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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현철의 궁궐이야기 (37) 창덕궁 시민당(時敏堂 ) ②사도세자, 병이 깊어지다 -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알게 된 궁궐
  • 기사등록 2019-09-08 07:59:40
  • 기사수정 2019-09-10 12:2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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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현철 우리궁궐지킴이, 전 KBS PD

 


 영조 25년 왕세자 선(愃, 후일 사도세자)은 15세의 나이로 국가의 기무를 처리하는 대리청정을 시작한다. 영조는 이 사실을 종묘에 고하고 전국의 8도에 교서를 반포한다. 영조는 교서에서 “부왕 숙종이 경종에게 대리청정을 맡긴 예를 들면서 대리청정은 역사와 법적으로 문제가 없고 세자도 공자의 말처럼 학문에 뜻을 둔 지학(志學, 15세)에 이르렀기 때문에 정사를 익힐 수 있는 좋은 기회를 갖게 되었다”라고 밝혔다. 


또한 영조는 인사· 군사· 형벌에 관한 권한은 여전히 자신에게 있고 이 외 사항은 모두 세자가 전결하도록 교서에 명기했다. 세자가 대리청정을 해도 국정의 모든 권한을 갖는 것은 아니었다.  

 

왕세자의 대리청정은 종친과 모든 백관들로부터 조참(朝參)을 받는 것으로 시작됐다. 조참은 문무백관이 왕에게 드리는 문안 인사이다. 장소는 세자가 대리청청하기로 정한 창덕궁 시민당이다. 세자는 이날 임금의 의복에 해당하는 익선관과 곤룡포를 갖추었다. 영조도 시민당에서 행하는 조참 의식을 지켜봤다. 


 영조는 “내가 통치한 25년의 허물을 덮어 줄 것인가 아니면 오히려 그르칠 것인가는 앞으로 세자의 역할에 달려있다” 라고 압박성 훈시를 했다. 그리고 세자의 가르침을 위해서 이틀 밤을 자지 않고 자신이 직접 지은 <정훈(政訓)>을 신하로 하여금 읽게 한다. 


<정훈>은 중국의 고전 <중용>을 기초로 한 다섯 가지의 중요한 덕목이 적혀 있었다. 큰 뜻을 세우고, 부모에 대한 효도와 형제의 우애를 돈독히 하고, 학문에 힘쓰며, 눈과 귀를 즐겁게 하는 완호물을 물리치고, 내시와 궁녀들에게 엄격히 해야 하는 것이었다.

 

이날 조참 행사에서 예(禮)가 영조의 눈높이에 맞지 않았다. 영조는 1품의 종친이 대신들을 따라 당에 오르는 것이 예절에 맞지 않다고 해서 행사의 총 책임자 예조판서를 체직시키고 승지와 사관 및 당하관들의 절하는 모습이 예법에 맞지 않아서 압반감찰을 처분하게 한다. 압반감찰은 문무백관이 자리할 위치를 정돈하는 임무를 맡는 사헌부 관리다. 


 왕세자의 첫 조참에 훈시와 <정훈>을 들어야 했으며 예조판서가 자리에서 물러나고 사헌부 관리가 처분을 받았다. 왕세자의 첫 조참이 축하로 출발하지는 않은 것이다. 영조는 교서에서 자신의 권한으로 밝힌 ‘인사· 군사· 형벌’외에도 여전히 입김을 행사할 것임을 암시하고 있었다.  


영조어진(51년 7개월 재위) . 영조는 사도세자에게 13년 동안 대리청정을 맡겼다.


 며칠 후 왕세자의 첫 정사가 시작되었다. 영조가 정전의 중앙에 앉고 세자가 옆에 모시고 앉았다. 영조는 “오늘은 세자의 첫 정사 날이다. 세자에게 아뢰어서 결정하라. 나는 지켜보고자 한다”라고 신하들에게 말했다. 이어서 세자에게 ‘그대로 하라’라고 승낙을 하면 잘못을 저지를 우려가 있으니 의심스러운 점은 묻고 자신의 의견을 참고해서 결정하라고 대리청정에 임하는 자세를 가르쳤다.


