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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현철의 궁궐이야기 (29) 궁궐의 여인들 ①상궁(尙宮) -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알게 된 궁궐
  • 기사등록 2019-07-14 06:41:36
  • 기사수정 2019-07-18 07: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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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현철 우리궁궐지킴이, 전 KBS PD


  조선의 22대 임금 정조는 정치는 궁중에서 시작된다고 했다. 그 궁궐이 맑아지는 조치의 하나로 정조는 궁녀들이 술잔치를 벌이는 것을 금지한다. 정조는 궁녀들이 기녀를 끼고 풍악놀이를 벌이고 또한 액정서나 궁방의 사내종들과 함께 꽃놀이와 뱃놀이를 하며 심지어 재상들의 교외의 별장에 들어가는 추잡한 이야기도 들린다고 했다. 

“나라의 법을 조금이라도 생각한다면 있을 수 있는 일인가?” 라고 통탄하면서 형조와 궁녀를 관장하는 부서는 이를 엄격히 단속하고 어기는 상궁이나 시녀는 직위고하를 막론하고 유배를 보내라고 지시를 내린다. 이것은 정조가 세손 때부터 지켜보면서 놀랐던 일이었다. 정조는 영조의 손자로서 세자가 되어 세손이라고 한다. 


 꽃놀이와 뱃놀이를 즐겼던 조선의 궁녀들, 이것은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일까? 누가 어떻게 궁녀가 되고 그 일생을 마치는가? 

 “궁인을 뽑는 일은 그 법례가 있는데  궁궐 내의 일을 관장하는 내사(內司)의 하인들이 민간에 다니면서 소요를 일으킨다고 합니다.”- 인조21년

 “궁녀를 뽑을 때 액정서의 남자 종들이 소란을 피우는 폐단을 엄중하게 금하라.”- 영조3년

 “근래 궁녀를 선발한다는 이야기가 일반 백성들 사이에 파다해서 소란스럽다고 하는데 알고 있는가?” - 정조1년


 임금과 신하들이 궁녀(궁인)를 뽑는 것에 관한 지시나 소문의 진상을 파악하기 위해서 나누는 이야기다. 이처럼 궁녀를 뽑는 것은 궁궐 내부뿐만 아니라 일반 백성들에게까지 관심사였다. 궁녀는 대박의 기회를 잡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궁녀는 왕실가족의 허드렛일에서 시작해서 그 연수가 차면 직급과 녹봉을 받는 여관(女官)이 되고 임금의 승은을 입으면 정1품 빈(嬪)까지 오른다. 왕비까지 될 수도 있다. 또한 그 자식은 의식주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형제나 친척은 출세가도를 달릴 수도 있다. 궁녀 한 명을 통해서 집안을 당당히 일으켜 세울 수 있는 것이다. 반면 자신이 모시는 주인의 사건 등에 휘말려 피지도 못한 꽃봉오리로 스러지기도 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궁녀는 추천이나 뽑혀서 들어온다. 그러나 그 절차를 명확하게 규정해 놓은 것은 없다. 연산군은 궁인은 문자를 알아야 하기 때문에 젊고 영리한 자를 뽑으라고 했으나 일반적인은 것은 아니었다. 중종의 사랑을 받은 경빈 박 씨는 그 자색의 아름다움이 알려져서 뽑혀왔다. 숙종의 총애를 받은 장희빈은 역관의 사촌 형제의 딸로서 나인으로 뽑혀왔다. 추천을 잘못해서 벌을 받는 경우도 있었다. 영조 대에 양민이나 양반의 첩이 낳은 딸을 궁녀로 추천해서 그 추천한 자를 귀양 보냈다. 


 궁녀의 신분은 천인으로 들어와도 직급이 오르거나 승은을 입으면 전혀 다른 대우를 받을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천인으로 궁중의 시녀가 되지만 직급이 올라서 상궁이 되면 교자를 탈 수 있었다. 장희빈은 어머니가 노비였지만 제 20대 왕 경종을 낳아서 국모가 될 수도 있었다. 성종의 총애를 받아 왕비에 오른 폐비 윤 씨도 궁인 출신이다. 태종은 임금의 자식은 다 똑같다고 하면서 어미의 귀천을 따지지 말라고 했다. 조선은 양반, 양민, 천민의 차별적 신분제도가 있었고 자식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궁녀는 달랐다. 시작은 미약했어도 그 끝은 창대할 수가 있었다.  


