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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현철의 궁궐이야기 (43) 이괄, 반란을 일으키다 -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알게 된 궁궐 - 왕현철 우리궁궐지킴이, 전 KBS PD
  • 기사등록 2019-10-26 20:59:19
  • 기사수정 2019-10-27 17:5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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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괄은 자신의 녹훈 2등급도 불만이었지만 자신의 아들 이전도 반정에 참여를 했으나 등용이 안 되고 동생 이수도 자리를 못얻자 불만이 컸다.반면 반정공신 1등급 김류와 이귀의 아들은 이괄과 같은 2등급에 올라 불만이 더욱 커졌다"

     

 

인조는 즉위 10개월에 커다란 위기를 맞이한다. 인조는 반정을 같이 한 평안병사 겸 부원수 이괄이 병사 수만 명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킨다는 고변을 듣는다. 인조는 그 사실을 믿지 않았다. 인조는 도원수 장만과 부원수 이괄이 서북 방어를 위해서 현지로 떠날 때 모화관까지 가서 친히 전송을 했고 어도(御刀)를 내렸으며 수레바퀴를 밀어줄 정도로 애정과 신뢰를 보냈기 때문이다. 


 좌찬성 이귀는 이괄이 반역을 한다는 고변서를 근거로 해서 이괄을 잡아서 국문할 것을 청했다. 인조는 “이괄은 충성스러운 사람인데 어찌 반역을 하겠는가?”라고 이귀의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다음날 사헌부 사간원에서도 이괄을 체포해서 국문할 것을 청했다. 인조는 “이괄은 충성스러운 신하”라고 다시 강조하면서 “이괄이 아니면 부원수의 직임을 맡을 수 없으니 두 번 다시 번거롭게 하지 말라”라고 여전히 이괄의 충성을 믿고 있었다. 


인조가 이괄에게 이런 신뢰를 보내고 있을 때 이괄은 반란의 모든 준비를 끝내고 있었다. 이괄은 왜 반란을 일으켰는가? 


 이괄이 일으킨 반란의 싹은 인사 불만과 녹훈이었다. 녹훈은 신하의 공을 문서에 기록하는 것이다. 인조반정 7개월 후 인조반정의 공을 감정하는 녹훈을 정한다. 인조와 처음부터 반정을 모의한 김류, 이귀 등 10명은 1등, 이괄, 김류의 아들 김경징, 이귀의 아들 이시백 등 15명은 2등, 그리고 28명이 3등이다. 모두 53명이 정사(靖社)공신에 오른 것이다. 

 

 공신은 국가로부터 등수에 따라서 땅과 노비의 재산을 받고 그 자제는 음직의 혜택을 본다. 음직은 조선에서 과거를 거치지 않고 벼슬길에 오를 수 있다. 이괄은 2등이었다. 공신 2등은 국가로부터 상당한 혜택을 받을 수 있으나 이괄은 불만이었다. 이 녹훈은 이괄에게 반란의 기폭제가 된다.



영은문과 모화관. 인조는 모화관에서 이괄을 친히 전송했고, 또한 인조 반정 성공 위로연을 베풀었다.  출처=네이버 이미지 


이괄이 반란을 일으킨 이유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우선 인조반정으로 거슬려 올라가야 한다.  

 인조는 반정을 성공한 이틀 후 반정에 참여한 장수와 병졸들을 모화관으로 초청해서 위로의 잔치를 벌였다. 이 때 자리배치가 이괄의 심기를 건드렸다. 상석에 해당하는 맨 위쪽은 김류 그 다음은 이귀, 이괄의 순이었다. 이괄은 자신의 자리가 김류 아래에 있는 것에 분노해서 눈으로 흘겨보았다. 자리가 중간이고 가장 연장자 이귀가 좋은 말로 화해를 시켜서 그날은 그냥 넘어갔다. 


당시 이귀는 66살 김류는 52살 이괄은 36살이었다. 이귀와 이괄은 30살 김류와 이괄은 16살 차이였다. 사실 김류에 대한 이괄의 불만은 이틀 전 반정 당일에도 있었다. 


 반정의 날은 광해군 15년 3월 12일이었다. 모든 반정군은 이 날 밤 2경(밤 9시-11시) 홍제원(서울 서대문구)에 모이기로 했다. 홍제원은 중국 사신이 오면 옷을 갈아입는 곳이다. 이괄과 병사 수백 명은 일찍 도착했다. 그런데 반정의 정보가 새서 조정에 고변했다는 것이 반정군 사이에 퍼졌다. 


