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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현철의 궁궐이야기(44) 이괄, 서울을 점령하다 -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알게 된 궁궐- 왕현철 우리궁궐지킴이, 전 KBS PD
  • 기사등록 2019-11-02 21:10:10
  • 기사수정 2019-11-06 09:0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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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가 궁궐을 버리고 북쪽으로 피난간 지 32년만에 손자 인조가 다시 궁궐을 버리고 남쪽으로 피난길에 올랐다. 반란에 실패한 이괄은 부하에 의해 피살돼 37세로 생을 마감했다. 이괄의 난은 끝났으나 전쟁은 많은 일화를 남겼다”


인조 2년(1624) 2월 8일 인조는 작은 가마를 타고 창경궁 정문 명정전을 어둠을 타고 조용히 빠져 나간다. 아주 소수의 인원이 수행하고 있었다. 피난길이다. 

인조는 할아버지 선조가 궁궐을 버리고 피난길에 오른 32년 만에 또 궁궐을 떠나야 했다. 할아버지 선조는 피난길을 북쪽으로 방향을 잡았으나 인조는 남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이괄의 반란군이 북에서 쳐내려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인조가 피난길에 오른 것은 이괄이 반란을 일으킨 보름 만이었다. 

이괄은 인조 2년 1월 24일 인조가 자신의 아들을 체포하기 위해서 보낸 사자(使者) 금부도사 고덕상 등의 일행을 죽이고 반란을 일으킨다. 장소는 김소월의 시로 잘 알려진 평안도 영변이었다. 


이괄은 도원수 장만의 추천으로 평안병사 겸 부원수가 된다. 장만은 평양에 사령부를 개설한 총괄적 지휘자였으나 그 병력을 움직이는 실질적인 장수는 영변에 군사기지의 하나인 진(鎭)을 설치한 이괄이었다. 

장만은 도원수이지만 직할 병력은 없었고 이괄은 부원수로서 영변진을 지키는 1만 수천 명을 움직일 수 있었다.


 인조는 이괄의 반란 후 즉시 팔도에 군사를 징발하게 하고 이괄을 베는 자는 상당한 보상을 약속했으며 관서지방의 인심을 달래기 위한 대책으로 영의정 이원익을 도체찰사로 임명해서 파견하기로 했다. 

도체찰사는 전쟁 등 비상시에 군정을 맡는 임시의 최고 책임자다. 이원익은 평안도관찰사와 평양감사를 각각 역임해서 그 지역 사정에 밝았다. 


이원익은 현지에 가서 나라를 위해서 목숨을 아끼지 않고 반란을 깨우치고 백성들을 달래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당시 77세로서 병든 몸이었다. 현지에 가지는 못했다. 이괄의 반란군을 진압할 책임자는 도원수 장만이었다. 

 

이괄의 반란군은 1만 수천여 명으로 이미 거침없이 인조가 있는 서울로 남하하고 있었다. 장만은 직할 군대가 없었음으로 군사를 모아야 했다. 며칠 동안 수천 명을 모을 수 있었다. 장만이 병사를 모으고 움직일 수 있기까지는 시일이 걸렸음으로 이괄의 반란군을 뒤쫓아 가는 형국이었다. 



 첫 번째 승리는 의외로 장만에게 돌아갔다. 이괄이 반란을 일으킨 4일 후 장만은 간첩을 활용한 지략을 펼친다. 

이괄의 반란군에는 강압에 못 이겨서 난에 참가한 장군들이 있었다. 자신의 뜻에 상관없이 반란군이 된 안주목사 정충신, 중군(中軍) 남이흥 등은 목숨을 걸고 반란군에서 탈출해 장만의 진영으로 왔다. 

장만은 숫자가 적은 자신의 군대로 반란군을 이길 방도를 궁리하고 있었다. 이 때 반란군에서 탈출한 남이흥은 반란군에는 탈출하고자 하는 장군들이 더 있다고 장만에게 보고했다. 


 장만은 그 장군들과 연락을 취해야 했다. 광해군 대에 성진첨사를 지낸 이윤서의 종 효생이 적임자로 선택되었다. 이윤서는 반란군의 장군으로 가담하고 있었다. 

 장만은 효생에게 적진으로 가서 이윤서에게 자신의 편지를 전하면 ‘수천금을 주겠다’라고 약속을 했다. 이윤서의 종 효생은 “제가 이 글을 전함으로서 제 주인의 목숨을 살릴 수 있다면 다행입니다. 제가 어찌 재물을 받겠습니까”라고 의로운 행동을 했다. 


편지는 성공적으로 전해졌다. 이윤수 등 4명의 장군이 반란군에서 탈출해서 장만의 진영에 귀순하고 그들이 거느린 4천 여 명의 군사는 각자의 갈 길로 갔다. 효생이 비록 미천한 신분의 종이었지만, 용감한 행동으로 4천 여 명의 반란군을 흩어지게 한 것이다. 


이괄은 상당한 타격을 입었지만 아직 그 기세는 꺾이지 않았다.

