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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현철의 궁궐이야기(45) 이괄의 난과 남긴 일화들 -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알게 된 궁궐 -왕현철 우리궁궐지킴이, 전 KBS PD
  • 기사등록 2019-11-09 20:49:08
  • 기사수정 2019-11-12 10:4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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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들은 이괄이 왕으로 추대한 사람이 이제(李瑅)인 것을 보니 이괄의 난은 오래가지 못하겠구나라고 예측했다. 백성들은 무지한 듯 보였으나 이괄이 제시한 인물, 비전을 보고 그 답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괄의 난으로 조선의 많은 남자들이 진압군과 반란군으로 나누어서 목숨을 걸었다. 내부의 전쟁이었기 때문이다.

 이괄의 난을 큰 그림으로 보면 인조와 이괄의 대결이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백성 개개인의 생과 사가 걸려있었다.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수많은 조선의 남자들이 전쟁터에서 이슬처럼 스러졌다. 


남한산성(사적 제57호). 인조는 이괄의 난 이후 남한산성을 쌓는다. 사진=네이버이미지



반면 역사의 기록에 의해서 그 이름을 남긴 자도 있었다. 누구는 용케도 살아남았고 누구는 살려고 했으나 죽음에 이르는 사람도 있었다. 역사에서 사라진 것도 새로 만들어진 것도 있었다.


***산 자***


 이민구는 도원수 장만의 종사관이다. 평안도는 반란 움직임 등으로 민심이 흉흉했다. 그는 도원수의 명을 받고 지역을 순회하면서 격문을 붙이는 등 민심을 달래고 있었다. 

또한 그는 지역의 병영을 사열하는 업무도 맡고 있었다. 그는 정주의 한 기생을 사랑하였다. 그가 사열해야 할 병영으로 그 기생을 오라고 했다. 

그런데 이민구는 기생이 다른 길로 접어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병영으로 바로 가지 않았다. 그는 기생을 만나기 위해서 다른 길을 5리쯤 갔을 때 이괄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보고를 받는다. 공교롭게도 공적 업무를 이탈한 그의 개인적 행동이 목숨을 살린다. 

만약 이민구가 병영으로 바로 갔다면 그는 살해되었을 것이다. 그와는 달리 병영으로 바로 간 금오낭관과 선전관은 반란군에 의해서 살해되기 때문이다. 


 신라장군 김유신은 기생을 만나지 않기 위해서 그의 말을 죽였으나 이민구는 기생을 만나기위해서 다른 길을 택한 덕택에 목숨을 건졌다. 기생은 말은 죽였고 사람은 살렸다.

 

이민구는 지봉유설을 쓴 이수광의 차남이다. 그는 수재였다. 그는 광해군 대에 진사시(進士試), 회시(會試), 전시(殿試)에서 모두 장원을 했다. 그는 문장과 재주가 뛰어났고 평판도 좋았다. 그는 이괄의 난이 끝난 후 35세로 경상도 관찰사로 나간다. 그 후 대사간 대사성 도승지 이조참판 등으로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그는 병자호란 때 평판에 어울리지 않은 행동을 한다. 그는 대군, 빈궁 등 왕족이 강화도로 피난할 때 자신의 임무보다는 가족과 함께 도망쳤기 때문이다. 그는 이 행동으로 병자호란이 끝난 후  끊임없이 비판을 받고 등용되지 않는다. 

그의 부인은 청나라로 잡혀가는 불운이 있었으나 그는 81세까지 장수를 누렸다. 그는 시집(24권)과 문집(4권)인 동주집 28권을 남겼다. 모두 번역이 돼 있다. 

“인명은 재천이다”라는 말이 떠오르게 한다. 


***죽은 자***


 이수백은 선조 대에 함경도 경원판관으로 등용되는 무인으로 이괄의 편에 선 장군이었다. 그는 이괄이 서울의 무악재 전투에서 패하고 경기도 광주로 피신할 때까지 이괄과 행동을 같이 했다. 그러나 이수백은 마지막에 이괄을 배신한다. 


이수백은 다른 장수와 함께 이괄 등 반란군 핵심 6명의 목을 벤다. 공주까지 피신한 인조에게는 이괄의 반란을 마무리 짓는 커다란 선물이었다. 인조는 이수백이 공주까지 가져온 이괄의 수급을 확인한 후 서울로 환궁한다.


 조정에서 이수백의 공과 죄에 대한 논란이 불거졌다. 인조는 그의 공을 높이 평가했다. 반면 신하들은 이괄의 세가 약해졌을 때 이괄을 배신하고 벴기 때문에 그의 공은 가볍고 반란군의 핵심 장군으로서 활동한 그의 죄는 더 무겁다는 것이다. 


