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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현철의 궁궐이야기(35) 창덕궁의 정문 돈화문 -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알게 된 궁궐
  • 기사등록 2019-08-24 22:27:56
  • 기사수정 2019-08-28 22:5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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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현철 우리궁궐지킴이, 전 KBS PD


       

창덕궁은 조선의 제3대 태종이 지었다. 태종이 창덕궁을 짓기까지는 사연이 있었다. 태종은 개성 수창궁에서 즉위한다. 제2대 정종이 서울에서 개성으로 환도했기 때문이다. 태종은 개성에서 왕 역할을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태종은 부왕이 창건한 도읍지가 한성(漢城,서울)이고 한성에는 종묘와 사직이 있었기 때문에 비워두는 것은 불효라고 여겼다. 마땅히 한성으로 옮겨서 거주하고자 했다. 풍수지리가 유한우 등을 한성으로 보내서 이궁(離宮)터를 잡도록 한다. 

이궁은 임시거처의 성격이 강한 궁궐을 의미한다. 정궁(正宮)혹은 법궁(法宮)으로 경복궁이 있었기 때문이다.

 

태종은 경복궁으로 돌아오는 것을 꺼려했다. 제1차 왕자의 난으로 피를 흘렸기 때문이다. 개성은 왕 씨가 창업한 땅임으로 거주할 수는 없었다. 태종은 조선의 도읍지를 다시 정하기로 한다. 개성, 한성, 무악 중에서 점을 쳐서 결정하기로 했다. 


무악은 태종의 좌명공신 하윤이 도읍지로 추천한 곳이다. 조선왕조실록에 무악은 삼각산의 남쪽 경복궁의 서쪽이라고 했다. 현재 서대문구 홍제동 인근을 일컫는 것이다. 태종은 내심 무악을 선호하고 있었다.

 

태종은 종묘에 신하들과 함께 들어갔다. 예를 갖추고 향을 피웠다. 점은 척전(擲錢)으로 했다. 척전은 동전 3개를 3번 던져서 길과 흉을 판단하는 방법이다. 척전 점의 결과 한성은 2길 1흉 개성과 무악은 1길 2흉이었다. 

태종은 “후세에 반드시 무악을 도읍지로 하는 자가 있을 것이다”라고 무악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지만 점의 결과를 받아들인다. 한성이 다시 조선의 도읍지로 결정된 것이다. 

 

 태종은 풍수지리가의 의견을 반영해서 항교동 동쪽에 이궁을 짓도록 명령을 내린다. 향교동은 현재 창덕궁의 왼쪽 현대사옥의 뒤편이다. 이것이 오늘날 창덕궁이 된다. 태종 5년에 지었다. 태종은 창덕궁을 기본적인 거처로 삼고 경복궁에는 경회루를 지어서 외국 사신을 맞이하거나 종친· 신하들의 연회를 베푸는 장소로 활용했다.  


 태종이 창덕궁을 지을 당시에는 오늘날처럼 규모가 크지 아니하였다. 침전, 편전, 행랑 등 모두 합쳐서 278칸이었다. 창덕궁의 정문 돈화문도 창건 당시에는 없었다. 돈화문은 창덕궁 창건 7년 후 진선문 남쪽에 누문 5칸을 세워서 지은 것이다. 이후 돈화문은 문종 대에 고치고 연산군 대에 다시 높고 크게 짓는다. 


 돈화문의 기본적인 역할은 출입이다. 출입문 관리에는 규칙이 있었다. 성종 대에 창덕궁의 문을 관장하는 부서를 정한다. 돈화문은 창덕궁의 남쪽 단봉문과 서쪽 평창문을 합해서 주서(注書)1명 겸사복(兼司僕)1명 대전사약(大殿司鑰)1명이 관장하게 한다. 

주서는 왕의 비서실 승정원의 문인이고 겸사복은 왕과 왕궁을 경호하는 무장이며 대전사약은 왕의 전각의 열쇠를 맡는 부서를 일컫는다. 

