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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가 1950년 정상회담(Summit)이란 용어를 만든 건 최종 결정권자인 정상간 협상이 전쟁을 피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초강국 미국 대통령이 직접 나서 분쟁을 해결한 사례는 드물다. 정상회담은 ‘전부 아니면 전무(All or Nothing)’가 될 리스크가 상존한다. ( 참고; 데이비드 레이놀즈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 역사학 교수의 ‘정상회담’, 대니얼 드러낸 조지메이슨대 명예교수) 



▲ 1978년 캠프데이비드 회담은 정상회담의 성공사례로 꼽힌다. 안와르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과 메나헴 베긴 이스라엘 총리가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이 지켜보는 가운데 악수하고 있다.



지미 카터 대통령과 안와르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 메나헴베긴 이스라엘 총리 3자간에 진행된 1978년 캠프 데이비드 정상회담은 중동전쟁을 종식한 역사적 성공 사례로 꼽힌다. 30년간 네번의 전쟁을 치른 중동의 숙적 이집트와 이스라엘은 13일간의 협상에서 평화조약을 이끌어낸 이후 더 이상 전쟁을 하지 않았다. 사다트와 베긴은 이 공로로 노벨평화상을 나란히 받기도 했다. 

교과서적 실패 사례가 갓 취임한 존 F. 케네디 대통령(44)과 노회한 혁명가 니키타 흐루시초프(67) 소련 총리의 1961년 오스트리아 빈 정상회담이었다. 25년이 지난 후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과 미하일 고르바초프 대통령 간 레이캬비크 회담은 중거리핵무기 폐기 협정(INF)을 포함한 냉전을 해체하는 전환점을 만들었다.


▲ 흐루시초프가 1961년6월 빈회담 때 재클린케네디 여사와 환담하고 있다.


▶흐루시초프와 케네디 빈 회담

1945년 2차 세계대전 전후 처리를 위한 얄타협정(2월)과 포츠담협정(8월)은 세계를 서방과 소련 공산 진영으로 양분했다. 냉전의 시작이었다. 유럽에서 냉전의 진앙은 미국·영국·프랑스와 소련이 분할 점령한 베를린. 서독 국경에서도 160㎞ 떨어진 동독 내 외딴섬 같은 베를린은 동·서독 주민들이 자유로이 통행하는 일종의 해방구였다. 스탈린은 서방 3국이 자신의 독일 중립국 통일방안을 거부하고 서독 독립을 추진하자 48년 6월부터 도로·철도·운하통행을 차단하는 ‘베를린 봉쇄’를 실시했다. 연합국은 연 20만회 이상 항공편으로 물자를 공급한 ‘베를린 공수’로 맞섰다. 오히려 동독 경제마저 어려워지자 스탈린이 봉쇄를 풀었고 49년 동·서독 정부가 각각 출범했다.
1958년 흐루쇼프는 서방 3국에 군대를 철수할 것을 최후 통첩했지만, 미국 등은 포츠담협정 위반이라며 반대했다. 흐루쇼프는 59년 9월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캠프 데이비드 정상회담에서 베를린 문제 해결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1953년 스탈린 사후 집단지도체제에서 권력투쟁을 거쳐 집권한 흐루쇼프로선 베를린 문제 해결이 발등의 불이었다. 마오쩌둥(毛澤東) 주석의 중국은 날로 세를 키우고 있었다.
 그는 미국 정상과의 성공적 회담을 통해 공산 진영의 수장임을 확인받고 싶어했다. 
  반면 미국으로선 소련이 1953년 수소폭탄 실험에 이어 57년 세계 최초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 발사에 성공하자 경악했다. 대륙간 탄도미사일 기술을 선보인 셈이기 때문이었다.  
 소련의  군사적 위협은 묵과할 수준을 넘어서고 있었다. 그 와중에 케네디가 취임 3개월 만에 승인한 4월 피그만 침공사건이 변수가 됐다. 중앙정보국(CIA)이 쿠바인 망명 부대 1500여명을 비밀리에 파견해 카스트로 정권을 전복하려고 했다가 대부분 체포되거나 사살됐다. 케네디로선 미·소 정상회담을 피할수 없게 됐다.
  

▲ 흐루시초프 서기장과 케네디 대통령이 1961년6월3일 빈에서 만나 악수하고 있다. 두 사람의 나이차는 23살. 트럼프와 김정은 나이차는 각각 72세와 34살이어서 38세 차이나 난다.


