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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현철의 궁궐이야기(52) 창덕궁 희정당③ 왕의 부름에 응하지 않다 -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알게 된 궁궐 - 왕현철 우리궁궐지킴이, 전 KBS PD wangk…
  • 기사등록 2020-02-08 21:13:40
  • 기사수정 2020-02-10 14:2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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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 상태로 간다면 앞으로 나라꼴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대사헌 송준길이 조선의 제 18대 현종에게 대사헌 직을 사직하면서 올린 상소 내용의 일부다. 송준길은 송시열과 더불어 제 17대 효종의 신임이 두터운 대신이었다. 효종의 뒤를 이은 현종도 송준길을 각별히 여기고 곁에 두고자 하였다. 그러나 송준길은 병을 핑계로 자주 낙향을 해서 현종을 떠나 있었다.  


 현종은 나라의 재해 등 위기를 타파하기 위해서 송준길에게 교지를 내려서 궁궐로 들어오게 했으나 송준길은 오히려 궁궐로 사직서를 보내면서 상소를 올린 것이다.


송준길의 상소를 계속 보자.

“전하는 부왕(효종)에 비해서 경연에 소홀하니 조정의 모든 신하가 걱정하고 있습니다.”

“여러 관청의 공무와 상소가 몇 주 동안 쌓여있는데 이것은 조선의 창업 이후 없던 일이라고 대신들이 수군대고 있습니다.” 

“대간이 올바른 말을 올리면 바로 노기를 띠고 신하로서 차마 듣지 못하는 말씀을 하십니다.”

“왕의 친·인척의 수탈이 심해서 그 폐단이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전하가 이들을 단속해야 함에도 오히려 방조해서 그들의 욕심을 채워주고 있습니다.” 

“전하는 정사를 너무나 사적으로 처리해서 제가 몇 번의 간언을 올려도 바뀌지 않으니 저의 말은 조금도 보람이 없습니다.”

 

송준길은 상소를 통해서 “왕은 신하들과 공부를 하지 않고 업무를 소홀히 하고 있으며 대간의 간언도 무시한다. 그러나 왕의 친· 인척의 사적인 이익은 잘 챙기고 있다”라고 통렬하게 비판하고 있다. 

또한 송준길은 이제 자신의 간언도 통하지 않기 때문에 자신이 궁궐에서 직책을 수행해야 할 이유가 없음을 덧붙이고 있다.

 

동춘당(송준길 고택 대전시 대덕구) 네이버이미지



현종은 송준길의 상소에 대해서 “말뜻이 간절하고 일깨움이 절실하니 매우 기쁘게 여긴다”라고 긍정적 답변을 내 놨다. 그러나 현종은 말 뿐이었다. 

이후 현종의 행동에는 상소에서 지적한 것처럼 별반 달라지는 것이 없었다. 송준길의 간절한 염원은 허공으로 흩어지는 것이다. 


 조선시대 왕이 궁궐 밖의 신하들을 부를 때 이용하는 연락 수단은 일반적으로 세 가지다. 사람을 보내거나 교지를 내리거나 패를 이용했다. 

 

교지(敎旨)는 문서로 전달되는 왕의 명령서다. 왕의 비서실 승정원의 승지를 통해서 전달되기 때문에 왕이 신하에게 예우를 갖추는 모양새다. 현종이 송준길에게 교지를 내려서 궁궐로 오게 한 것은 그만큼 송준길에 대한 예를 갖췄다는 의미다. 그러나 송준길은 왕의 부름에 응하는 대신 상소로 통렬한 비판을 쏟아냈다. 


 패(牌)는 붉은 색으로 만든 나무판으로 앞면에는 ‘명(命)’자를 쓰고 뒷면에는 부름을 받는 신하의 이름을 쓴다. 승정원의 공노비들이 패를 갖고 해당 신하에게 연락을 취하는 것이다.    왕이 패를 이용해서 신하를 부르는 것은 패초(牌招)라고 하고 신하가 그 패초에 응하지 않은 것은 패부진(牌不進)이라고 한다. 왕의 부름에 응하지 않는 패부진은 법적으로 파직이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현종 대에 왕의 패초에 응하지 않는 경우가 도드라지게 많다. 신하들이 왕의 부름, 즉 패초에 응하지 않는 것은 파직에 해당됨으로 자신의 직을 체직해달라는 무언의 항변이기도 하다. 신하들은 왜 왕의 부름에 응하지 않은 것일까? 

 

현종 1년 승정원의 도승지와 좌(우)부승지 등 왕의 핵심 측근들이 패초에 응하지 않고 자신들의 관직을 삭탈해달고 대죄를 하고 있었다. 승정원은 왕의 비서실로 왕명의 출납을 담당하는 후설지신(喉舌之臣)이라고 한다. 후설은 목구멍과 혀라는 뜻으로 임금의 입을 대신한다는 의미다. 그래서 조선의 왕과 승정원은 서로가 뜻을 맞추어서 왕은 승정원을 믿고 승정원은 왕이 어진 임금이 되도록 보필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현종과 승정원의 어긋난 단초는 어의(御醫) 양제신을 지방의 수령으로 임명하려고 한 것이었다. 현종은 이조 참의 이경휘에게 양제신을 수령 후보로 왜 올리지 않느냐고 물었다. 지방 수령은 인사 담당 이조에서 세 명의 후보를 올리면 왕이 그 중에서 한 명을 낙점하는 것이다. 