 궁녀들은 어떤 일을 했을까? 조선은 초기부터 궁녀를 뒀으나 궁녀들이 월봉을 받고 관직을 받는 여관(女官)제도는 태종대에 정착되었다. 9품인 사식(司飾)에서 3품인 찬덕(贊德)까지 있었다. 궁중의 모든 일을 맡았던 실질적 책임자는 6명의 여관으로 정5품이었다. 상궁(尙宮)·상의(尙儀)·상복(尙服)·상식(尙食)·상침(尙寢)·상공(尙功)으로 육상이라고 한다. 


상궁은 왕비의 인도를 맡고, 상의는 예의(禮儀)와 기거(起居)를 맡고, 상복은 복용(服用)과 채장(采章)의 공급을 맡고, 상식은 선수(膳羞)와 품제(品齊)의 공급을 맡고, 상침은 연현(燕見)과 진어(進御)의 차서(次序)를 맡고, 상공은 여공(女功)의 과정을 맡는다. 

특히 왕비를 안내하는 역할인 상궁은 조선왕조실록에 자주 등장한다. 궁궐에는 대비 봉숭, 왕비 책봉, 세자빈이 올리는 의식, 백성의 삶을 체험하기 위해서 뽕잎을 따는 친잠례 등 왕비가 참석해야 할 공식 행사가 많다. 이러한 행사의 왕비 참석에는 반드시 상궁의 안내를 받아야 한다.


 “상궁이 왕비를 인도해서 먼저 나가면 풍악이 시작되고......” 

 “왕비가 연(輦, 왕이나 왕비가 타는 가마)에서 내리면 상궁이 앞에서 인도하고......”등 왕비의 행동은 상궁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상궁은 왕비를 지근거리에서 모시는 여관인 것이다. 상궁은 왕비와의 거리가 가까운 만큼 왕으로부터 하사품을 받기도 하고 관리들로부터 출세의 끈을 부탁받기도 했다. 


 단종은 태어나자 어머니 권 씨가 바로 죽는다. 유모의 손에서 자랐다. 임금의 유모를 봉보부인이라고 한다. 봉보부인은 종1품으로 봉보기마패(奉保騎馬牌)를 차고 말을 타고 궁궐에 들어올 수 있었다. 

단종의 유모는 박 씨였다. 박 씨는 봉보부인으로서 상궁이었다. 상궁 박 씨는 단종으로부터 토지 70결을 하사 받는다. 판내시부사가 받은 50결보다 많았다. 노비 15구(口)도 받는다. 노비는 재산이었다. 이후 상궁 박 씨는 단종복위 운동에 가담해서 청양으로 귀양을 가고 재산도 빼앗긴다. 


 조선에서 세종이나 정조임금처럼 뛰어난 업적을 남긴 왕에게는 황희와 정약용처럼 훌륭한 인물의 신하가 떠오른다. 반면 폭군이었던 연산군에게는 난신적자가 끼어든다. 임사홍 등이다. 광해군 대에는 김 상궁이 난신적자다.  


 김 상궁은 왕비를 투기해서 원수처럼 대했다. 온갖 흉악한 물건을 침실에 넣어 저주사건을 일으켰다. 왕비는 병이 들었지만 광해군은 사건의 진상을 밝히려고 하지 않았다. 그녀가 주는 즐거움을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정원은 김 상궁과 내통해서 이조 참의에 오른다. 사관이 권력자에게 빌붙어 노예나 다름없다고 평을 했던 인물로 선비들을 부끄럽게 했다. 김 상궁의 지원을 받은 형방승지 박홍도도 권세를 휘둘렀다. 

인조가 광해군의 폭정에 반정을 일으켜 창덕궁에 쳐들어갔을 때 군사를 모은 병조참판 박정길을 제거하고 그 다음으로 참수한 사람이 김 상궁과 박홍도였다. 김 상궁은 왕의 총애로 자신의 본분을 잊은 대가였다.