 

성종 대에 도총부도사(都摠府都事)유진은 제 멋대로 돈화문을 닫았다. 성종은 영돈녕 이상 및 의정부에 명해서 그 죄를 논의하게 한다. 모두들 사형이 마땅하다고 했다. 유진은 공신 유자광의 아들이었음으로 임금에게 그 결정을 다시 위임한다. 성종은 사형을 감해서 광양으로 유배를 보낸다. 궁궐 문을 제 멋대로 여닫는 것은 목숨까지 빼앗길 수 있는 매우 중한 죄였던 것이다. 

 

연산군은 궁궐 수비를 매우 엄격하게 한다. 창덕궁 돈화문을 비롯한 각 문에 군사 60명을 갑옷까지 입게 해서 지키게 한다. 창과 칼도 차게 한다. 대신 창끝과 칼날, 활시위는 대궐로 향하지 못하게 한다. 법으로까지 정했다. 그러나 갑옷을 입고 무장한 군인들의 창과 칼은 연산군을 지키지 못했다. 연산군은 자신의 패륜행위로 인해서 쓰러졌다. 도덕과 인륜이 창과 칼보다 한 수 위임을 보여준 것이다.


 임금으로서 왕이 되지 못한 광해군도 돈화문을 통해서 무너진다. 인조는 스스로 반정을 이끌었다. 인조는 김류 등을 대장으로 삼아서 돈화문을 통해서 창덕궁에 쳐 들어간다. 

광해군은 도망갔다. 그는 젊은 내시에 업혀서 창덕궁 북쪽 후원문의 사다리를 통해서 넘어가 사복시 개천가에 있는 의관 안국신의 집에 숨는다. 북쪽 후원문은 평소 궁인들이 넘나들기 편하도록 사다리를 두었다. 

 

창덕궁 돈화문(보물 재383호)


돈화문은 출입이 기본 역할이지만 이 외에도 다양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첫째, 돈화문은 백성의 삶의 시작과 마무리를 알리는 곳이다. 태종은 돈화문 누각에 큰 종을 주조해서 매달게 한다. 큰 종(大種)은 주철 1만 5천근으로 주조했는데 돈화문으로 옮겨 매다는데 군인 1천명이 동원되었다. 

돈화문 누각의 큰 종으로 조선시대 통행금지를 알리는 인정(人定)은 일경 삼 점(밤 10시 쯤)에 28번을 쳤고 통행금지를 해제하는 파루(罷漏)는 오경 삼 점(오전 4시 쯤)에 33번을 쳤다. 돈화문 누각의 종으로 조선시대 서울의 밤을 닫고 새벽을 깨웠던 것이다. 

 

둘째, 돈화문은 백성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영조는 역대 임금의 어진 등을 모신 선원전에 나아갔다가 명정문으로 나오면서 “돈화문 밖에서 엎드려 있는 부인이 누구인가?”라고 승지에게 묻는다. 승지는 권이형의 아내 홍소사라고 대답을 한다. 권이형은 평양출신으로 인장을 위조한 죄로 10여 년을 감옥에 있었다. 권이형의 아내는 영조의 첫 부인 정성왕후의 국장 때도 평양에서 올라와서 흙을 져다 나르기도 했고 정성왕후 1주기 즈음에 다시 올라와서 한 달 째 돈화문 앞에서 아침부터 어두워질 때까지 부복을 하고 있었다. 인장을 위조한 것은 사형 죄에 해당되었으나 영조는 그 정성을 갸륵하게 생각해서 사형에서 유배로 죄를 감하고 부인에게는 음식과 의복을 후하게 내려주고 열녀문도 세워주었다. 

 

셋째, 돈화문은 왕과 세자의 가교역할을 했다. 영조 28년 세자에게 임금의 자리를 물려주는 양위를 하고 송현궁으로 가겠다고 했다. 송현궁은 태조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기 전의 사저였다. 영조 28년(1752)은 임신년으로 태조가 왕위에 오른 (1392,임신년) 6번째 임신년이었다. 태조가 왕위에 오른 360년 후 영조는 송현궁이 다 쓰러져 가고 있음을 보고 매우 송구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영조는 선혜청의 쌀 2백석과 병조의 목재 60동과 기와를 이용해서 수리하게 한다. 영조는 정치의 공간 희정당은 세자가 사용하고 자신은 송현궁으로 옮겨가고자 했으나 대왕대비의 반대로 실천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양위는 철회하지 아니하였다.


