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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현철의 조선이야기 (17) 정도전, 조선의 설계사다 - <조선왕조실록>을 통해서 알게 된 조선 -왕현철 우리궁궐지킴이/전 KBS PD (wan…
  • 기사등록 2020-06-20 22:29:25
  • 기사수정 2020-06-23 21:2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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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도전은 스스로 ‘장자방’이라고 했으나 후대의 학자들은 그를 ‘조선의 설계사’로 부르고 있다. 필자도 정도전을 ‘조선의 설계사’로 부르는 것에 공감이 더 간다. 정도전이 저술한 <조선경국전>을 비롯해서 그가 마련한 조선의 여러 가지 틀이 이를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조선은 1392년 7월 17일 개국했다. 조선왕조실록은 이 날부터 기록돼 있고 그 첫 문장도 “태조가 수창궁에서 왕위에 올랐다”이다. 수창궁은 고려의 개성에 있는 왕의 정전이다. 

 

삼봉로(서울시 종로구청 주변) : 삼봉은 정도전의 호다. 이곳에 정도전의 옛 집터가 있었다.  사진=왕현철 



태조는 왕위에 오른 열흘 후 ‘즉위교서’를 발표한다. 즉위교서는 정도전이 기초한 것으로서 나라 운영의 대강을 밝혔다. 

 태조는 즉위교서에서 “나라 이름은 그전대로 고려라 하고, 의장과 법제는 한 결 같이 고려의 고사(故事)에 의거한다”라고 밝혔다. 급격한 변화를 원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새로운 정치를 이루겠다”는 의지도 드러냈다. 정도전이 기초한 즉위교서의 첫 항목은 고려의 종묘와 사직은 법도에 합당하지 않고 그 위치가 예(禮)에 맞지 않기 때문에 예조로 하여금 옛날의 제도를 규명하고 의논해서 일정한 제도로 삼아야 한다고 했다. 종묘와 사직, 즉 조선을 예(禮)에 맞게 최우선적으로 운영하겠다는 뜻이다. 


 두 번째 항목은 왕씨에 대한 배려였다. 왕씨의 제사를 받들기 위해서 토지를 주고 편리한 곳에 거주해서 안정된 처소를 마련하라고 했다. 조선은 이씨의 역성혁명이지만 나라 이름 ‘고려’를 그대로 사용한 것은 전 왕조를 완전히 뒤엎겠다는 뜻은 아니었던 것이다. 

이 항목은 3년 후 왕 씨를 강화도나 거제도 바다에 빠트려 죽임으로써 지켜지지는 않았다. 초심이 바뀐 것이다.


 즉위교서는 이 외에도 인재를 양성하기 위한 국학이나 과거제도, 백성의 삶과 직결되는 수령에 관한 제도, 충신과 효자를 권장하고, 세금과 형벌의 폐단을 바로 세우겠다는 항목 등 백성의 편리를 위한 14가지 조목과 조선 개국에 반대한 56명의 처벌 조항을 담았다. 

사관은 이 처벌 조항은 태조의 뜻과 어긋나는 정도전의 사적 감정이 들어있어서 “실정에 맞지 않다”라고 비판했다. 


 태조 2년 정도전은 음악을 통해서 조선 건국의 정당성을 알리려 했다. 정도전은 태조가 천명을 받아서 조선의 건국이 하늘의 뜻임을 강조한 악사 3편과 태조의 무공을 칭송한 3편의 곡도 지어서 바친다. 

 조선의 개국 전에 태조가 꿈에서 신인(神人)으로부터 받은 금척을 칭송한 몽금척, 태조가 지리산 석벽 속에서 얻은 기이한 글을 노래한 수보록, 태조가 여진족을 물리친 납씨곡 등이다. 정도전은 “새로운 시대에는 그 시대의 곡을 제작한다”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태조는 그 공을 인정해서 정도전에게 채색비단을 내리고 악공으로 하여금 곡을 익히게 한다. 이 곡들은 태조부터 영조 대까지 궁궐의 잔치 등에서 연주된다. 

 

정도전은 군사 훈련도 지휘한다. 정도전은 사시수수도(四時蒐狩圖)와 진도(陣圖)를 제작한다. 사시수수도는 계절마다 사냥하는 방법을 그림으로 그린 것이다. 조선 시대의 사냥은 군사 훈련을 겸하고 있었다. 

진도는 북을 치고 나발을 불거나 군대의 깃발을 휘두르는 방법, 군사들이 앉거나 서고, 전진하거나 후퇴하는 방법 등을 그림으로 그린 것이다. 정도전의 지휘 아래서 군사들은 그 방법을 익혀야 했다. 태조는 이것을 책으로 간행하게 한다. 


 정도전은 군사제도도 개혁한다. 정도전은 조선의 개국 이후 문반은 그 이름과 직책을 개정해서 책임을 지우니까 공을 세우기 위해 노력하는데 비해서 무반은 고려의 칭호가 그대로 이어져서 폐단이 많다고 했다. 북쪽의 요나라와 동쪽의 여진과 일본, 그리고 도적을 막기 위해서 군사를 엄격하게 하고 그 명칭도 명확하게 할 필요성이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임금을 호위하는 의흥친군좌위는 의흥시위사(義興侍衛司)로 의흥친군우위는 충좌시위사(忠佐侍衛司)로 고친다. 즉 기존의 ‘의흥군은 (임금을)왼쪽과 오른쪽에서 호위하는 것이다’를 ‘시위’와 ‘충좌’로 바꾸어서 임금을 ‘모시어 호위한다’ 와 ‘충으로서 보좌한다’라고 그 의미를 보다 명확하게 한 것이다. 

