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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현철의 궁궐이야기 (36) 창덕궁 시민당(時敏堂) ① 사도세자, 대리청정을 하다 -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알게 된 궁궐
  • 기사등록 2019-09-01 06:49:24
  • 기사수정 2019-09-01 18:5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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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현철 우리궁궐지킴이, 전 KBS PD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었다’는 사실은 역사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으면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다. 조선의 제 21대 영조가 그의 둘째 아들 선(愃, 후일 사도세자)을 왕세자에서 서인으로 폐하고 궁궐에 엄히 가두어서 죽이는 사건이다. 


영조 38년 1762(임오년)에 일어나서 ‘임오화변’이라고 한다. 조선시대 왕세자에게 불어 닥친 최대의 비극이고 영조의 가슴에도 지울 수 없는 응어리를 남겼다. 왕세자 선이 창덕궁 시민당 뜰에서 21일 동안 임금의 처분을 기다리는 대명(待命)을 한 이후 벌어진 비극이었다.  


 임오화변을 이해하는 데는 사도세자가 태어나는 과정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영조에게 사도세자가 얼마나 소중 한 존재인지, 그렇게 귀한 존재를 죽일 수밖에 없는 곡절이 무엇인지를 조금이라도 더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창덕궁(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영조는 조선의 27명 왕 중에서 재위기간이 51년 7개월로 가장 길고 83세까지 장수를 한 임금이다. 그러나 자신의 대를 이을 후사(後嗣, 아들, 세자)의 복은 너무나 없었다. 

영조는 재위기간 동안 2명의 왕비와 4명의 후궁을 두었다. 2명의 왕비는 각각 66세, 61세까지 장수를 했음에도 한 명의 자식도 없었다. 자식은 4명의 후궁에서 2남 12녀가 태어난다. 

 

영조의 첫 번째 후궁 정빈 이 씨에서 낳은 첫 자식은 아들이었다. 경의군(敬義君)으로 7살에 세자로 삼는다. 효장세자다. 그러나 효장세자는 4년 후 병으로 죽는다. 영조는 “종묘· 사직을 장차 어찌할 것인가”라고 오랫동안 곡을 그치지 아니했다. 

정빈 이 씨에게서 두 명의 자녀를 더 두었으나 옹주였다. 세자는 국본(國本)이라고도 한다. 국본의 자리가 빈 것이다.   


 두 번째 후궁 영빈 이 씨에게서도 자식이 생겼으나 3명 연속 옹주였다. 영빈 이 씨가 네 번 째 임신을 했을 때는 홍문관 제학 송인명은 아들을 낳아주는 신과 명산에 기도했고 영의정 우의정 약방(의원)들도 기도에 동참했다. 그럼에도 기도의 노력은 허사가 되었다. 또 옹주였다. 

왕비에서 태어난 딸은 공주(公主) 후궁에게서 태어난 여자아이를 옹주(翁主)라고 한다. 효장세자 이후 내리 6명이 옹주였던 것이다. 나라에서 오랫동안 세자가 없으니 모두 근심하고 두려워했다.

 

영조 11년 드디어 영빈 이 씨가 사내아이를 출산한다. 영조에게 6명의 옹주 뒤에 안기는 아들이다. 오랜 가뭄 끝에 단비가 내린 것이다. 이 단비가 후일 죽은 후 시호(諡號)가 사도세자로 되는 인물이다. 

영조는 “삼종(三宗)의 혈맥을 이을 수 있어서 종묘와 사직에 고하고 전국의 8도에 알리라”고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삼종의 혈맥은 17대 효종 18대 현종 19대 숙종을 일컫고 모두 왕자가 귀했다. 영조의 바로 앞의 왕 20대 경종은 자식이 없었다. 

 

영조는 이 사내아이를 바로 첫 번째 왕후 정성왕후의 아들로 삼는다. 원자(元子)가 된 것이다.  이듬해 바로 세자로 정하고 이름을 선(愃)으로 정한다. 영조는 갓 돌을 지난 원자를 세자로 책봉하면서 “늦게 얻은 것이 매우 다행스럽고 품에 안긴 모습을 보니까 재량과 도량이 우뚝 섰다”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세자 책봉 후 세자의 스승인 사부(師傅), 빈객(賓客)을 붙여준다. 사부와 빈객은 학식과 덕행이 뛰어나며 충직하고 도가 있는 선비 중에서 뽑아서 세자를 보도(輔導)하게 한다. 보도는 도와서 올바르게 이끈다는 뜻이다. 


 왕세자는 세 살에 <효경>을 읽고 종이 12장에 각각 두 자를 써서 대신들에게 나누어 주기도 하였다. 세자의 총명함에 영조는 흐뭇했다. 영조는 세자의 이러한 총명에 신뢰가 갔던 것일까?  영조는 세자가 겨우 다섯 살 때 왕위를 물려주겠다고 승정원에 비망기(備忘記)를 내린다. 비망기는 왕이 자신의 생각을 직접 글로 적은 뜻이다. 


 영조는 비망기에서 “즉위한 이래 15년 동안 백성에게 덕이 미치지 못하였고 신하를 제대로 명령하지 못하고 기강도 세우지 못해서 한심했고 세상의 도리는 날마다 근심스러워서 임금 노릇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다행히도 자신을 이어갈 세자가 있다”라고 밝혔다. 

 비망기를 내린 소식이 알려지자 조정 대신 60여 명이 달려와서 “신들의 죄는 죽어야 마땅합니다”“명령을 거두어주소서”라고 머리를 땅에 두드리며 빈다. 영조는 이튿날 “겨우 다섯 살 세자에게 왕위를 맡기는 것이 어찌 즐거워서 했겠는가? 여러분들의 뜻을 받아들이겠다”라고 하면서 비망기를 철회한다. 

