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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현철의 궁궐이야기 (17) 세종, 6진을 개척하다 - 경복궁의 정전 근정전 ③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알게 된 궁궐
  • 기사등록 2019-04-13 19:45:16
  • 기사수정 2019-04-14 07:2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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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현철 우리궁궐지킴이, 전 KBS PD


 세종은 파저강의 승리 6개월 후 국토를 넓힐 수 있는 낭보를 보고 받는다. 

“여진족인 동맹가첩목아의 부자가 사망해서 그의 동생 범찰이 족속을 거느리고 우리 땅에 와서 살고자한다”는 것이다. 세종은 동맹가첩목아의 부자가 사망한 것은 마치 하늘이 멸망시킨 것과 같다고 하면서 황희, 맹사성 등 주요 정승들을 불러서 “그곳의 허술한 기회를 타서 옛 영토를 회복해서 조종의 뜻을 잇고자 한다”고 밝혔다. 세종의 재위 기간에 북방의 영토를 개척한 4군 6진중에서 6진을 개척할 수 있는 기회라는 것이다. 동맹가첩목아 부자의 사망과 6진 개척은 어떤 관계가 있는가?


사진=네이버이미지

 

태조 7년 정도전은 동북면 도선무사의 자격으로 경원부에 성을 쌓는다. 동북면은 현재의 함경남·북도이자 우리 국토의 최북단으로 6진을 둔 곳이다. 태조는 이곳 동북면 화령에서 태어났다. 나중에 동북면 병마사가 돼 원나라의 심양행성 승상 나하추를 물리친 곳이기도 하다. 경원은 동북면 내에 있다. 경원은 원래 알목하(斡木河)라는 호어(胡語) 지명이었으나 조선의 창업이 시작된 경사스러운 곳이라고 해서 ‘경원(慶源)’으로 이름을 바꾼다.


 태종 10년 동맹가첩목아가 다른 여진족들과 함께 경원을 세 차례 침입한다. 조선 백성을 살상하고 소, 말 등을 도둑질해 갔다. 또한 태조의 4대조 무덤인 덕릉과 안릉도 피해를 입었다. 백성들은 농사짓기가 불안해서 경원을 떠나고자 했다. 


 태종은 경원에 부(府)를 둔 것은 능 때문이라고 하면서 능과 부를 옮기면 적의 침입이 없을 것이라고 판단한다. 호조판서 이응이 부(府)를 옮기면 적들이 누에처럼 우리 영토를 갉아먹는 다고해서 반대를 하지만 대부분의 신하가 찬성을 한다. 태종은 두 능을 함주로 옮긴다. 그 후 경원을 점령한 동맹가첩목아도 조선의 보복이 두려워 명나라 개원으로 이주를 한다. 개원은 명황제의 세 번째 황후의 아버지인 김어허출이 사는 곳이다. 경원은 사람이 살지 않는 황무지가 돼버렸다. 


 동맹가첩목아 부자는 또 다른 여진족에게 살해된다. 그래서 그의 동생 범찰이 자신의 족속을 이끌고 방치된 경원에 다시 들어와서 살고 싶다고 조선 조정에 허가를 요청한 것이다. 범찰은 조선 조정과 좋은 관계가 있었다. 그는 세종 초기 토산물을 바치기도 했다. 다른 여진족에게 납치된 명나라 백성을 데려온 적도 있어 조선 조정이 그를 위해서 연회를 베풀어주기도 했다. 

 세종은 옛 영토인 경원에 살고자 하는 범찰의 요구를 거절하고 그 곳에 영북진과 경원부를 옮기고자 했다. 영의정 황희, 좌의정 맹사성 등도 “지금이 국토를 넓힐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말했다. 영북진과 경원부는 후에 6진의 첫 출발이 되는 종성과 회령이 되는데 그 계기가 동맹가첩목아의 사망이었던 것이다.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었다. 보통 군사기지로서 하나의 진(鎭)을 설치하려면 천 가구 이상이 되어야 한다. 경원부는 동맹가첩목아가 침범한 이후로 거의 30여 년 간 방치돼 사람이 살지 않았다. 