 정도전이 군제를 개혁한 것은 자신이 맡고 있는 의흥삼군부의 권한을 강화하고, 반란에 대한 우려를 없애기 위한 의도도 있었다. 


 무엇보다도 정도전을 ‘조선의 설계사’라고 부르는 것은 그가 <조선경국전>을 지어서 임금에게 바친 것 때문이다. 조선경국전은 이름 그대로 조선을 경영하기 위한 법전이라는 뜻이다. 태조는 조선경국전을 보고 감탄해서 정도전에게 말 한 필, 비단, 명주 그리고 백은을 내린다.

 정도전은 “조선경국전은 태조의 명을 받아서 나라의 기강을 세우고 베풀어서 자손에 대한 계책을 세워야함으로 주나라의 육관제도를 따와서 조선의 법전을 세우는 것이다”라고 책을 저술한 의의를 밝혔다. 


 조선경국전은 치전(관리등용, 군관 등), 부전(행정, 농상, 세금, 복지 등), 예전(종묘, 사직, 학교, 관·혼·상·제 등), 정전(군제, 군기, 둔전 등), 헌전(형벌, 소송 등), 공전(궁원, 성곽, 교량 등)의 6전(典)으로 구성돼 있고 각 전(典) 아래 모두 102개의 실천항목을 제시하고 있다. 정도전은 이 실천항목을 통해서 국가를 경영하는 기본적인 틀을 갖춘 것이다.

 

조선경국전의 일부를 보자. 치전의 총서 편이다. 

 정도전은 국가를 관장하는 것은 임금이 아니라 총재라고 했다. 총재는 위로는 임금을 받들고 아래로는 백관을 통솔해서 만민을 다스리기 때문에 그 직책이 매우 큰 것으로 정의하고 있다. 정도전은 임금은 어리석을 수도 있고, 현명할 수도 있으며, 강력하거나 유약한 자질을 가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총재는 임금의 아름다운 점이나 옳은 일은 순종하고 받들며, 나쁜 점이나 옳지 않는 것은 바로잡고 막아서 임금이 대중 속으로 파고들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부전의 판적 편에서는 백성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나라의 빈부는 백성이 많고 적은 데 달려 있고 부역을 고르게 하게 위해서는 인구를 정확하게 파악하는데 있다. 임금은 나라에 의존하고 나라는 백성에 의존하는 것이므로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며 임금의 하늘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인구수를 왕에게 바치면 왕은 절하면서 받아야 한다는 <주례>를 인용하기도 했다. 

 

조선경국전에서 ‘백성’은 146회 나온다. 정도전은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다. 근본을 튼튼하게 해야 나라가 편안하다”라고 이 책을 통해서 백성의 중요성을 누누이 강조하고 있다.



경복궁 근정전(국보 제223호) : 정도전은 “임금은 어진 사람을 구하는 데에 부지런하고 어진 사람을 쓰는 데 빨라야 한다”라고 근정전의 의미를 설명했다. 사진=왕현철 


 공전의 궁원 편에서는 궁궐 제도를 제시했다. 정도전은 궁궐을 사치하게 지으면 백성을 수고롭게 하고 재정을 축내며, 반대로 누추하게 하면 조정에 대한 존엄을 보여 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궁궐은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도록 해야 하는 것이 아름다운 것이라고 했다.(검이불루 려이불치 儉而不陋 麗而不侈)

경복궁이나 창덕궁 등 궁궐을 방문할 때 ‘검이불루 려이불치’의 의미를 되새기면 궁궐의 정취를 더욱더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정도전을 조선의 설계사로 부를 수 있는 것은 조선의 정궁 경복궁을 통해서다. 

조선은 태조 3년 한양을 조선의 도읍으로 정한다. 한양으로 도읍을 정한 이후 정도전은 판문하부사 권중화 등 5명과 함께 종묘, 사직, 궁궐, 시장, 도로의 터를 정한다. 그리고 태조의 명을 받아서 경복궁과 그 전각의 이름을 지어 올린다. 

 정도전은 경복궁 전각의 이름을 통해서 임금이 정치를 하는 기본 철학을 담았다.


 경복궁의 중심 건물은 근정전(勤政殿)이다. 정도전은 근정전의 의미를 임금의 부지런함으로 설명하고 있다. 정도전은 “아침에는 정사를 듣고, 낮에는 어진 사람을 찾아보고, 저녁에는 법령을 닦고, 밤에는 몸을 편안하게 한다”면서 “어진 사람을 구하는 데에 부지런하고 어진 사람을 쓰는 데 빨라야 한다”고 임금의 부지런함을 강조하고 있다. 정도전은 근정전을 통해서 임금은 훌륭한 인재를 구하는 데 부지런해야 함을 설명하고 있다.


 경복궁에서 임금이 정치하는 공간은 사정전(思政殿)이다. 정도전은 사정전의 의미를 생각을 통해서 설명하고 있다. 정도전은 “천하의 이치는 생각하면 얻을 수 있고 생각하지 아니하면 잃어버리며, 또한 생각하면 슬기롭고 슬기로우면 성인이 된다”고 하면서 “사람에게 생각은 그 쓰임이 지극하다”고 했다. 사정전은 임금과 신하들이 매일 만나서 정사를 처리하는 곳이기 때문에 더욱더 생각이 중요하다고 강조한 것이다. 


 정도전은 이 외의 경복궁 전각들 강녕전, 연생전, 경성전, 융문루, 융무루, 정문(광화문) 등도 그 의미를 남겼다.

 역사는 기록이다. 정도전은 600여 년 전 경복궁 전각의 이름을 짓고 그 의미를 부여했다. 오늘 날 우리는 그 기록을 통해서 경복궁 전각과 대화할 수 있고 조선의 설계사 정도전이 남긴 이야기도 들을 수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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