이괄은 장만의 군사와 가능한 마주치지 않고 빨리 서울로 진군하고자 했다. 열흘 만에 황해도 황주까지 내려왔다. 지금까지는 관군의 저항이 별로 없었다. 황주는 서북쪽 방어를 위한 중요한 관문이었다. 관군의 1차 저지선이 된다. 이괄의 군과 정부군이 이곳에서 군사적으로 맞닥뜨린다. 


황주 싸움은 백병전이었다. 

황주의 섭다리에서 교전이 벌어졌다. 처음에는 이괄의 군에서 투항하는 자가 나와서 관군이 우세한 듯으로 보였으나 곧 분위기는 반전됐다. 이괄의 군에서 용맹을 보인 것은 130여 명의 항복한 왜군이었다. 이들이 칼을 들고 돌진하자 관군은 바라보다가 흩어져 달아났다. 순식간이었다.


 관군에서도 용감한 자는 있었다. 박영서였다. 그는 무과에 합격해서 평안도 창성부사가 되었으며 이괄의 진압군 선봉장이었다. 관군이 겁을 먹고 진격을 못하자 그는 말을 타고 홀로 용맹하게 이괄의 진중으로 뛰어 들었다. 그는 이괄을 잡을 뻔 했으나 바로 직전 그의 말(馬)이 거꾸러져 도로 이괄에게 잡히고 말았다. 이괄은 그의 용감함을 높이 사서 자신의 진영에 두고자 했다. 박영서는 자신이 잡힌 것은 말 때문이라고 하면서 말을 베고 끝까지 항복을 거부하고 죽을 때까지 반란군의 잘못을 꾸짖었다.


 인조는 그의 용감함을 듣고 탄식하면서 병조판서로 증직한다. 후일 영조는 그를 ‘충장(忠壯)’이라는 시호까지 내린다. 관군의 다른 장군들도 분전했으나 이 날은 관군의 참패였다. 도원수 장만은 패배의 책임을 자신에게 돌리고 다시 재기하겠다고 조정에 보고했다. 


 관군은 황주 전투에서 패배했지만 반란군의 서울 진입은 막아야 했다. 다시 저지선을 펼쳤다. 황해도 평산이었다. 조정에서는 독전어사 최현을 파견해 군사들을 독려했다. 

도원수 장만은 평산의 군사와 합류해야 했음으로 군사들을 쉼 없이 행군을 시켰다. 부찰사 이시발, 황해감사 임서, 남병사 신경원, 방어사 이중로, 평산부사 이확, 연안부사 이인경 등도 합류했다. 

 

관군의 방어선은 평산의 마탄이었다. 마탄은 예성강 상류이다. 관군은 여울목을 지키고 있었다. 

이괄의 군은 낮은 여울목을 건너서 관군을 급습했다. 관군은 우왕좌왕 한꺼번에 무너졌다. 많은 관군이 물에 빠져 죽거나 반란군에게 항복했다. 

관군은 쉼 없는 장거리 행군으로 지쳐있었고 식량도 부족해서 굶주린 자가 많았으며 몰래 도망자도 속출하고 있었다. 관군은 이미 사기가 떨어져 있었던 것이다. 방어사 이중로, 이성부 등 지휘관들도 다수 전사했다. 

 

평산의 패배가 전해진 이 날 밤 조정은 왕실의 피난을 논의한다. 공주산성이 거론되었다. 공주산성은 앞에 큰 강이 있어서 방어에 유리하고 서울에서 멀지 않은 것이 이유였다. 또한 명나라 장수 모문룡에게 구원을 요청하는 외교문서를 보낸다. 의병도 모집하기로 했다. 임진왜란을 겪은 지 30년도 채 안되었으나 나라가 바뀐 것은 없었다. 왕의 피난, 중국(명)에 구원 요청, 의병모집은 임진왜란 때에 관군이 허약했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광희문 (서울의 동남쪽, 속칭 수구문). 이괄은 서울 무악재 전투에서 패배 후 광희문을 통해 도주하지만 부하에게 피살된다. (사진은 네이버 이미지)


 관군의 그 다음 방어선은 임진강이었다. 경기감사 이서가 개성의 청석동을 방어했으나 여기서도 밤을 틈타 기습한 이괄의 군에 속한 항복한 왜군 수십 명에게 무너졌다. 

그 다음 수원부사 이흥립과 파주목사 박효립을 임진강의 위아래를 방어하게 했다. 이흥립은 3천의 군사를 가지고 있었으나 이괄의 반란군에 합류했다. 이흥립은 인조반정의 1등 공신이다. 국가로부터 상당한 혜택을 받는 1등 공신이 인조에게 등을 돌린 것이다. 후일 이흥립은 투옥되어 감옥에서 자살한다. 


박효립은 훈련받지 않은 민병 수백 명을 데리고 있었으나 이괄의 군을 보자 달아났다. 박효립도 인조반정의 2등 공신이다. 공신들이 왕에게 등을 돌리고 충성을 다하지 않은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관군의 임진강 방어는 방어가 아니었다. 허망하게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임진강 방어선이 무너지자 인조는 공주산성으로 피난길에 오른다. 