6월 3일 토요일 정오가 좀 지나 케네디는 회담장인 빈 미국 대사관저에 미리 도착해 흐루쇼프를 맞았다. 흐루쇼프는 의례적 인사말이 끝나자마자 피그만침공을 놓고 작심한 듯 케네디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에겐 술주정뱅이에 여성편력만 일삼다 2차 대전중 사망한 장남(미코얀)이 있었는데 케네디와 동갑이었다. 67세의 흐루쇼프는 23살 어린 케네디를 얕잡아봤다. 그는 “자본주의가 봉건제에 도전해 승리했듯 공산주의가 자본주의에 도전하는 건 역사발전의 법칙”이라고 공산주의 이론을 가르쳤다.

케네디가 취임한지 5개월도 안 된 1961년 6월 3일 빈에서 처음 만난 두 사람은 이념 논쟁을 했다.
1961년 1월 취임한 케네디는 그해 4월 쿠바 피그스만 침공의 실패를 흐루시초프와의 회담에서 만회하려 했다. 흐루시초프는 냉전 초기의 고립감에서 탈출해 서방을 상대로 소련이 이제 핵 위협에 끄떡없는 강대국임을 과시하고 싶어 했다. 두 사람은 1961년 6월 3일 오스트리아 빈에서 회담을 했다.
“공산주의는 무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역사발전의 필연 법칙에 따라 승리할 것입니다.” 흐루시초프는 협박했다.
“그것은 역사적 필연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사람들은 자유로운 선택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케네디가 응수했다.
“미국이 (베를린 문제로)소련을 모욕하려고 하는데 용납할 수 없습니다.” 흐루시초프가 화를 냈다.
“베를린에 대한 소련조치를 미국이 받아들이거나 아니면 전쟁을 각오하라고 말하는 듯한 인상을 줍니다.” 케네디는 물러서지 않았다.
“전쟁이든 평화든 미국 마음대로 결정하시오.” 흐루시초프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애초 의견 일치를 볼 수 없는 상황에서 만난 두 사람은 핵실험, 베를린, 베트남 등 모든 현안에서 대립했다.
흐루시초프는 애숭이 대통령을 몰아부쳤다. 정상회담 전 흐루시초프는 “내 죽은 아들이 살아 있었다면 케네디 보다 나이가 많았을 것”이라고 했다. 실은 흐루시초프 장남과 케네디는 동갑이었다. 케네디는 흐루시초프보다 23살 어렸다. 흐루시초프는 첫날 회담을 마치고 참모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 친구는 영 경험이 없고, 미숙하기까지 해.”
회담 내내 흐루시초프의 노골적 감정적 언사에 케네디는 충격을 받았다. “아버지와 말하는 것과 비슷했다. 오로지 주기만하고 받지는 못했다.” 회담을 마치고 케네디가 탑승한 공군 1호기는 “월드 시리즈에서 패한 야구팀이 탄 비행기 같았다.”

김정은은 트럼프의 딸 이방카 보다 어리다. 이게 바로 트럼프가 조심해야 할 포인트다. 김정은은 한 체제의 절대 권력자 곧 수령이다. 트럼프 보다 권력이 세다는 뜻이다. 김정은을 쉽게 보거나 가볍게 대해서는 안 된다. 핵폐기만 강요하고 체제보장책을 굳이 내놓지 않아도 되겠다고 생각하는 건 매우 위험한 발상이 될 것이다.

회담을 마친 뒤 흐루시초프는 희희낙락했다. 소련이 서베를린을 압박해도 케네디가 전쟁을 감수할 확률은 5%도 안 된다고 자신하며 서방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베를린 분리장벽을 설치했다. 케네디가 장벽의 현실을 받아들이자 흐루시초프는 다음 도박을 했다. 쿠바에 핵미사일을 배치, 미국을 위협한 것이다. 잘못된 회담이 지구 종말을 재촉할 핵 전쟁위기까지 몰아간 셈이다.
흐루시초프는 케네디 대통령이 “전쟁보다는 장벽이 낫다”며 용인하자 케네디와 미국의 나약함을 보여주는 신호로 해석해 이듬해 냉전사상 가장 위험한 도박을 감행했다. 비밀리에 플로리다에서 불과 140㎞ 떨어진 쿠바에 핵미사일 배치를 시도한 것이다.


▲ 케네디 대통령이 1962년10월 쿠바 미사일 위기 때 쿠바해상봉쇄 명령에 서명하고 있다.


