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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현철의 조선이야기(2)도읍을 정하라 - <조선왕조실록>을 통해서 알게 된 조선-왕현철 우리궁궐지킴이/전 KBS PD (wang…
  • 기사등록 2020-02-22 22:36:04
  • 기사수정 2020-02-25 09:5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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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이성계는 고려 국새를 받아 고려 국왕으로 즉위했다. 태조는 즉위교서를 통해서도 국가의 기본 방침을 고려의 의장(儀章)과 법제(法制), 고사(故事)에 의거한다고 발표했다.


 왕 씨에서 이 씨로 왕조가 바뀌었음에도 급격한 변화를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태조가 고려로부터 물려받고 싶지 않은 것이 있었다. 

‘땅’이었다. 고려의 서울, 개성을 벗어나고자 했다.  

 

태조는 즉위 한 달 후 국정의 최고 정무기관 도평의사사에 한양으로 도읍을 옮기도록 지시를 내린다. 태조는 고려 말부터 개성의 지덕이 쇠해서 한양으로 도읍을 옮기자는 서운관의 보고를 여러 차례 받았다.


 서운관은 천문·역일(曆日)을 담당하는 부서이다. 태조는 삼사우복야 이염에게도 지시를 내려 한양의 궁궐을 수리하게 한다. 

 

고려는 개성 외에 세 곳의 서울을 더 두었다. 동경(경주), 서경(평양), 남경(한양)이다. 남경 즉 한양에는 고려 행궁이 있었다. 행궁은 왕이 임시로 머무는 궁궐을 말한다. 고려 제 15대 숙종이 한양에 궁궐을 지었고 그 후 인종, 의종, 충렬왕, 공민왕, 공양왕 등이 순행해서 머물기도 했다.


 태조가 이염에게 수리하게 한 한양의 궁궐은 고려의 행궁이었다. 그 행궁은 현재 청와대 터에 있었다.

  

태조가 도평의사사에 지시를 내린 20여 일 후 오늘날 국무총리에 해당하는 시중 배극렴, 조준 등은 태조에게 한양 천도를 보류하고자 건의한다.

“한양에는 아직 궁궐, 성곽 등이 이룩되지 못해서 신하들은 민가를 빼앗아 들어가야 한다. 궁궐과 성곽, 그리고 관사를 배치한 후에 옮기도록 하자”라는 것이다. 


태조는 이 건의를 받아들인다. 태조의 한양 천도에 대한 첫 구상은 실현되지 않았다. 

태조는 다시 도읍지 후보를 물색하게 했다. 그 윤곽은 즉위 2년 차 새해에 드러났다.


태조는 즉위 4개월 후 1392년 11월 정당문학 겸 태실증고사 권중화를 양광도(충청도), 경상도, 전라도에 보내서 왕자들의 태를 묻는 곳을 살펴보게 한다. 권중화는 전라도 진동현(현 충남 금산군)에 태실 후보지를 찾아서 보고했다. 이와 더불어서 권중화는 도읍지 후보를 지도로 그려서 바쳤다. 그 후보는 양광도 계룡산이었다. 태조 즉위 2년차 1393년 1월 2일이었다. 


계룡산 (충남 공주시) . 태조 이성계는 즉위 2년차(1393년) 조선의 도읍지로 계룡산을 정하고 행정구역도 개편한다. 


태조는 새 도읍지 계룡산의 지세를 살피고자 개성을 출발한다. 영삼사사 안종원, 우시중 김사형, 판중추원사 남은 등도 동행했다. 태조는 내려오는 도중 회암사를 지나면서 왕사 무학대사도 같이 가자고 청했다. 회암사는 경기도 양주에 있었다. 


태조는 출발 후 4일 만에 한강에 도착했으나 몸이 아파 며칠 동안 한강에서 머무르기도 했다. 태조가 다시 출발하려고 하자 도평의사사에서 좋지 않은 보고가 올라왔다. “왕비가 병으로 몸이 편치 않고, 지역에 도적 떼가 들끓고 있다”는 것이다. 태조는 “재상들은 오랫동안 개성에 살아서 도읍을 옮기고 싶지 않을 것이다. 이런 구실은 천도를 중지시키려는 것이다”라고 역정을 냈다. 남은이 “공신으로 은혜를 입었는데 개성의 토지와 집이 어찌 아까울 것이 있겠습니까. 계룡산에 다 왔으니 도읍을 건설할 땅을 보시옵소서”라고 왕의 마음을 달랬다.


태조는 “예로부터 왕조가 바뀌고 천명을 받는 군주는 반드시 도읍을 옮기게 마련이다. 그래서 내가 직접 도읍지를 결정하고자 한다. 만일 후대의 왕이 나의 뜻을 계승해서 도읍지를 정하려고 해도 신하들이 반대하면 옮길 수 있겠는가”라고 자신이 천도를 하는 이유를 다시 강조했다.


태조는 개성을 떠난 20여 일 후 계룡산에 도착했다. 서운관 책임자 권중화는 계룡산의 종묘, 사직, 궁궐, 시장터의 도면을 그려서 태조에게 바쳤다. 태조는 계룡산의 산수와 형세를 돌아보면서 조운(뱃길), 도로, 성곽 터를 신하들에게 살피게 했다. 또한 풍수학자 이양달 등에게 땅의 형세를 살펴보게 하고 판내시부사 김사행에게는 먹줄로 땅을 측량하게 하였다.

 태조는 조선의 도읍지로 계룡산을 결정하기 위한 매우 구체적인 조치를 취한 것이다. 


