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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현철의 궁궐이야기 (25) 왕의 연침(燕寢) 강녕전 - ① 용비어천가가 울려 퍼지다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알게 된 궁궐
  • 기사등록 2019-06-15 21:3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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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현철 우리궁궐지킴이, 전 KBS PD


경복궁 강녕전. 

  

  경복궁의 정전 근정전을 돌아서 가면 정치1번지 사정전을 만난다. 사정전은 왕과 신하들이 함께 모여 국사를 논하는 곳이다. 그 전각 바로 뒤가 강녕전이다. 태조 4년(1395년) 새 궁궐을 짓고 전각의 이름을 짓게 한다. “새 궁궐은 경복궁이라 한다. 연침(燕寢)을 강녕전, 그 연침의 남쪽을 사정전, 그 남쪽을 근정전이다”고 했다. 오늘날 경복궁을 들어가는 앞 쪽에서 보면 근정전=>사정전=>강녕전의 순서로 배치 된 것이다. 전각의 이름은 정도전이 지었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강녕전을 연침(燕寢)으로 표현하고 있다. 연침은 제비가 자는 곳으로 오해할 수 있다. 연침의 연(燕)은 명사로서 ‘제비’의 뜻이지만 동사로서 ‘잔치하다, 즐겁다, 편안하다’의 뜻도 있다. 강녕전은 바로 앞의 정치 공간 사정전에서 공적인 업무를 마치고 뒤돌아 와서 휴식도 취하고 연회도 베풀고 잠도 자는 등 동사의 의미대로 임금의 몸과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사적인 공간인 것이다. 


 정도전은 전각의 이름을 지어면서 그 뜻풀이도 했다. 강녕전(康寧殿)의 ‘강녕’은 《서경》 홍범구주의 오복에서 따 왔다. 오복은 수(壽), 복(福), 강녕(康寧), 유호덕(攸好德), 고종명(考終命)이다. 강녕은 오복의 중간으로서 임금이 마음을 바르게 하고 덕을 닦아서 황극을 세우게 되면 능히 오복을 향유할 수 있다는 의미로 설명하고 있다. 강녕전의 문은 향오문(嚮五門)이다. 고종 대 경복궁을 새로 영건할 때 그 이름을 지은 기록이 승정원일기에 나온다. 향오는 다섯으로 향한다는 의미로 홍범구주의 오복과 연관 지을 수 있을 것이다.

 


경복궁 향오문.

조선왕조실록에서 강녕전에 대한 첫 기록은 세종 15년에 나온다. 세종이 황희, 맹사성에게 강녕전을 고쳐짓겠다고 한다. 강녕전은 앞으로 계속 사용할 침전인데 낮고 좁고 어두워서 잔글씨를 보거나 정무를 처리하기 어렵다는 것이 세종이 밝힌 이유였다. 태조가 지을 당시에 연침은 7칸으로 기록돼 있다. 현재의 강녕전은 정면 11칸 측면 5칸으로 55칸이다. 이렇게 해서 강녕전은 태조가 지은 38년 후 세종이 다시 고쳐 짓는다. 세종은 새로 지은 강녕전이 마음에 들었던 것 같다. 공사 책임자 상호군 김재 등 3명에게는 각각 말 한 필씩을 상으로 내린다. 그러나 공사에 동원된 군인 강인수는 돌을 뜨다가 불의의 사고를 당했다. 세종은 쌀과 콩을 합해서 10석의 부의금으로 그의 부모와 처자의 마음을 위로했다.

 

세종이 고쳐 지은 강녕전으로 돌아오자 작은 소동이 벌어진다. 시녀가 한 밤에  “뱀이 궁전 안으로 들어와 기둥을 안고 재삼 오르내리더니 홀연히 숨어버렸다”고 세종에게 보고를 했다. 세종은 뱀의 출현을 몹시 괴상히 여겼다. 내시와 시녀로 하여금 불을 밝혀서 그 뱀을 찾게 했다. 세종은 놀라서 궁전 문 밖까지 나갔으나 뱀은 책상 위에 웅크리고 있었다. 세종은 뱀의 출현을 세밀히 분석해서 자연적 재앙, 즉 올해 가뭄이 심하고 햇무리가 나타나고 근정전 옥상에 연기도 아니고 구름도 아닌 기운이 뻗쳐있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나는 현상과 연관 지어서 하늘의 경고로 봤다.