반정은 실패하면 역모다. 역모는 당사자의 죽음만이 아니라 그의 가족과 친족까지 연좌되어 피해를 입는다. 반정을 주도한 대장 김류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반정군 사이에 동요가 일어났다. 무엇인가 구심점이 필요했다. 이귀의 주선으로 이괄은 반정군의 새로운 대장이 된다. 반정 당일 병사들을 지휘할 반정군 대장이 김류에서 이괄로 바뀐 것이다. 이괄은 대장이 되어서 병사들을 편성하고 대오를 갖추니 병사들이 점차 안정되었다. 


 김류도 반정의 정보가 조정에 알려졌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김류는 자신의 집에 기다리면서 조정에서 자신을 체포하려는 병사들이 오면 그들을 죽이고 홍제원에 가려고 했다. 그래서 시간이 지체되었던 것이다. 


 이괄은 늦게 도착한 김류를 병법에 의거해서 죽이고자 했다. 주위의 모든 반정군들이 놀라 실색을 할 정도였다. 김류는 약속한 시간보다 너무 일찍 온 자를 참해야 한다고 맞섰다. 이괄과 김류, 두 사람 사이에서 일촉즉발이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이었으나 이 또 한 연장자 이귀가 화해시켰다. 


 인조반정은 성공했다. 그 공을 나누어야 한다. 이괄은 반정 3개월 전 북병사(함경북도 병마절도사)로 제수 되었으나 현지로 부임하지 않았다. 인조는 북쪽 방어의 중요성을 감안해서 이괄을 그대로 북병사로 보내고자 했다. 그러나 김류와 이귀가 이를 반대한다. 김류와 이귀는 이괄의 능력과 반정에 참여한 공을 감안해서 서울에 두어야 한다고 건의한다. 김류는 이괄과 다투기는 했으나 그의 능력을 평가한 것이다.


 이괄은 좌포도대장으로 왕의 경호를 거쳐서 판윤이 된다. 판윤은 정2품으로 한성부의 으뜸벼슬이고 오늘날 서울시장에 해당한다. 김류는 병조참판, 이귀는 이조참판이 되었다. 참판은 종2품이다. 벼슬등급은 이괄이 둘 보다 한 품 위이지만 김류와 이귀는 군과 인사의 핵심 역할을 맡은 것이다.  이괄은 임금에게 자신은 공이 없다고 하면서 판윤을 사직한다. 이것은 앞서 이귀가 이괄을 병조판서로 추천하는데 병조판서가 안 된 것에 대한 불만표시일지도 모른다. 

 

이후 서북 방어 책임자 도원수 장만의 추천에 의해서 이괄은 평안병사 겸 부원수가 된다. 당시 서북 방어는 중요했다. 오랑캐(청나라)의 침입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괄은 외직으로 나가는 것은 불만이었으나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이괄은 인조에게 자신에게 맡겨진 중임을 은혜로 갚을 것을 맹세한다. 다만 이괄은 1만 5천의 병력은 부족하다고 하면서 군사를 더 달라고 건의했다. 인조는 이괄의 건의를 받아들여서 전라도 군사를 더 보낸다. 

 

이괄이 왕에게 군사를 더 달라고 한 것은 내심 반란의 심중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괄은 인조반정 이후부터 불만을 갖고 반란군의 핵심이 되는 한명련, 정충신과 자주 모여서 시국을 이야기 했고 그의 외아들 이전(李栴)은 정돈, 정찬과 함께 산을 유람한다는 핑계로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같이 일을 한 사람들과 친분을 맺었기 때문이다.  


 이괄이 임지로 떠난 5개월 후 녹훈이 발표되었다. 녹훈을 주도한 것은 김류와 이귀였다. 김류와 이귀는 인조와 3년 전부터 반정을 모의한 두 축이었고 전 과정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김류와 이귀는 정사공신 1등이다. 이괄은 2등이다. 이괄은 자신의 2등급도 불만이었지만 자신의 아들 이전도 반정에 참여를 했으나 등용이 안 되었다. 반면 김류와 이귀의 아들은 자신과 같은 2등급에 올랐다. 또한 이괄의 동생 이수(李邃)도 문과에 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뚜렷한 자리를 얻지 못하고 있었다. 이괄에게는 자신의 공신 등급뿐만 아니라 아들과 동생의 인사 불만까지 겹쳐진 것이다.