 영조의 양위는 정치적 연출 측면도 있었다. 영조는 대소 신하들을 불러 모아서 24년 전 모반을 일으킨 역적들의 흉한 말을 거론하기도 하고, 또한 “노론과 소론의 주장이 서로 다르니 내가 어떻게 견딜 수 있겠는가?” “자신은 할 일이 있다”라고 하면서 제사와 군의 업무를 제외 한 공무를 동궁(세자)에게 들여보내라고 하교를 한다. 


신하들은 모두 반대를 하면서 내린 전교를 회수하라고 영조와 줄다리기를 한다. 암행어사로 잘 알려진 박문수는 “전하의 명을 받들 수 없다는 것을 훤히 알고 계시면서 이러한 하교를 하시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이 명령은 부당해서 따를 수 없습니다. 지나치지 않습니까?”라고까지 했다. 


영조는 박문수의 말에 책상을 치면서 “어찌 감히 이렇게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제주도로 귀양 보내라”라고 하면서 박문수와 뜻을 같이한 “영의정을 비롯한 삼정승, 대신, 승지들도 해도로 귀양 보내라”고 한다. 세자도 그동안 여러 차례 양위를 받들 수 없고 하교를 거두라고 하소연을 했다. 양위에 대한 영조의 뜻은 확고해 보였다.  


 영조의 마음을 누그러뜨린 것은 세자가 돈화문 밖에서 거적자리를 깔고 청한 대죄였다. 며칠 후 박문수는 “(세자가) 돈화문 밖에서 거적자리를 깔고 대죄를 청하고 있습니다” “(12월 달이었다)추운데서 음식도 안 먹고 눈물을 흘리면서 지나가는 대신들에게 임금의 마음을 돌릴 수 있는 계책을 묻고 있습니다”라고 영조에게 보고했다. 

박문수의 보고에 영조는 “세자가 정말 그랬단 말인가?”라고 눈물을 보였다. 영조가 보름가까이 일으킨 양위 소동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영조가 사도세자를 죽이는 10년 전의 일이었다. 


 넷째, 돈화문은 자유의 공간이다. 정조를 뒤이은 임금 순조는 즉위 2년차(1801)에 깜짝 놀랄만한 선언을 한다. 내노비(內奴婢)와 시노비(寺奴婢)를 혁파한 것이다. 

내노비는 궁궐에서 시노비는 중앙의 관청에서 공역이나 잡역 따위를 하는 노비다. 궁궐에 소속된 내노비는 974구(口), 160권의 책으로 시노비는 29,093구, 1,209권의 책으로 노비안이 기록돼 있었다. 노비를 세는 단위는 구(口)이다. 내노비와 시노비의 노비안 모든 것을 돈화문 밖에서 불태우고 노비를 양민이 되게 한다. 링컨의 노예해방보다 62년이나 앞선 조치였다. 


 순조는 중국의 고전 <중용>에서 “서민을 자식처럼 돌보아야 한다” “백성은 내 아들과 같이 보살핀다”에서 영감을 얻었고 숙종과 영조가 노비의 공역을 줄여온 것에도 영향을 받았다. 순조는 백성은 귀천이 없고 균등하게 대우를 해야 하는 것이 왕의 역할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조선시대 돈화문은 백성들의 삶의 시작과 마무리를 알리고 그 억울함을 호소했으며 임금과 세자가 소통했으며 노비를 해방한 자유의 공간이었다. 조선의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이다. 현재 돈화문은 2층으로 우뚝 서 있다. 그러나 그 앞 공간은 많이 줄어들었다. 그 줄어든 공간에는 자동차와 건물이 대신 들어섰다. 그 공간이 줄어든 만큼 옛 이야기도 묻히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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