이러한 재앙을 피하는 방법으로는 방위를 옮기는 것이었다. 세종은 둘째 아들 수양대군의 집으로 이어한다. 수양대군의 집은 동쪽에 있었던 것 같다. 세종은 동대문 밖 교외에서 화포 쏘는 것을 구경하고 돌아오면서 수양대군 집에 거처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어릴 때부터 책을 손에서 떼지 않았고 천문 과학을 탐구했던 세종이지만 당시의 자연적 현상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 짐작케 한다. 

 세종은 강녕전에서 그 용도에 맞게 세자나 중전의 생일잔치를 베풀고, 종친 등 가까운 주변 인물들을 위한 작은 잔치도 연다. 또한, 강녕전을 정도전은 연침으로 세종은 침전으로 표현했으니까 여기서 임금께서 주무셨다고 해도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에서 임금의 잠자리에 대한 기록은 아직 찾지 못했다. 더욱더 정확한 사실은 해결해야 할 숙제다.


용비어천가. 사진=네이버이미지 

 세종29년 5월5일 단오날 예조에서 좋은 술 50병과 소, 양, 기러기, 오리 등의 물건을 진상했다. 세종은 이 날 강녕전에서 남녀 재인과 창기로 하여금 용비어천가를 연주하게 한다. 노래는 부르지 못하게 하고 향악과 당악을 관현악으로 연주하게 한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용비어천가의 첫 연주다. 

세종은 용비어천가를 관악기와 현악기의 느리고 빠름을 조절해서 치화평, 취풍형, 여민락 등의 곡을 제작했다. 치화평은 5권, 취풍형과 여민락은 각각 2권씩 모두 악보를 남겼고 공적 · 사적인 잔치에 모두 사용할 수 있게 했다. 이 날 어떤 곡이 연주되었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다. 강녕전에서 관악기와 현악기로 연주한 용비어천가의 선율은 잠시 눈을 감고 상상에 맡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강녕전은 앞마당에 월대를 갖추고 있다. 월대는 돌로 쌓은 단을 말한다. 이 월대에서 음악 연주 등 행사가 가능하다.

 세종이 용비어천가를 구상한 것은 이로부터 5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세종24년 경상도와 전라도 관찰사에게 태조가 고려장군으로서 왜구를 격퇴한 공적을 조사하라고 지시한다. 왜구와 싸운 군마의 수효와 싸움의 회수, 왜구를 공략한 전략이나 함락시킨 모습 등 당시의 목격자 증언을 수집하게 한 것이다. 그 공적을 기록해서 후세에 전하기 위함이었다.

 이러한 자료 수집을 근거로 해서 태조의 4대조 목조가 왕업의 터전을 마련할 때부터 태종대 까지 6명의 선조에 대한 모든 일의 자취를 찾아 모아서 한자가 아닌 나라 말씀으로 기록한 것이 용비어천가다. 세종 27년 권제, 정인지, 안지 등이 10권을 지었다. 편찬한 시가(詩歌)는 총 1백 25장이다.

 용비어천가는 말 그대로 조종의 융성한 덕과 거룩한 공을 노래하기 위하여 지은 것이다. 그러나 이 찬술 내용 때문에 세종은 오히려 신하들에게 곤욕을 치러야 했다. 용비어천가에서 ‘태종은 백만불찰(百萬佛刹)을 하루아침에 혁파하다’라고 태종이 불교의 폐단을 없앤 것에 대해 그 업적을 칭송했다. 그러나 정작 세종 자신은 궁궐 내에 불당을 짓겠다고 승정원에 문서로 하교를 내렸기 때문이다. 승정원, 의정부, 집현전, 육조, 사헌부, 사간원 등 거의 모든 부서와 신하가 임금의 이중적 잣대와 불교의 폐단을 지적하고 궁궐 안의 불당 설치는 부왕의 뜻을 거스르는 불효라고 압박했으나 세종의 옹고집을 꺾지는 못했다. 세종은 결국 경복궁에 불당을 세우고 승려 7명을 둔다. 

 이후의 왕들도 강녕전에서 크고 작은 잔치를 벌였다. 강녕전을 통해서 본 궁궐의 일상은 평온했다. 그러나 중종 대에 강녕전에서 발견된 ‘쥐’로 인해서 커다란 폭풍우가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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