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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현철의 궁궐이야기 (16) 세종, 파저강 승전 축하연을 열다 - 경복궁의 정전 근정전 ②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알게 된 궁궐
  • 기사등록 2019-04-06 21:28:00
  • 기사수정 2019-04-07 13:4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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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현철 우리궁궐지킴이, 전 KBS PD


  세종15년 5월 경복궁 근정전에서 잔치가 베풀어졌다. 잔치의 초대자는 세종임금이고 주인공은 파저강 정벌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우의정 최윤덕을 비롯한 지휘관 5명과 전 상호군 서침을 비롯한 128명의 군관들이었다. 왕세자 및 종친, 왕명을 출납하는 대언 등은 축하자로서 참석했다. 조선이 건국한 이후 야인이라 불렀던 여진족 정벌에서 승리한 장수들을 위로하는 자리였다. 참석자들은 임금이 하사한 새 옷도 입었다. 세종은 지휘관들에게 일일이 술을 따라주었다. 참석자들은 춤도 췄다. 우리의 역사에서 왕이 주재하는 매우 드문 승전 축하연이다. 조선왕조실록에 남아있는 소중한 역사의 기록을 따라가 보자.


경복궁 근정전 (국보223호 ) 

 

세종 14년 12월 평안도 도절제사로부터 한 통의 보고가 조정에 올라온다. “홀라온 올적합의 군사 1백여 명이 우리 땅에 침입해서 백성 64명을 사로잡아 돌아가는 것을 이만주가 군사 6백여 명으로 그 도적을 쳐서 우리의 백성을 안전하게 보호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보고서에서 언급된 홀라온 올적합, 이만주는 같은 여진족이다. 이만주는 올량합의 지도자이다. 

 세종 6년 조선의 국경 저편에 몽고군인 달단군(韃靼軍)의 침략으로 이만주와 그의 부족 1천 여 가구가 남하해서 파저강까지 온다. 그들은 파저강 다회평에 살아도 좋다는 명나라 황제의 성지를 갖고 있었다. 파저강은 북쪽으로는 요하로 흘러가고 남쪽으로는 압록강으로 흘러들어온다. 조선과 명나라 국경 사이에 있는 지대다. 이들 외에도 조선의 북쪽 국경선에는 알타리, 오도리 등으로 불리는 여러 여진족들이 살고 있었다. 

 조선은 파저강과 주변의 산과 들에 흩어져 사는 여진족들을 ‘야인’ 혹은 ‘파저강의 도적’으로 불렀다. 이들은 명나라의 신분증에 해당하는 인신(印信)을 갖고 있었고 사용하는 말은 우리와 달랐다. 


 조선은 그들에 대한 문서의 기록이 없었기 때문에 그 정체를 정확히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야인이 오면 어루만지고 도망가면 쫓지 아니해서 횡포를 부리지 못하도록 하는’ 즉 ‘모기처럼 물면 쫓아내는’ 소극적인 방어정책을 취했다. 조선 초기에는 이들에게 식량을 주거나 벼슬을 주어서 귀화를 시키는 등 유화정책을 펼치기도 했다. 그러나 차츰 이들은 강을 건너서 우리의 영토에 침입해서 식량 등을 자주 도적질을 했고 인명 피해까지 입혔다. 골치 아픈 존재가 되고 있었다. 


 세종은 백성의 재산과 생명을 지켜야 했다. 식량을 주거나 벼슬을 내리는 등 임기응변식 대응에는 한계가 있었다. 세종 15년 1월 국경 방비에 소홀한 평안도 도절제사 문귀를 최윤덕으로 교체한다. 세종은 야인을 정벌하겠다는 자신의 속내를 최윤덕에게 밝히고 시기와 군사의 움직임을 준비하라고 지시한다. 

 세종은 우선 정보를 수집한다. 전 소윤 박호문과 호군 박원무를 야인들이 사는 곳에 파견해 도적질의 진위와 내용, 산천과 도로의 지세를 자세히 살피게 한다. 조정 회의를 소집해서 중신들에게 야인 토벌에 대한 계책을 제시하도록 한다. 이 날 발언자는 영의정 황희를 비롯한 22명이었다. 조정의 거의 모든 지혜가 망라되었고 유화책과 기습 공격 등 다양한 계책이 제시되었다. 세종은 비서실장인 안숭선에게 이 날 발언내용을 모두 밀봉하라고 지시한다. 회의에서는 정벌의 움직임을 알아채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계책도 있었기 때문이다. 