 김류는 인조에게 “이괄은 반정모의에 처음부터 참여하지 않았지만 거사 당일 부대를 편성하고 진용을 갖추는데 공이 컸음으로 2등의 맨 앞에 올렸습니다”라고 이유를 설명한다. 이괄은 반정에 늦게 참여했고 그것이 그의 높은 공에 불구하고 2등으로 평가됐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이괄은 언제 반정에 참여한 것인가? 이괄을 김류에게 소개한 사람은 김원량이다. 김원량도 반정에 참여해서 2등 공신에 오른다. 김원량은 학식이 풍부하고 신용이 높은 사람으로 김류는 평가하고 있었다. 김원량이 이괄을 김류에게 소개한 시기에 대한 기록은 없어서 이괄이 정확하게 언제 반정에 합류했는지 알 수 없다. 다만 한 가지 추측할 수 있는 근거는 있다.             


이괄은 반정 3개월 전 북병사로 임명되었으나 현지로 부임하지 않았다. 폭군 광해군의 명령을 따르지 않은 것은 신하로서 무엇인가 중대한 사유가 있어야 하고 때로는 목숨을 걸 수도 있었다. 이괄은 이 때 쯤 반정의 제의를 받았거나 반정의 기미를 알아차려서 현지 부임을 가지 않았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그래서 이괄의 반정 참여 기간은 길어도 3개 월 가량인 것이다. 김류가 인조와 함께 반정을 준비한 3년의 기간에 비하면 이괄의 반정 참여기간은 김류의 십분의 일에도 못 미치는 것이다. 


 김류는 이괄의 반정 참여 기간이 짧았지만 그 공을 감안해서 2등 맨 앞으로 올렸다. 그러나 그것을 받아들이는 이괄은 생각이 달랐던 것 같다. 이괄은 반정 당일 “내가 남에게 속아서 거사를 일으켰다”라고 집으로 돌아와 분해서 눈물까지 흘렸다고 한다. 이괄은 반정 당일부터 김류와 부딪쳤고 그 후 인사에 대한 불만이 있었으며 녹훈 발표가 결정적 계기가 되어서 반란의 방아쇠를 당기게 된 것이다. 


 이괄의 반란을 인조에게 고변한 사람은 6명이었다. 전 교수 문회, 허통 이후와 한흔, 전 첨사 권진, 전 참봉 정방열, 충의 유안형이었다. 6명은 각자가 경험한 반란의 움직임을 상세하게 털어놨다. 반란군의 우두머리는 이괄과 그의 아들 이전이라고 했다. 반란 동참자 수십 명의 이름도 밝혔다. 광해군의 은덕을 입은 관리가 많았으나 현직의 지역 책임자 전라감사, 강원감사, 수원부사 등의 이름도 드러났다. 이들 반란군 동참자들은 대부분 잡혀 와서 형신을 받는다. 


 그러나 인조는 끝까지 이괄은 반란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인조는 이괄은 그대로 두고 대신 그 아들 이전은 체포해 오라고 명했다. 인조의 명을 받은 금부도사 고덕상, 심대림, 선전관 김지수, 중사(中使, 왕의 명을 전하는 내시) 김천림 등은 현지로 떠난다. 이전은 아버지의 군중에 있었다. 임금의 사자(使者)들이 이괄의 군중으로 가는 것이다. 

 

이괄은 군사 1만 2천명과 항복한 왜인 130 명을 데리고 엄동설한임에도 군사훈련을 하고 있었다.  이괄은 “나는 외아들밖에 없다. 아들이 잡혀가서 죽음을 당할 것이니 그 아비가 온전하겠는가. 잡혀서 죽으나 반역하다 죽으나 죽음은 마찬가지다. 그러나 머리를 숙이고 죽고 싶지는 않다”라고 하면서 지휘관들을 불러 모았다. 지휘관들은 이구동성으로 “임금의 사자(使者)를 죽이고 거사의 위엄을 보여 달라”고 청했다. 


 이괄은 군사를 성안에 포진시키고 임금의 사자들이 뜰에 도착하자 장교를 시켜서 그들을 죽인다. 이괄이 반란을 일으키는 신호탄이다. 인조 2년 1월 24일이었다. 이괄은 진격의 나팔을 울렸다. 그 목적지는 인조가 있는 창경궁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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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이괄의 난은 <조선왕조실록> <승정원 일기> <연려실기술 인조조 고사 본말> <하담록(荷潭錄)> <연평수록(延平手錄)> <서정록(西征錄,김기종)>을 참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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