호조판서 박문수가 호조와 수어청 간에 얽힌 재정 문제를 꺼냈다. 호조는 중국 사신이 왔을 때 수어청으로 부터 은자(銀子)를 빌렸다. 수어청은 세금으로 거둔 쌀 3백석을 호조로 보내야 한다. 그런데 수어청은 호조가 빌려간 은자를 핑계로 호조로 쌀을 보내지 않은 것이었다.


 영조는 쌀은 국민의 세금을 처리하는 것이고 은자는 유사시에 대비하는 문제라고 하면서 세자에게 결정을 내리도록 한다. 세자는 “수어청은 세금으로 거둔 쌀은 호조로 보내고 호조는 빌린 은자를 수어청으로 돌려주라”고 결정을 내렸다. 영조는 “세자의 처리가 옳다”라고 했다. 왕세자의 첫 업무 처리는 성공이었다.  


 영조는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맡겼지만 감시의 눈길은 떼지 않았다. 400년 이어온 조선의 기틀이 자신에게 이어서 계속 튼튼해지기를 바랐다. 

우선은 세자의 교육을 중요시했다. 세자의 교육기관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을 통한 중국 고전 강의뿐만 아니라 자신이 세자를 위해서 직접 지은 책을 교재로 삼게 했다. 


영조는 세자를 교육하기 위해서 <정훈(政訓)> <상훈(常訓)> <훈유(訓諭)> <심감(心鑑)> <자성편(自省編)> <회갑편록> 등을 직접 지었다. 

<회갑편록>은 하늘을 공경하고 조상을 받드는 것이며 백성을 위하고 당파를 없애며 사치를 억제하는 내용이었다. 영조가 세자의 교육에 지나칠 정도로 정성을 쏟고 있음을 책으로도 알 수 있다.  

 

영조는 세자를 불러서 시강원에서 강독한 내용을 확인하기도 했다. 

 영조 : “자로(子路, 공자의 제자)가 헤어진 솜옷을 입고 여우 가죽을 입은 자와 함께 있어도 부끄러워하지 않은 것은 무슨 까닭인가?”

 세자 : “도를 즐기기 때문에 헤어진 옷을 입어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영조 : “위아래가 한마음의 되는 것은 어떻게 하면 할 수 있는가?”

 세자 : “모든 일에 공정하면 한마음이 될 수 있습니다”

 

영조가 세자가 스승과 공부하는 서연(書筵)에서 배운 <논어>를 외우라고 하면서 그 뜻을 물은 내용이다. 왕세자가 대리청정을 한 지 5년째였다. 영조는 세자의 대답에 만족해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세자의 학문에 대한 이후의 점검에서도 영조는 만족한 결과를 얻었다. 세자의 공부는 착실했다.  


 영조는 세자의 업무처리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였다. 그러나 세자는 공부와는 달리 업무 처리에서는 왠지 위축돼 있었다. 

세자는 신하들과 국정을 논의할 때는 매우 소극적인 자세로 일관했다. 신하들이 결정을 요구하면 “임금께 품한 뒤에 시행하겠다”며 자신에게 주어진 권한도 부왕에게 결정을 미루었다. 또한 “그대로 하라”“마땅히 명심하겠다” 등 단답형의 대답이었다. 


“그대로 하라”는 영조가 첫 정사에서 하지 말라고 강조한 것이었지만 세자의 통상적인 대답이었다. 세자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어떤 것에 관심을 갖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공조참판 김한철은 “저하(邸下,왕세자를 높여 부르는 말)께서는 신하들을 대할 때 듣는 대로만 대답을 하고 저하의 의견을 한마디도 개진하지 않으니 저희들은 답답할 뿐입니다”라고 마음을 열어 달라고 요구했으나 세자는 “유념하겠다”라고 할 뿐이었다. 이후에도 세자의 업무 태도는 그리 바뀌지 않았다. 


 영조는 신하들의 상소에 별로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신하들의 주장은 당파적 이익이 밑바탕에 깔려 있기 때문이라고 여긴 측면도 있었다. 세자의 대리청정기간 중에도 왕에게 간언을 하는 부서인 삼사(三司, 홍문관· 사헌부· 사간원)의 관원들은 줄줄이 귀양을 갔다. 