 이괄은 파죽지세로 2월 9일 서울로 진입했다. 난을 일으킨 지 22일만이었다. 이괄은 경복궁 옛 터에 주둔했다. 이괄은 선조의 6번째 후궁 은빈 한 씨의 장남 흥안군 이제를 왕으로 추대하고 “도성 안의 사람들은 놀라 동요하지 말라”고 방을 붙였다. 


이제는 왕으로 추대되어서 관직을 제수하기도 했다. 이괄의 난은 서울을 점령하고서 성공적으로 마무리되는 듯 했다. 


 그러나 관군은 마지막 결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관군이 선택한 최후의 결전 장소는 안현(鞍峴)이었다. 안현은 서울의 서대문구 길마재, 즉 무악재이다. 


 도원수 장만은 계속 패해서 반란군을 성안에까지 들어오게 했고 왕을 피난길에 오르게 해서 죽음을 면하지 못하는 처지였다. 다른 장수들도 마찬가지였다. 관군의 장수들은 죽을 각오로 싸워서 이겨야 했다.


 안주목사 정충신은 “병법에 북쪽 산을 차지한 자가 이긴다. 우리가 무악재를 점거해서 진을 치면 우리는 도성을 내려다보고 싸우고 적은 올려다보면서 싸워야 함으로 우리가 유리하다”라고 계책을 올렸다. 

이괄의 반란군에서 탈출한 중군 남이흥도 적극 찬성했다. 정충신도 남이흥과 같이 이괄의 반란군에서 탈출했다. 

 

도원수 장만은 군사 배치 상황을 보면서 천천히 하고자 했으나 정충신은 “도원수가 빨리 진군하라고 했다”라고 거짓 명령을 군사들에게 전달해 밤사이 순식간에 무악재와 그 주변에 군사 배치를 완료했다.

 군사 배치에는 사람과 말(馬)소리가 시끄러웠으나 그날 밤 동풍이 심하게 불어서 이괄의 군에서는 눈치를 채지 못하였다. 


장만은 이 때 낙산에 있었다. 낙산은 경복궁 동쪽에 있다. 동과 서에서 적의 보급로를 차단하려는 작전이었다. 

 

이괄은 관군의 배치 상황을 보고 도원수와 관군의 정예병이 따로 있으니 단번에 도원수를 사로잡으면 군의 사기가 떨어지니 이길 수 있다고 자신감을 보였다. 

이괄과 같이 반란을 주도한 한명련도 관군의 숫자가 적은 것을 보고 “관군을 격파하고 나서 밥을 먹자”라고 할 만큼 관군을 가볍게 보고 있었다. 이괄의 군은 그동안 거침없이 진군해서 싸우지 않아도 관군을 패주시킬 수 있다는 자만심이 있었던 것이다. 


 이 날의 싸움은 관군의 완벽한 승리였다. 그 요인은 유리한 지형과 날씨였다. 전투는 묘시(새벽 5시~7시)에서 자시(오전 9시~11시)까지 벌어졌다. 


이괄의 군은 화살과 탄환을 비 오듯 퍼부었으나 산꼭대기에 있는 관군에 미치지 못하였다. 또한, 싸움이 한창 무르익어 갈 무렵 바람의 방향이 관군에게 유리한 서북풍이 세게 불어서 반란군의 얼굴에 모래먼지가 휘몰아쳤다. 

반란군의 장군 이양(李壤)이 총에 맞아서 죽고 한명련도 화살에 맞았으며 이괄의 대장기도 후퇴의 조짐이 보였다. 반란군은 서로 달아나기에 바빴다. 죽은 자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정충신은 적을 끝까지 추격하려고 했으나 남이흥은 오히려 “오늘의 승리는 하늘 덕분이다. 이괄과 한명련의 머리가 곧 올 것이니 추격을 멈추고 복병을 조심하자”라고 여유를 부릴 정도였다.


 이괄은 이날 밤 왕으로 추대된 이제와 함께 서울의 동남쪽 광희문(속칭 수구문)을 통해서 서울을 빠져 나간다. 이괄을 따르는 자는 40여 명에 불과했다. 이괄과 한명련은 사흘 후 경기도 광주 경안역 근처에서 부하 이수백, 기익헌 등에게 살해된다. 힘 빠진 대장의 비참한 말로다. 이제도 며칠 후 잡혀 와서 처형된다. 


이괄의 반란은 실패로 끝났다.

이괄은 난을 일으킬 때 뚜렷한 명분을 제시하지 못했다. 이괄은 상에 대한 불만, 인사불만, 자식의 죽음에 대한 우려 등 개인감정으로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이것은 결국 자신의 힘이 강할 때는 그 힘으로 주변의 사람들을 따르게 했으나 그 힘이 약해질 때 배척당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괄은 무과로 합격했으나 글을 잘하고 글씨도 잘 써서 명성이 있었다. 그는 37세로 생을 마감했다. 이괄의 난은 끝났으나 전쟁은 많은 일화를 남겼다.(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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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위의 글은 <조선왕조실록> <연려실기술 인조조 고사 본말> <일월록> <염헌집> <연평일기>를 참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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