 병조에서 대책을 제시했다. 새로 옮기는 경원부와 영북진에 성벽을 쌓고 함길도에서 각각 1,100가구씩 즉 2,200가구를 이주시킨다는 것이다. 관리는 그 지역 사람 중에서 임명하는 토관제도를 실시하고 주민이 부족할 경우에는 충청, 강원, 경상, 전라도 등에서 이주시킨다는 것이다. 사민정책이다. 

이주하는 주민에 대해서는 세금과 노역의 면제나 신분 상승 등 여러 가지 우대 정책도 내 놨다. 함길도 감사 김종서가 경원, 영북진에 입주시킬 2,200가구와 성의 축성 계획을 작성했다. 세종 16년 1월에 인사 부서인 이조에서는 경원부와 영북진의 관리 품계와 인원수도 정했다. 진을 설치하는 기본 골격이 갖추어진 것이다. 


 파저강 승리이후 여진족의 침입은 확연히 줄어들었다. 세종도 여진족에게 가능한 한 은혜를 베푸는 정책을 펼쳤다. 우리의 조정에 와서 토산물을 바치게 하거나 귀화시키는 등 삶의 터전을 마련해 주었다. 그러나 평화는 오래가지 못하고 2년 남짓 만에 깨어졌다. 

 세종 18년 5월 올량합 여진족 5백여 명이 우리 영토에 쳐들어와서 백성 20여명을 납치하거나 죽이고 소, 말 85마리를 도적질 하는 등 인명과 재산에 피해를 입혔다. 이 외에도 간헐적 침범이 있었다. 


세종은 화평정책을 후회한다. 세종은 그들은 짐승과 다름이 없다고 하면서 은혜가 통하지 않음을 절감했다. 그래서 그들을 조선의 백성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마음먹는다.

 세종은 중신뿐만 아니라 4품 이상까지 확대해서 야인을 제어할 계책을 제시하도록 한다. 그 계책을 직접 다 읽어보겠다고 덧붙였다. 이러한 세종의 강력한 의지표명에 97명의 관리가 문서로 대책을 제시했다. 세종은 이 중에서 봉화대 설치 등 시급한 것은 바로 정책으로 실시했다. 필요한 부분을 등사해 평안도 도절제사 이천에게 내려 보내며 좋은 계책을 세우라고 지시 한다. 이 내용은 거의 책 반 권 분량으로 조선왕조실록에 남아있다. 

 

당시의 계책은 오늘의 군사방위에 응용해도 충분할 정도다. 봉화대를 설치하는 등 경계를 철저히 하라, 목책이나 보설치 등 방어를 튼튼히 하라, 군량을 충분히 확보하라, 귀순하도록 유화책을 펼쳐라, 문·무를 겸비한 장수를 임명하라, 간첩을 보내서 적의 정보를 수집하라, 대군으로 일망타진하는 협공작전을 펼쳐라는 내용으로 돼 있다. 군사 배치와 활용방법 등 구체적인 숫자의 작전계획도 있었고 사기진작을 위한 신상필벌 원칙을 제시하기도 했다. 

 특히 적에 관한 정보 탐지가 중요했다. 국경을 침범한 여진족을 통상 야인 혹은 오랑캐라고 했으나 그 내부를 들여다보면 복잡했다. 오량합, 알타리, 홀라온, 올적합, 사롱합, 내이거, 모도호 등 여러 족속들이 있었다. 그들끼리 싸우기도 했고 우리에게 우호적이었다가 갑자기 돌변해서 약탈을 하기도 했다. 두 얼굴이었고 실체를 종잡을 수 없었다. 세종은 우리에게 협조해서 정확한 정보를 주는 여진족에게는 벼슬을 주거나 경제적 혜택을 주는 등 돈을 아끼지 말라고 했다. 