경복궁 청연루 

 


궁궐은 목조 가옥이다. 화재는 치명적이다. 화재와 인연이 된 상궁도 있었다. 중종 대에 상궁 박 씨는 자신의 방에 불이 났다. 자신의 여종이 혼자 자고 있었다. 그녀는 내관들과 함께 불을 껐다. 중종도 그 현장을 둘러봤다. 그러나 상궁 박 씨는 불에 덴 상처로 죽는다. 중종은 상궁 박 씨의 죽음에 부의를 하고 예정된 사냥을 중지했다. 

나인 전 씨는 경복궁의 누각 청연루 아래에 왕실의 재물을 넣어 두는 내탕고에 불이 난 것을 지나가다가 봤다. 사람들을 불러 모아서 크게 번지려고 한 불길을 초기에 잡았다. 왕실의 재산을 지킬 수 있었다. 그녀는 나인에서 상궁으로 수직 상승한다. 

상기(尙記) 윤 씨도 화재진압의 혜택을 본다. 선조 대에 임금의 어실(御室)에 불이 났다. 윤 씨 활약으로 불길을 잡았다. 그렇지 않았다면 큰 일이 일어날 뻔했다. 어실은 임금이 잠깐 쉬는 곳으로 으레 온돌로 돼 있어서 침상아래에 불을 넣어 따스하게 한다. 그녀도 상궁으로 승진을 한다. 


 상궁은 임금의 난처한 입장을 도와서 왕비와의 사이를 좋게 하는 윤활유 역할도 했다. 

숙종은 3명의 왕후를 두었다. 첫 번째 왕후 김 씨는 공주 2명을 낳고 스무 살에 죽는다. 둘째 왕후가 인현왕후 민 씨다. 그러나 숙종은 8년 후 정치적 목적과 장옥정(희빈 장씨)의 콩깍지에 씌여서 왕비 민 씨를 폐하고 서인으로 삼아서 친정으로 쫒아 보낸다. 사흘 후 장희빈을 왕비로 삼겠다는 전지를 내린다. 


숙종이 자신의 허물을 깨닫고 잘못된 콩깍지를 걷어내는 데는 6년의 세월이 걸렸다. 인현왕후에게는 인고의 시간이었다. 

 숙종은 인현왕후에게 직접 편지를 써서 보낸다. “간신에게 조롱당하여 (그대를) 잘못 처분하였다. 그리운 마음이 세월이 갈수록 깊어진다. 별궁으로 옮겨서 만나고 싶다......” 왕후도 바로 답서를 썼다. “옥찰(玉札)을 받들고 감격의 눈물만 나옵니다. 그러나 별궁으로 옮기는 것은 받들 수 없습니다......” 숙종은 다시 편지를 쓴다. “그대의 답장을 열 번이나 펴보고 흐르는 눈물을 막지 못했다......” 숙종은 왕후가 돌아올 수 있도록 옷이나 가마 등 여러 가지 차비를 갖추어 주고 왕비가 궁궐로 돌아오지 못하면 상궁에게 중죄를 묻겠다고 단단히 일러둔다. 왕후는 돌아왔다.


 궁궐에 들어가서 임금과 국가를 위해서 충성을 다하고 그 여생을 편안하게 마무리하는 상궁도 있었다. 상궁 최 씨는 인조의 둘째 아들 봉림대군(효종)이 심양에 인질로 끌려갔을 때 동행한 나인이었다. 다른 나인들은 모두 도망을 갔으나 봉림대군 곁을 지킨 나인은 2명뿐이었다. 한 명은 병사했고 최 씨는 그 임무를 다하고 숙종 대에 81세로 돌아갔다. 숙종은 정성을 다해서 장례를 지내준다. 


상궁 김 씨는 인조 11년에 태어나서 16세에 궁궐에 들어온다. 효종에서 영조까지 다섯 임금을 지켜봤고 왕후들을 모셨다. 영조는 상궁 김 씨를 위해서 정문을 세우고 “나라를 위하여 충성을 다하는 것을 잊을 수가 없다”고 손수 지은 기(記)를 남겼다. 상궁 김 씨는 91세에 인생을 마무리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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