 사거리 2000㎞ SS-4(R-12), 4500㎞인 SS-5(R-12) 기지 9곳을 건설한 후 9월부터 미사일 해상수송을 시작했다. 처음엔 미사일 기지 공습을 검토했던 케네디는 10월 22일 흐루시초프에 외교적 해결책과 함께 강력한 해상봉쇄를 단행했다. 물러설 시간을 주기 위해서였다.
  양측의 대치는 살벌했다. 미국은 당시 최신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와 에섹스, 와스프 기존 대서양함대 소속 항공모함을 총동원해 핵미사일 및 폭격기 IL-28 등을 실은 소련 화물선단을 가로 막았다. 쿠바 상공을 정찰하던 미국의 U-2기가 쿠바의 지대공미사일에 맞아 추락하는 일까지 있었다. 쿠바는 완전히 고립됐다. 즉각 핵공격이 가능하도록 B-52 전략폭격기 23대가 소련을 타격 가능한 거리에서 순회 비행하고, 대륙간 탄도미사일(ICBM) 145기도 비상대기 상태를 유지했다.
  
미·소 양국의 핵전쟁으로 치달을 수 있는 일촉즉발의 위기는 결국 13일만에 흐루시초프가 미사일 철수를 택하며 물러섰다. 양국은 이렇게 냉전 이후 첫 핵전쟁 위기를 겪고 나서야 정상간 직통 핫라인을 설치했다. 
   빈 정상회담은 미·소 냉전사에서 준비 없이 회담을 했다가 실패한 최악의 정상회담 사례로 기록됐다. 두 정상은 서로에 대한 지식이나 기본적 이해도 부족했고 실무 회담을 통해 중요 의제에 대한 의견 접근도 시도하지 않았다. 베를린 위기는 물론 라오스 등 인도차이나 내전, 핵실험 제한 등 현안을 해결하기는커녕 핵전쟁 직전까지 갔다. 
 이후 미국 대통령에겐 취임 첫해 소련 정상과 만나지 않는다는 게 불문율이 됐을 정도다. 소련 역시 쿠바 미사일 철수를 계기로 더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한 미국을 상대로 무모한 협박을 해선 안 된다는 뼈아픈 교훈을 얻었다.  흐루시초프는 당내 기반이 흔들리면서 2년 뒤 실각했다. 흐루시초프 이후 지도자들이 전략 미사일 개발에 매달린 것도 회담 실패의 역효과 중 하나였다. 이 과정에서 소련 경제는 망가졌다.


▶체임벌린·히틀러 뮌헨 회담 

영국의 네빌 체임벌린 총리와 나치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 총통간 1938년 뮌헨 회담은 현대사를 대표하는 실패한 회담으로 기록되어 있다. 독일에 유화책을 쓰면 히틀러가 전쟁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체임벌린의 낙관론이 빗나갔다. 히틀러의 유럽 지배 야망을 꺾을 수 있는 계기였는데 체임벌린이 히틀러 달래기에 집중하느라 그 기회를 놓쳤다는 것이다. 히틀러는 38년 뮌헨 회담에도 불구하고 체코슬로바키아를 병합하고 1939년 폴란드를 침공, 2차 세계 대전을 일으켰다.
제1차 대전과 제2차 대전 사이 뮌헨 회담은 한 번에 끝난 회담이 아니다. 체임벌린·히틀러는 독일 베르크호프, 고테스베르크에서 회담을 두 차례 했고, 프랑스의 에두아르 달라디에 총리가 추가로 참석한 가운데 세 사람이 뮌헨에서 3자 회담을 했다.


▲ 뮌헨회담서 히틀러에 속은 체임벌린 영국 총리가 ˝전쟁은 없다˝며 합의문을 들어 보이고 있다.