 세종대왕(1397~1450, 재위 31년6개월)


세종은 야인 정벌에 대한 의지를 더욱더 불태웠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세종이 4군이 설치되는 평안도와는 달리 6진이 설치되는 함길도 병마도절제사 김종서에게 취한 행동은 설명하기가 어렵다. 세종은 김종서에게 야인 정벌 계획을 세우라고 하고 비밀리에 군사 훈련을 하라고 하는 등 여러 차례 지시를 내린다. 

김종서는 지시에 따라서 정벌 계획을 세워 보고를 한다. 그러면 세종은 “때가 아니다” “승산이 있겠는가” “군사를 가볍게 일으키지 마라”라고 소극적인 자세를 취한다. 파저강을 정벌할 때의 적극적인 자세와는 딴판이었다. 

 

세종의 마음을 엿볼 수 있는 한통의 편지가 조선왕조실록에 남아 있다. 세종은 네 곳의 진이 설치된 이후 자신이 직접 초안을 하고 세자에게 옮겨 써서 내시를 통해 김종서에게 밀봉의 편지를 전달한다. 세종은 회답도 밀봉으로 보내라고 한다. 조정 대신들이 보지 못하도록 하는 의도일 것이다.(밀봉으로 주고받은 편지가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은 조선왕조실록의 힘이다) 


 세종은 먼저 변경지역 방어에 관해서 조정에서 오고 간 다양한 의견을 털어놓는다. “경원은 목축과 농업을 할 수가 있어서 백성을 옮겨 살도록 해야 한다” “넓은 땅을 오랑캐에게 줄 수 없다” “방어하기가 어려우니 없애자” “남쪽에서 파견하는 군사들은 10명 중에서 8,9명이 말을 팔고 걸어서 간다” “야인을 죽이고 몰아내기 위해서는 우리의 재정이 10년 안에 파탄이 날 것이다” 등등이다. 그러면서 세종은 진을 설치한 실효성과 현지의 민심, 야인 침략을 종식시킬 수 있는가에 대해서 김종서의 솔직한 의견을 구한다. 


 김종서도 밀봉해서 답서를 보낸다. ‘조종(祖宗)이 물려준 땅은 한 뼘도 버릴 수 없다’는 세종의 말씀을 상기하면서 “성곽을 쌓고 갑옷과 군기를 수선하고 군량을 저축하고 군사를 훈련하는 것은 오로지 백성의 편안한 삶을 위한 것이며 진을 설치한 이후 흩어지고 도망갔던 백성들이 돌아 왔다”고 보고했다. 이어 여진의 9성을 평정하고도 참소와 비방을 받아서 화를 당한 고려 윤관 장군 예를 들면서 “무릇 변방에서 일을 건의하는 신하의 충심을 믿어 달라고 죽음을 무릅쓰고 아뢴다”고 글을 맺었다. 세종은 편지를 받고 김종서에게 옷 한 벌을 하사한다.

 김종서가 군사를 일으켜 야인을 정벌하고 6진을 설치한 구체적 내용은 조선왕조실록에 보이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6진은 방어의 요충지에 우리의 백성이나 군사도 다치지 않고 설치가 됐고 옛 땅을 회복했다.

 

세종과 김종서의 관계를 엿 볼 수 있는 내용이 ‘연려실기술(이긍익, 조선후기)’에 기록돼 있다. 세종은 “비록 내가 있고 김종서가 없었고, 반대로 김종서가 있고 내가 없었다면 이 일(6진 개척)을 주장하지 못했을 것이다”라고 밝혔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세종이 국가의 영토, 백성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려 노심초사한 흔적이 그대로 기록돼 있다. 세종 15년 야인이 크게 침입해서 4군6진이 본격적으로 설치되는 세종 19년까지 세종이 야인(여진족)문제를 처리하기 위해서 신하들과 머리를 맞댄 회수는 필자가 확인한 것만으로도 500 건이 넘는다. 그 양도 압도적으로 많지만 질도 높이 평가할 수 있다. 세종의 이러한 노력과 의지가 왜 선조(임진왜란)와 인조(병자호란)까지 이어지지 않았는지를 두고 역사를 되돌아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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