태조는 새 도읍지의 높은 언덕에 올라가서 지세를 살펴보고 무학대사의 자문을 구한다. 무학대사는 “능히 알 수 없습니다”라고 대답을 했다. 무학대사는 계룡산 도읍지가 적당하지 않다고 판단한 것 같다. 무학대사가 ‘알 수 없습니다’라고 답을 한 것은 부정의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럼에도 태조는 계룡산을 도읍지로 결정한다. 태조 즉위 2년 차(1393년) 2월 13일이다. 태조는 예문춘추관 대학사 김주 등 일부의 신하들을 계룡산에 남겨서 도읍지 건설을 감독하게 하고 개성으로 돌아간다.

태조는 2개월 후 계룡산을 중심으로 한 81개의 주현(州縣),부곡(部曲),향소(鄕所)의 행정구역을 개편한다. 계룡산은 제도적으로도 조선의 도읍지로 확정된 것이다. 도읍지 공사도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계룡산 도읍지는 10개월 후 운명이 바뀐다. 그 운명을 바꾼 사람은 경기 좌·우도 관찰사 하윤이었다. 하윤은 태조가 계룡산을 답사할 때 동행하지 않았다. 그는 부친의 묏자리를 물색하기 위해서 풍수학을 공부하면서 계룡산의 단점을 들추어냈다.  


하윤은 도읍은 나라의 중앙에 있어야 하는데 계룡산은 지대가 남쪽에 치우쳐서 동, 서, 북쪽과 서로 멀리 떨어져 있고, 산은 건방위(10시30분의 15도 범위)에서 오고 물은 손방위(4시30분의 15도 범위)에서 흘러간다고 하니 이것은 송나라 음양지리학자 호순신이 주장하는 ‘물이 오랜 생명을 다해서 쇠하고 패망이 곧 닥치는 땅’이므로 도읍이 적당치 않다고 상소를 올렸다.

 

태조는 하윤 주장을 검증해야 했다.   태조는 계룡산을 도읍 후보지로 물색했던 권중화, 판삼사사 정도전, 판중추원사 남재 그리고 하윤으로 하여금 검증단을 꾸렸다. 검증단은 고려왕조 여러 능의 길흉을 조사했다. 그 결과 하윤의 주장과 일치했다. 태조는 대장군 심효생을 계룡산으로 보내서 새 도읍의 역사를 중지시킨다.


도읍을 옮기기 싫어했던 중앙과 지방의 관리들은 모두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태조의 두 번째 도읍지 계룡산도 이렇게 좌절된 것이다. 


 태조는 포기하지 않았다. 태조 3년 천도에 대한 3번 째 불을 지펴나간다. 태조는 서운관의 모든 비록문서를 하윤에게 주어서 천도의 땅을 다시 고르게 했다. 권중화, 정도전 등 핵심관료 11명에게 여러 현인들의 <비록(祕錄)>을 참고해서 요점을 바치게 한다. 또한 태조 자신도 신하들과 <비록촬요>를 공부한다. 비록촬요는 지리에 관련된 책이다. 


태조는 조준, 권중화, 하윤 등 11명과 서운관 관리 등을 무악(서울 서대문구)으로 보내 <비록촬요>의 내용과 부합하는지 지세를 살펴보게 한다.   일주일 후 이들은 현장을 돌아보고 와서 보고를 했다. 


하윤은 “무악은 명당”이라고 찬성을 한다. 그러나 조준, 권중화 등 대부분은 “무악 남쪽은 땅이 좁아서 도읍으로 불가하다”라고 반대를 했다. 현장을 다녀 온 신하들의 의견이 나누어진 것이다. 


태조는 본인이 직접 현장을 보고 결정하고자 했다. 태조는 무악으로 출발한다. 태조는 무악을 둘러보고서 도읍지로 어느 정도 마음을 기울였다. 그러나 서운관 책임자 윤신달과 유한우가 “지리의 법으로 보면 무악은 도읍이 될 수 없습니다.라고 반대를 했다.


태조 : 여기가 좋지 못하면 어디가 좋으냐?

유한우 : 신은 알지 못하겠습니다.  

태조 : 네가 서운관인데 모른다고 하니 누구를 속이려는 것인가? 개성의 지기가 쇠하였다는 말을 너는 듣지 못하였느냐?

유한우 : 개성의 지기가 쇠하였다고 한 것은 도참사상입니다. 저는 지리만 배워서 도참은 모릅니다.

태조 : 도참도 지리에 근거한 것이 아니냐? 

 

태조는 화가 단단히 났다. 태조는 좌시중 조준과 우시중 김사형을 불렀다. 태조는 “고려 말 서운관에서 개성의 지덕이 쇠하고 한양과 계룡산이 좋다고 해서 도읍을 옮기고자 백성을 동원해서 공사까지 했다. 또 무악이 좋다고 해서 여기에 왔는데 서운관에서 반대를 한다. 그들을 징계해야겠다. 경들은 서운관으로 하여금 도읍이 될 만한 곳을 다시 추천하게 하라”라고 지시를 내린다.  

서운관은 외부인사로 서운관 책임을 겸임하고 있는 최융과 함께 문서로 의견을 올렸다. “우리나라에서 첫 번째 명당은 부소이고 그 다음은 남경입니다.” 부소는 개성에 있다. 개성에 있는 부소가 으뜸이고 고려의 궁궐이 있는 남경 (현재의 청와대 터)이 그 다음이라는 것이다. 

 서운관은 그 내부조차도 “개성의 지덕이 쇠하였다”와 “아직 개성의 지덕이 남았다”라고 의견이 나누어져 있었던 것이다. 태조는 무악에서 하룻밤을 보낸다. 태조는 도읍지를 결정하기 위한 여러 가지 난관을 뚫어야 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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