이었다. 

 

왕대비는 국새를 받아서 보관하고 그 다음 날 교지를 선포해서 태조로 하여금 국사를 감록(監錄)하게 한다. 감록은 국정을 실질적으로 주관하는 것이다. 태조는 즉위 4일 전 사실상 국정을 손아귀에 넣었다. 


 태조의 사저 마루 위에 놓여있는 국새는 왕대비가 공양왕으로부터 받아서 보관했던 것이다. 신하들은 이 국새를 왕대비로부터 다시 받아서 태조의 사저로 가지고 갔다. 국새는 고려 국새였다. 


 태조는 이천우의 부축을 받아서 겨우 침실문 밖으로 나왔다. 이천우는 어릴 때부터 활쏘기와 말타기에 능했고 태조와 같이 전쟁터를 누벼서 공을 많이 세운 개국공신이기도 하다.

 밖에서 기다리던 신하들이 줄줄이 늘어서서 태조에게 절을 올리고 북을 치면서 만세를 불렸다. 모두가 왕위에 오르기를 권고하였다.  


“나라에 임금이 있는 것은 위로는 사직을 받들고 아래로는 백성을 편안하게 할 뿐입니다. 고려는 건국 이래 500년이 되어서 그 운이 다했습니다. 공양왕은 스스로 사직과 백성의 주재자가 될 수 없음을 알고 사저로 물러갔습니다. 다만 군정과 국정의 사무는 지극히 번거롭고 중대함으로 하루라도 자리를 비울 수는 없습니다. 마땅히 왕위에 올라서 신과 백성의 기대에 부응하소서.” 


태조 어진(전주 경기전 국보317호)



 태조는 왕위에 오르는 요청을 여러 번 거절하지만 이윽고 입을 뗀다.

     “예로부터 제왕이 일어나는 것은 천명(天命)이 있어야 한다. 

     나는 실로 덕(德)이 없는 사람인데 어찌 감히 이를 감당하겠는가.” 



 태조는 천명을 내세워서 자신이 왕위를 빼앗지 않았음을 강조하고 덕이 없다는 겸손의 표현으로 왕위에 오를 수 없다고 짐짓 거절한다. 누가 이것을 태조의 진심이라고 믿고 물러나겠는가? 대소 신하와 한량기로들이 다시 간절하게 왕위에 오를 것을 권고하니 태조는 마지못한 듯 수창궁으로 가겠다고 한다. 왕위에 오르겠다는 승낙의 표시다.

 


다음 날 7월 17일 모든 신하들은 수창궁으로 먼저 가서 태조를 영접했다. 태조는 말에서 내려 걸어서 수창궁 안으로 들어갔다. 태조는 임금의 자리 어좌에 앉지 않았다. 태조는 그 옆 마루에 선채로 신하들로부터 즉위의 축하 인사를 받았다.


 태조는 육조의 판서 이상 관원은 전각의 월대 위로 오르게 하고 취임사를 한다.

“내가 (고려의)수상(首相)이 되어서도 오히려 두려운 마음으로 소임을 다하지 못할까 두려워했다. 어찌 오늘 이 자리에 오를 것이라고 생각을 했겠는가? 내가 만약 몸이 건강하다면 필마를 타고도 적의 칼날을 피할 수 있지만 지금은 병에 걸려 손과 발을 제대로 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경들은 모두 마땅히 각자의 마음과 힘을 합쳐서 덕이 부족한 이 사람을 보좌하라.”


 태조가 왕위에 오르는 즉위식이 이루어진 것이다. 신하들의 하례 인사와 태조의 즉위 연설뿐이었다. 창건 국가로서 새로운 국호를 선포하거나 그 즉위식의 분위기를 끌어 올릴 풍악이나 춤, 축하사절은 없었다. 즉위식은 소박했다. 



 태조는 사실상 무력으로 조선을 세웠지만 그가 내세운 것은 천명과 덕이었다. 하늘의 부름 천명으로 건국의 명분을 명확히 했고 자신의 덕이 부족하다는 낮은 자세로 임했다. 태조는 고려의 수상이 되거나 국새를 받을 때도 두려운 마음이었다고 했다. 이 모든 것이 태조의 심정을 대변한다.  


 이로부터 열흘 후 7월 28일 태조는 즉위교서를 발표한다. 태조는 즉위교서에서 “나라 이름은 그전대로 고려라고 하고, 의장(儀章)과 법제(法制)는 한결같이 고려의 고사(故事)에 의거한다”라고 밝혔다. 태조는 고려 국새를 받아서 고려 왕으로 즉위를 한 것이다.


 조선이라는 나라의 이름이 정해진 것은 이로부터 약 7개월 후다. 

 태조는 즉위 며칠 후 밀직사 조임을 명나라에 파견해서 공양왕을 대신해서 자신이 군국의 사무를 통솔하게 된 배경을 설명하고 황제의 재가를 바라는 표문을 올렸다. 이 때 태조가 사용한 직명은 ‘권지고려국사(權知高麗國事)’였다. 태조는 황제의 재가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왕’대신 ‘국사’의 직책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조임은 3개월 후 명나라 황제의 외교문서를 받아와서 보고했다. “고려는 산이 경계를 이루고 바다가 가로막아 하늘이 동이(東夷)를 만들었으므로 우리 중국이 통치할 바는 아니다. 나라의 국호를 어떻게 바꿀 것인가를 빨리 와서 보고하라.” 


명 황제는 고려는 자신이 통치할 범위가 아니라고 선을 긋고 국호를 정해서 보고하라고 한 것이다.

 

태조는 국호를 정해야 했다. 태조는 명나라에 보낼 외교 적임자를 고민하고 있었다. 예문관 학사 한상질이 자청해서 가겠다고 나섰다. 태조는 기쁘게 받아들인다. 한상질은 세조의 꾀주머니로 잘 알려진 한명회의 할아버지다.


 한상질은 신하들이 모여서 논의한 ‘조선’과 ‘화령’의 두 가지 국호를 가지고 갔다. 조선은 단군조선·기자조선에서 따 왔을 것이고 화령은 이성계의 고향 함경도 영흥의 옛 이름이다.

 

황제는 조칙을 내려 보낸다. “동이(東夷)의 국호에 다만 조선의 칭호가 전래된 것이 오래 되었고 아름답다. 이 이름(조선)을 근본으로 해서 하늘을 본받고 백성을 다스려서 후사(後嗣)를 영구히 번성하게 하라.” 


후사는 대를 잇는 자식으로서 세자를 지칭하기도 한다. 명의 황제는 ‘조선’과 ‘화령’ 중에서 동이의 역사가 오래된 ‘조선’을 택한 것이다.

 ‘조선’의 이름은 이렇게 탄생했다. 

태조는 바로 나라 이름을 고려에서 조선으로 바꾸어 선포한다. 1393년 2월 15일이었다.  

 

태조는 나라 이름을 조선으로 보고 받기 이틀 전 1393년 2월 13일 새 도읍지로 계룡산을 결정했다. 

태조가 즉위한 약 7개월 후 새 도읍지로 계룡산이 정해지고 나라 이름이 조선으로 선포된 것이다. 태조는 국호가 정해진 기쁨으로 전국에 사면령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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