1938년 당시 영국에서는 다시 전쟁을 겪고 싶지 않다는 정서가 광범위했다. 만일 전쟁을 하면 독일 전투기가 런던을 파멸시킬 것이라고 적지 않은 공포감을 갖고 있었다.
영국 내에서도 히틀러의 의도가 무엇인지 두고 판단이 엇갈렸다. 히틀러는 단지 1차 대전 종전이 독일에 가혹한 배상을 강요한 베르사이유 조약의 잘못된 점을 바로 잡으려는 것인가? 아니면 제2의 나폴레옹이 되려는 것인가? 마치 김정은 핵무기 개발이 정말 핵보유국 지위를 누리기 위한 것인지,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위한 협상 카드인지 관측이 분분했던 것과 같다.
 내각 소장파는 해군 기동훈련을 통해 확고한 결전의 태도를 보이자고도 했다. 이들은 1차 대전 직전 1914년 7월의 위기 때 영국 정부가 강력한 대독 항의 성명을 발표했다면 독일이 전쟁하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따라서 이번에도 미적거리다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체임벌린은 히틀러와 회담하려는 국내정치적 이유도 있다. 이듬해인 1939년 가을 총선에서 대패가 예상되던 그에게는 외교적 성공이 필요했다. 또한 그는 개인적으로 1937년 총리 취임 전부터 유럽 평화 구상에 몰두해 있었다. “수억 명의 목숨이 절반은 미친 사람의 손에 달려 있다고 생각하면 너무나 끔찍하다”고 말해왔다.
그의 접근법은 히틀러를 잘 구슬려 체코 합병에 만족하고, 더 이상 침략할 의사가 없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선을 제압해야 한다고 생각한 체임벌린은 히틀러와의 첫 정상회담을 매우 극적으로 추진했다. 히틀러에게 만날 수 있는지 사전 의향을 타진하기는 했지만, 체임벌린은 방문 날짜를 미리 알리지 않고 전격 독일을 방문했다.

체임벌린은 1938년 9월 13일 독일 외무부에 이런 메시지를 전달했다. ‘내일 독일로 출발하니 만날 수 있는 시기와 장소를 알려 달라.’ 지방에 있던 히틀러는 깜짝 놀랐다. “영국이 참전을 엄숙하게 선언하기 위해 방문하는 구나.” 히틀러는 이렇게 생각했다고 한다. 체임벌린은 회담 개최 사실도 출국 진전에 발표했다. 체임벌린·히틀러 정상회담 소식이 전해지자 영국에는 기쁨의 물결이 넘쳐흘렀다. 한 기자의 증언. “이처럼 극적이고 짜릿하고 또 감동적인 뉴스는 일찍이 들어본 적이 없었다.” 모든 신문의 사설이 회담을 환영했다.



히틀러를 만난 체임벌린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당신은 (체코에 살고 있는)300만명의 주데텐 독일인들이 독일 제국에 포함되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당신은 그것으로 만족하고 더 이상의 요구는 하지 않을 생각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당신 요구가 거기에 그치지 않으리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묻는 말입니다. 혹시 당신은 체코슬로바키아를 해체하려는 건 아닙니까?”

히틀러는 말했다.
“내가 관심 있는 문제는 주데텐 독일인 뿐입니다,”
독일과 다른 나라들 사이에서 갈등을 일으킬 수도 있는 다른 지역를 요구하지 않을 것임을 확인한 것이다.
체임벌린은 히틀러를 설득했다. “당신은 전쟁을 하지 않고서도 즉각 모든 필수 사항을 얻을 수 있습니다.”
히틀러가 물었다.
“주데텐 독일인 지역을 독일 제국에 할양하는 문제에 영국이 동의합니까?”
체임벌린이 대답을 했다.
“개인적으로는 찬성이지만 우리 내각은 물론 프랑스 측과 상의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체임벌린은 2시간 만에 주데텐을 히틀러에 양보하기로 하고 내각의 묵시적 동의하에 프랑스에 승인 받는 쪽으로 생각을 바꿨다. 그리고 히틀러는 미쳤다는 생각도 바꿨다.

뮌헨에서 체임벌린, 히틀러, 달라디에는 주데텐을 독일에 넘기는 것으로 합의했다. 뮌헨에서 체임벌린과 히틀러 두사람은 별도의 양자회담을 갖고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영국과 독일이 향후 교전하지 않기로 했다는 내용이다.
달라디에는 프랑스인의 반응이 어떨지 불안에 떨면서 귀국했으나 비행기 문이 열리자 마중 나온 사람들의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에 깜짝 놀랐다. 그는 중얼거렸다. “사람들이 미쳤군.”
체임벌린 환영은 더욱 성대했다. 비행장에 비가 억수같이 쏟아 붓는데도 엄청난 군중이 몰려들었다. 다음 날에도 총리관저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가 연설을 했다. “나는 우리 시대에 평화가 찾아 왔다고 믿습니다.” 회담이 다음해 총선 승패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체임벌린의 처지는 트럼프 같다. 악재가 많은 트럼프는 11월 중간선거에서 북미회담으로 성과를 내야만 한다.

히틀러는 뮌헨합의를 지킬 생각이 없었다. 나중에 히틀러는 이 합의 때문에 전쟁을 못했다며 체임벌린에 속았다고 말했다. “체임벌린은 나의 의심을 녹이기 위해 있는 말, 없는 말을 다 늘어놓았다. 그가 베르크호프까지 일부러 찾아온 목적은 단 하나,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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