 그는 결국 거제도로 유배를 가고 1차적으로 목숨 연장에는 성공했다.  

 인조는 유배를 보낸 7년 후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를 풀어준다. 이수백은 서울로 돌아왔다. 이것이 그의 죽음을 재촉한다. 그는 서울로 돌아온 3년 후 길거리에서 살해된다.    그를 살해한 사람은 진압군 방어사 이중로의 아들 문웅과 문위 그리고 풍천부사 박영신의 아들 지병, 지원, 지번 등 다섯 명이었다. 


 이중로와 박영신은 모두 진압군 장군으로서 임진강 저탄 전투에서 전사한다. 그 전투에서 이수백은 이 둘의 목을 들고 진압군으로 보내서 진압군의 사기를 꺾어야 한다고 이괄에게 건의했고 이괄은 그대로 따랐다. 박영신은 이가 부러지고 혀까지 잘려있었다. 박영신의 혀가 잘려있었다는 것은 끝까지 항복을 거부하고 저항해서 반란군을 나무랐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다섯 아들은 이수백을 각자의 아버지를 죽인 원수로 여기고 한 하늘 아래 같이 살 수 없다고 다짐한다. 다섯 아들은 이수백이 유배에서 풀려서 서울로 돌아온 것을 알았다. 그들은 때를 기다려서 이수백을 살해하고 머리를 베어서 대궐로 가지고 가서 자수를 한다. 


 조정에서는 다섯 아들의 처리문제를 논의했다. 부모는 모두 절의를 지킨 충신이다. 충신의 아들을 살인자로서 처벌할 것인가? 부모의 원수를 갚은 효를 높이 평가할 것인가? 조정은 논의를 거친 후 이들 모두를 사형죄 대신 각각 다른 장소로 유배를 보낸다.


 그 후 이중로의 아들 이문웅과 이문위는 각각 장성현감과 충청병사로 활동하지만 박영신의 세 아들에 대한 기록은 전혀 없다. 

 

이수백은 상관을 배신하고 유배에서 풀려 자유를 얻고 더욱더 목숨이 연장되는 듯했으나 결국은 불귀의 객이 된 것이다.


***사라진 것***


 <광해일기>와<시정기(時政記)>의 역사를 잃어버렸다. <시정기>는 춘추관에서 기록한 기록물이다. 예문관 검열 김광현은 <광해일기>와<시정기>를 강화도로 옮기는 임무를 맡았다. 이괄의 서울 진입이 예상보다 빨라서 김광현은 수레와 말을 충분히 갖추지 못해서 기록물들을 강화도로 실어 나르지 못하고 분실했다. 조정에서는 기록물을 찾고자 상금까지 내걸었으나 회수한 것은 40분의 1에도 못 미쳤다. 임무를 수행하지 못한 김광현은 파직 당한다.  


***새로 만든 것***


 인조는 이괄의 난 후 남한산성을 축조한다. 남한산성을 쌓는 데는 3천 석의 쌀로 일꾼을 사고, 벌을 주어야 할 포수나 군사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열심히 한 승려들이 대거 동원되었다. 2년 만에 20리에 달하는 높은 남한산성이 완공되었다. 남한산성에는 임금이 임시로 머무는 행궁도 지었다. 또한 삼혈총 1천 자루, 조총 1천 자루도 특별히 만들어서 보관했다. 


 그러나 성을 아무리 튼튼히 쌓아도 나라를 지키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나라를 지키는 데는 견고한 성과 더불어 훈련된 군사, 무기, 물자에 더해서 임금과 관리, 백성들의 힘이 모아져야 했다. 인조는 성을 쌓았지만 후일 치욕을 당한 병자호란이 그 사실을 증명해 준다. 

 

이괄은 반란군으로서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서울을 점령했다. 이괄의 반란군 기세는 대단했고 왕이 피난 가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괄의 난은 결국 실패로 끝났다. 

 이괄은 서울을 점령하고 선조의 6번째 후궁 은빈 한 씨가 낳은 이제(李瑅)를 왕으로 추대했다. 백성들은 “이괄이 왕으로 추대한 사람이 이제(李瑅)인 것을 보니 이괄의 난은 오래가지 못하겠구나”라고 예측했다. 백성들은 무지한 듯 보였으나 이괄이 제시한 인물(비전)을 보고 그 답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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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이 글은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연려실기술 인조조 고사본말> <지봉집 제17권/이수광> <일월록> <하담록>을 참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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