그래도 삼사의 관원들은 입을 닫지 않았다. 귀양과 생명을 각오해서라도 할 말은 했다. 사간원 정언(正言) 서명천은 세자에게 “나라의 흥망은 언로에 달려있습니다. 오늘날 언로가 열렸습니까? 닫혔습니까? 걸핏하면 삼사의 관원들을 외딴 섬이나 궁벽한 변방으로 귀양 보내서 몇 년씩 지내거나 죽게 하니 나라가 위태롭지 않습니까? 임금께 여쭈어서 신하들을 풀어 달라”고 상소를 했다. 


그러자 세자는 “임금의 처분이 지극히 엄명한데 사심을 품고 귀양 간 자를 비호하니 매우 무엄하다”라고 평소와 달리 대답도 길어졌고 격한 반응을 보였다. 부왕의 결정은 조금도 변경할 수 없는 절대적 선(善)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영조 30년 세자가 대리청정을 한 지 5년 째 서서히 영조와 세자 사이의 틈이 벌어진다. 겉으로는 견고한 성으로 보였던 곳이다. 그 출발은 언로 문제였다. 

사간원의 으뜸 벼슬 대사간 신위가 세자에게 상소를 올렸다. “모든 벼슬아치들은 숨어서 서로 모함을 해서 협력할 희망이 없고 일처리가 공정하지 못하며 국가가 화평하기 위해서는 언로를 넓혀야 합니다. 특히 언로는 사람의 실핏줄과 같아서 한시라도 막혀서는 안 되는데 오히려 기를 꺾고 있습니다. 저하께서는 임금께 여쭈어서 간신을 쫒아내고 귀양 명령을 취소하게 하소서.” 


여기서 간신은 영의정 이천보를 가리키고 귀양 가는 자는 언관 조영순이었다. 며칠 전 조영순은 영의정 이천보의 잘못을 지적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오히려 귀양 처분을 받았다. 이에 대사간 신위가 그 처분이 잘못됐음을 다시 왕세자에게 상소를 올린 것이다. 


 세자는 이 내용을 영조에게 보고하지 않고 귀양 보낸 자를 감싸고 있다고 신위를 꾸짖는 정도로 그쳤다. 다음날 좌의정 김상로가 이 상소를 영조에게 일러 바쳤다. 영조는 글을 읽고 세자와 신위를 불렀다. 

 영조는 신위에게 “네가 임금이 공정하지 않다고 세자에게 그 아버지를 헐뜯는 것은 지조와 절개가 없는 것이다”라고 하면서 바로 귀양을 보낸다. 이틀 길을 하루에 걷도록 하는 귀양길이었다. 

그리고 세자에게 화살을 돌렸다. “사람이 아들을 두는 것은 효도를 바라기 때문이다. 내 나이 60에 신하인 신위에게 업신여김을 받았는데 너는 어찌해서 상소를 상세히 살피지 않았는가?”라고 심한 질책을 했다. 사관은 “차마 듣지 못한 전교를 내렸다”라고 표현했다. 


 세자가 공부를 잘할 때의 칭찬은 온데간데없고 너무나도 갑자기 엄한 임금으로 돌변한 것이다. 세자는 바로 관(冠)을 벗고 뜰에 내려가 석고대죄를 했다. 대리청정을 하는 왕세자가 신하들이 보는 앞에서 질책을 받고 무릎을 꿇고 머리를 땅에 조아린 것이다. 이날 4경(새벽 1시~3시)에 파했으나 세자는 홀로 뜰에서 석고대죄를 계속 했다. 세자는 우부승지 심수를 통해서 “대리청정을 거두어 달라”고 청했다. 영조는 우부승지의 보고를 듣고 또 차마 듣지 못할 하교를 내렸고 세자는 눈물을 흘리며 울기를 그치지 않았다.


 이로부터 1년 후 왕세자는 스승 송명흠에게 “내가 대리청정을 한 5년째부터 병이 몸에서 떠나지 않는데 고칠 방도가 없겠는가?”라고 고백을 한다. 송명흠은 “마음을 맑게 하고 욕망을 적게 가져라”라고 대답을 했다. 유학자다운 처방이었다. 


 세자의 내면의 병은 점점 더 깊어가고 있었다. 왕세자의 세자빈 혜경궁 홍씨를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눈치를 채지 못하고 있었다. 세자빈은 왕세자의 병을 남에게 알릴 수는 없었다. 반면 영조는 세자에게 점점 더 엄격한 잣대를 대고 있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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