 두 번째 작전회의가 열렸다. 병장기, 갑옷, 투구 등 군사 장비는 충분한가? 군사의 총지휘관을 누구로 할 것인가? 기병과 보병은 얼마로 할 것인가? 강을 건널 때 부교(浮橋)를 쓸 것인가? 부교는 적들이 정벌을 눈치 채지 못하도록 몰래 설치할 방법이 있는가? 등이 회의 주제였다. 세종은 회의 내용을 정리하고 사람을 시켜서 현지의 최윤덕에게 전달한다. 이 후에도 몇 차례 더 작전회의가 있었다. 또한 파저강 현지를 갔다 온 박호문의 정보가 더해져서 작전내용이 더 충실해졌다.

 

세종 15년 3월 지신사 안숭선이 성죄방목의 초안을 작성한다. 성죄방목은 야인들이 저지른 약탈행위를 낱낱이 적어서 우리의 정벌이 정당하다는 것을 알리는 포고문이다. 병조에 지시해서 평안도와 황해도 감사에게 군사출동을 의미하는 좌부(左符)도 보낸다. 

 출정하는 장졸들에게는 교서를 반포한다. 교서는 세 부분으로 나누어졌다. 총 지휘관 최윤덕에게는 백성의 재산과 생명을 지켜야 하는 임금의 마음을 헤아려서 군율을 엄격히 해서 적을 토벌하라고 한다. 그 아래의 지휘관들에게는 최윤덕의 지휘아래 힘을 합해서 백성의 소망에 보답하라고 하고, 군관과 병사들에게는 용맹을 보여주라고 하면서 성과보상을 약속한다.

 명나라와 외교문서도 교환해서 야인 정벌의 정당성도 확보했다. 군사는 최윤덕의 건의에 따라 평안도에서 마병과 보병 1만, 황해도 군마 5천 등 모두 1만4962명이었다. 모든 준비는 끝났다.

 파저강 전투 당시 평안도 도절제사였던 최윤덕. 파저강 승전 공로로 우의정에 올랐다. 사진=네이버이미지 


세종은 신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온천을 떠난다. 세종은 최근 3개월 동안 거의 매일 야인 정벌 문제에 매달렸다. 야인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조정 중신들과 계책을 세웠으며 현지와 소통했다. 때로는 새벽까지 회의를 했다. 야인들이 낌새를 채지 못하도록 그들에게 술과 음식도 대접하는 양동작전도 폈다. 치밀한 작전계획도 짜서 최윤덕에게 넘겼다. 세종은 후방에서 할 수 있는 역할을 다했다. ‘나무 열 그루를 베야 별 하나를 본다’는 험준한 지형의 전투를 서울에서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없었다. 이제부터는 파저강 현지의 총 지휘관인 최윤덕의 역할에 달린 것이다.


 최윤덕은 세종이 온천을 떠난 보름 후 정벌을 시작한다. 군사를 7곳으로 나누어서 여러 군데 흩어져 있는 야인 들을 한꺼번에 공격했다. 조정 회의에서 중요하게 생각했던 기습 전법을 사용했고 9일 만에 정벌이 이루어졌다. 286명을 생포하고 183명을 살상했으며 소, 말, 활 등 많은 노획물을 얻었다. 파저강의 야인세력은 크게 무너졌다. 우리의 인명피해는 29명에 불과했다.

 세종은 정벌에서 전공을 세운 지휘관들은 승진시켰고 좌군 절제사 최해산은 파면했다. 그는 최윤덕의 명령대로 행동하지 않았고 전과도 거의 없었다. 전사자의 초혼제를 지내 주고 병사들에게는 양식을 주고 부역이나 조세를 면제해 주는 보상을 했다. 예조의 주관으로 야인 토벌의 승전을 종묘에 고한 뒤 백관들이 참석하는 성대한 조하(朝賀)의식을 치르기도 했다. 승전 소식이 전국으로 펴져서 경기, 충청, 경상, 전라, 평안, 함길도 감사로부터 야인 평정의 축하 전문도 올라왔다.

 세종도 크게 기뻐했으나 속으로는 두려움이 남아 있었다. 이번 정벌로 야인들을 완전히 뿌리 뽑은 것은 아니었다. 세종은 영의정 황희, 좌의정 맹사성 등 주요 중신들과 현재의 승리를 지켜서 영원히 후환을 없애는 방도를 찾고 있었다.(계속)

 

  



*호부(虎符) : 조선시대 군사를 출동시킬 때 사용하는 병부(兵符). 한 면에는 「발병(發兵)」 다른 면에는 「모도관찰사(某道觀察使)」 또는 「모도수륙절제사(某道水陸節制使)」라고 쓰고 그 가운데를 쪼개어서 우부(右符)는 그 책임자에게 주고 좌부(左符)는 중앙의 상서사에 두었다가 임금이 군사를 출동할 때 이 좌부를 내려 보내어서 우부와 맞추어서 군사를 움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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