 

영조가 비망기를 내린 진정성은 알 수 없지만 그 속내를 짐작할 수 있는 사관의 평이 기록돼 있다. 사관은 “임금(영조)은 노론, 소론 양 쪽을 다 기용해서 탕평을 하려고 했다. 그럼에도 이들은 마음속까지 바꾸지 않아서 임금이 미워했다. 임금은 이따금 문을 닫고 음식도 물리친 채로 시국의 상황을 우려했던 것이다”라고 비망기를 내린 영조의 속내를 뜻풀이했다. 


영조가  비망기를 내린 것은 세자를 무기로 해서 노론과 소론에게 날린 경고장이었던 것이다. 영조에게 세자는 존재감 그 자체로 큰 힘이 되었던 것이다. 


 왕세자는 10살이 되는 영조 20년 세자빈을 선정하는 삼간택을 거쳐서 홍봉한의 딸과 가례를 올린다. 홍봉한은 당시 세마(洗馬)의 직책이었다. 세마는 말이나 목장을 관리하는 사복시의 관원으로서 정 9품이다. 

홍봉한의 딸은 사도세자의 죽음을 자신의 처지에서 기록한 <한중록(閑中錄)>을 남긴 혜경궁 홍씨다. 

 

왕세자는 가례 후 다시 세자의 공부인 서연(書筵)에 돌입해서 세자 수업을 쌓아간다. 그동안 겨울의 추위, 가벼운 병 그리고 결혼 등으로 4개월 정도 쉬었기 때문이다. 

세자가 11살이 되자 회강(會講)도 실시하게 한다. 회강은 세자가 11살이 되면 한 달에 두 번 세자의 스승 사부나 신하에게 경사(經史)나 그 밖의 서적을 강론하는 것이다. 회강은 복습에 방점이 있고 자주 하지는 않았지만 11살에게는 다소 버거운 수업이다. 


영조도 가끔 세자의 실력을 직접 확인한다. 세자가 배운 <소학(小學)>에 대해 질문을 했다. 

영조 :“‘계고(稽古)’의 뜻은 무엇이냐?”

세자 : “옛일을 널리 참고해서 좋은 것은 본받고 나쁜 것을 경계하는 것입니다.”

영조 :“ ‘가언(嘉言)’,‘선행(善行)’이  ‘계고’ 뒤에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세자 :“말이 아름답고 행동이 착한 것은 반드시 옛 것을 참고한 뒤에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영조는 세자의 대답에 헛되이 공부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고 하면서 더욱더 힘쓰라고 격려했다. 


 영조는 세자의 효도에 같이 밤을 새우기도 하였다. 세자는 화완옹주가 마마에 걸려서 거처를 일시적으로 경덕궁으로 옮긴다. 세자는 경덕궁으로 옮긴 보름 쯤 궁관(宮官)을 임금에게 보내서 안부를 묻고 사모(思慕)의 뜻을 전달했다. 

궁관은 세자궁에 소속된 관리다. 영조는 세자의 안부 인사에 바로 세자가 머물고 있는 경덕궁으로 와서 같이 밤을 보낸 것이다. 영조와 세자 사이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임금과 세자로서 아버지와 아들로서도 신뢰하고 돈독했다.

 

동궐도(국보 제 249호)의 시민당 터. 낙선재 터의 남쪽에 있다.  


영조 25년 세자가 15살이 되는 해에 대리기무(代理機務)를 명한다. 대리기무는 왕위를 넘기겠다는 뜻이다. 10년 전 영조가 비망기를 내려서 양위의 뜻을 밝힌 때처럼 거의 모든 신하가 명을 거두라고 청을 한다. 

영조는 “세자의 기품이 뛰어나지만 뒷날 과연 어떤 행동을 할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자신이 살아 있을 때 세자의 정무처리를 보고자하며, 또한 자신이 살아 있을 때는 누가 감히 한쪽으로 치우친 의견을 상소로 올리겠는가?”라고 자신의 본심을 털어 놓는다. 여러 신하들의 반대에도 영조는 꿈쩍을 하지 않았다. 


 세자가 이 소식을 듣고 비를 무릅쓰고 달려왔다. 때마침 빗줄기가 거세었다. 세자는 마루 밖에서 엎드려 울기 시작했다. 영조는 세자에게 “왜 우느냐? 안으로 들어오라”라고 4,5차례 반복했다. 세자가 마루 안으로 들어가니 신하들도 임금도 같이 울기 시작했다. 영조는 세자와 조정 대신들의 생각이 같으니 다시 생각해 보겠다고 하면서 한참 뒤에 “부득이 하면 대리청정을 하면 어떻겠는가?”라고 수위를 한 수 낮추었다. 

 신하들은 대리청정도 반대를 했다. 그러나 영조의 노기 띤 목소리가 커지고 뜻이 확고함을 알아채고 양위를 포기한 것이라도 다행스럽게 여겨서 “뜻을 받들겠습니다”라고 타협을 한다. 


영조는 “세자의 처소는 시민당으로 하고 조하 및 행사도 시민당에서 한다” 등 십여 항목의 구체적 대리청정 절목을 승지에게 명하여 쓰게 한다. 문서로서도 대리청정이 정해진 것이다.


영조 25년 왕세자 선(愃, 후일 사도세자)의 대리청정이 시작됐다. 세자가 대리청정을 하기로 한 시민당은 창덕궁 낙선재 남쪽에 있었고 세자의 외당(外堂)으로 사용되었다.

정조 4년 시민당에 화재가 났고 복원하지 못했다. 현재 그 모습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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