이경휘는 의관을 수령으로 임명하는 것은 조례와 차이가 있고 자신이 혼자 결정할 수 없기 때문에 올리지 않았다고 답변을 했다. 그러자 현종은 절차를 생략하고 양제신을 금천현감으로 특별히 제수했다. 신하들이 충분히 의혹을 살만한 인사였다. 송시열도 잘못된 인사라고 비판한다. 이후 양제신은 스스로 불안해서 금천현감에 부임을 하지 못한다. 

 

이경휘는 하직 인사를 했으나 왕의 심한 꾸지람을 듣고 나와야 했다. 이경휘는 사직을 한다. 그 불똥이 승정원으로 튀었다. 승정원도 퇴근을 여쭈었으나 왕은 은연 중 불평만 드러내고 퇴근의 하명이 없었다. 승정원의 승지들은 꼬박 밤을 새워야 했다. 다음 날 왕의 주치의에 해당하는 약방 제조의 진료도 거부했다.

 

승지들은 왕이 화를 내는 이유를 물었으나 현종은 분노만 폭발했다. 승지들은 궁궐 밖에서 사흘 동안 짚자리를 깔고 대죄를 했다. 3일 후, 왕은 패초를 내린다. 승정원 책임자 도승지 김수항 등은 “왕의 패초를 받았음으로 감읍하고 달려가야 하지만 신들은 아무런 일이 없다는 듯이 달려갈 수 없습니다. 신들을 파직하소서”라고 패초에 응하지 않고 상소를 올렸다.

 

영의정 정태화를 비롯한 삼정승도 “승정원은 임금이 올바르게 가도록 경계하는 말을 올린 것인데 이것으로 노여움을 폭발하는 것은 안 된다”라고 중재를 했고, 홍문관 부제학 유계도 “임금에게 의관의 수령 제수가 얼마나 자질구레한 일인데 그것으로 화를 내십니까”라고 지적을 했다. 

약방 제조 이경석 등도 “이것은 을(乙)에게서 난 화를 갑(甲)에게 옮긴 것으로서 정당성을 잃은 것입니다”라고 심기를 누그러뜨리고 진료를 받으라고 했으나 왕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사간원 헌납 김만기도 왕이 마음의 중심을 잃은 것은 ‘성냄’이 문제라고 상소를 올렸다. 특히 왕의 친·인친의 사적인 이익을 지적하면 화를 내는 강도는 더 셌다. 왕에게 간언을 올리는 사헌부나 사간원의 관리들도 자주 사직을 청하고 패초에 불응했다. 왕의 불합리한 인사나 종친의 사적인 이익의 폐단을 지적해도 왕은 들어주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사헌부 수장 대사헌은 사직과 패초에 불응하는 악순환이 자주 반복되었다. 1년 동안 대사헌 자리가 비기도 했다. 대사헌은 왕의 잘못을 간언하는 자리다. 대사헌이 왕에게 간언을 올리면 ‘불윤(不允, 윤허하지 않는다)’ ‘물번(勿煩, 번거롭게 하지 말라)의 대답을 듣기가 일쑤였다. 대사헌의 역할이 없는 것이다. 우의정 홍명하는 대사헌 자리를 추천하기 위해서 자신이 구차하게 설득을 해도 그 자리를 맡으려 하는 인물이 없다고 실토했다. 

 

현종 8년 우의정 정치화는 “요즈음 모든 관원들이 패초에 불응하는 것을 예사롭게 여기니 진실로 놀랍습니다”라고 조정의 기강이 무너지고 국사가 느슨해진 것을 한탄했다. 


 그 원인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었다. 좌의정 원두표는 “조정의 기강이 무너진 것은 대신 만의 책임이 아닙니다”라고 현종에게 직언을 했고, 대사간 김수흥도 좌의정의 말에 맞장구를 치면서 “(대신이) 관례와 법도에 따라서 아뢰어도 (임금께서) 화를 내고 원망을 하시니 대신이 소신 있게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라고 패초에 불응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현종은 신하들의 원인 진단을 인정했으나 앞으로 어떻게 하겠다는 대답은 하지 않았다. 여기에 지조와 염치를 중히 여기는 선비 정신도 한 몫을 더해서 왕의 부름에 응하지 않은 것이었다.  


현종은 효종의 1남 7녀 중 외아들이다. 현종은 왕조국가에서 경쟁자 없는 세자로서 핏줄로 왕이 되었다. 현종은 창덕궁 희정당에서 주로 정무를 처리했다. 그러나 국가를 운영하는 왕 역할은 핏줄로만 되는 것이 아니었다. 현종은 15년 3개월 왕 노릇을 하였으나 국가를 운영하는 무거운 책임과 공적인 가치를 가슴에 새겨야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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