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왕현철의 궁궐이야기(15) 경복궁의 정전 근정전① - ‹어진 사람을 찾는데 부지런하라› -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알게 된 궁궐
  • 기사등록 2019-03-30 17:20:04
  • 기사수정 2019-03-30 17:27:40
기사수정

제 1차 왕자의 난과 정종의 근정전 즉위식  

 ↳ 왕현철 우리궁궐 지킴이, 전 KBS PD 


  경복궁의 세 번째 문 근정문을 들어서면 우뚝 솟은 전각이 보인다. 근정전이다. 근정전에는 너른 마당이 펼쳐져 있어서 탁 트인 느낌이 들고 뒤의 백악산을 병풍으로 해서 그 처마가 하늘에 맞닿아 있다. 학이 날개를 편 형상으로 위엄이 돋보인다. 겉은 2층으로 보이지만 안은 내부가 뚫려있는 통층 구조다. 임금의 어좌가 일월오봉도를 배경으로 전각의 한 가운데 놓여 있는 경복궁의 중심 건물이다. 

근정전을 정전(正殿)이라고 한다. 태조 4년(1395) 경복궁을 준공하면서 “정전은 5칸(間)으로 상하층의 월대(越臺)와 동, 서, 북의 세 곳에 계단이 있으며 조회를 받은 곳이다”고 설명하고 있다. 


 정도전은 근정전(勤政殿)을 임금의 부지런함으로 설명하고 있다. 임금은 “아침에는 정사를 듣고, 낮에는 어진 사람을 찾아보고, 저녁에는 법령을 닦고, 밤에는 몸을 편안하게 한다. 어진 사람을 구하는 데에 부지런하고 어진 사람을 쓰는 데 빨리 한다”라는 의미의 근정전 이름을 지어 올렸다. 임금은 훌륭한 인재를 구하기 위해서 부지런해야 한다는 것이다. 조선왕조에서 근정전은 임금의 부지런함을 어떻게 지켜봤을까? 


 태조 7년 조선의 제2대 임금 정종은 경복궁 근정전에서 왕위에 오른다. 왕의 즉위식은 국가의 중요한 행사다. 그럼에도 조선왕조실록은 그 즉위를 아주 짧게 묘사하고 있다.

 태조는 “세자에게 왕위를 전해 주니, 좌· 우정승은 힘을 합하여 정치를 도와서 큰 왕업을 퇴폐시키지 말게 하라”고 양위교서를 내린다. “이에 좌·우정승은 국새인 전국보(傳國寶)를 받들고 세자와 함께 근정전에 이르렀다. 세자가 강사포와 원유관으로 바꾸어 입고 왕위에 올라 백관들의 하례를 받았다. 이름을 경(曔)으로 고쳤다.” 이것이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정종의 즉위 내용이다. 

 

태조가 정종에게 왕위를 넘겨준 것은 양위다. 순탄하게 왕위를 넘겨준 것이다. 그럼에도 정종은 국새를 전달받고 왕위에 올라 백관의 하례를 받았다는 내용뿐이다. 즉위식과 연관되는 여러 가지 절차나 형식 등은 보이지 않는다. 왜 그럴까? 사실 정종의 즉위식은 열흘 전에 일어났던 제1차 왕자의 난을 살펴봐야 그 까닭을 알 수 있다.


경복궁 근정전 (국보 제 223호) 

 

태조는 1392년 7월 17일 조선을 건국하고 20여 일 후 둘째 부인 강 씨를 현비(顯妃)로 삼고 세자를 정하려고 한다. 정부인 신의왕후 한 씨는 조선 건국 1년 전에 돌아갔다. 조선을 건국하는데 핵심 공신인 배극렴, 조준, 정도전은 “시국이 평탄하면 적장자를 세우고 세상이 어지러우면 공이 있는 자를 세워야 한다”고 했다. 이 기준에 따르면 태조의 정부인 한 씨의 아들 들이 세자 후보가 된다. 

조선 건국 후 태조의 곁을 지킨 현비 강 씨가 이 이야기를 듣고 운다. 그 소리가 밖에까지 들렸다고 한다. 자신의 자식은 세자에서 배제되기 때문이다. 세 사람은 그날 더 이상 세자 이야기를 꺼내지 못하고 나온다.(동각잡기 상)  

 

세 사람은 “만약 강 씨가 낳은 아들을 세자로 한다면 강 씨의 첫째 아들 방번은 광망하고 경솔하여 볼품이 없으므로 막내아들이 조금 낫겠다”라고 따로 모여서 의논을 한다. 태조가 다시  배극렴 등을 불려서 “누가 세자 될 만한 사람인가?”라고 묻자 “막내아들이 좋습니다”라고 자신들이 처음 제시한 기준에 대해서는 입도 벙긋하지 않는다. 11살에 불과하고 공도 세우지 않은 방석이 세자가 된 것이다. 사관은 “장자로서 공로가 있는 사람이 세자가 되어야 한다”라고 간절히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고 세 사람을 꼬집었다.


 이 결정은 큰 불씨였다. 태조가 나라를 세울 때 공을 많이 세운 정부인 자식들이 시퍼렇게 눈을 뜨고 있었기 때문이다. 태조도 때 늦은 후회를 한다. 태조는 정종에게 물려주는 양위교서에서 “적자의 맏아들을 세자로 하는 것은 만세의 기본 도리다. 내가 이 원칙을 지키지 않고 사랑에 빠져서 의리에 밝게 하지 못한 것은 허물이다. 그리고 신하들이 더욱더 간하지 못한 책임도 있다”고 자신의 잘못과 신하의 탓으로 돌렸다.

 드디어 운명의 날이 왔다. 태조 7년 8월 26일이다. 방석이 세자가 된 6년 후다. 정안군(태종)은 어머니가 다른 작은 아버지 이화로부터 비밀을 전해 듣는다. 정도전, 남은, 심효생(방석의 장인) 등이 태조의 병문안을 핑계로 해서 여러 왕자들을 경복궁으로 불러들여 죽일 계획을 꾸민다는 것이다. 


 정안군은 목숨을 건 결단을 내려야 했다. 정안군과 그의 형제들, 평소에 뜻을 같이 한 문·무관 그리고 이숙번이 모였다. 기병, 보졸, 노복 등 30여 명이 안 되는 소수인원이었다. 창이 주요 무기였으나 절반은 막대기를 쥐고 있었다. 군호를 ‘산성(山城)’으로 정했다. 정안군은 결심은 했지만 구체적 행동계획은 없었다. 이숙번에게 물었다 “어찌하면 좋겠는가?” 이숙번의 행동지침은 명쾌했다. “간당(姦黨)이 모인 곳을 포위하고 불을 질러 죽여야 합니다.”

 방석도 정안군의 움직임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광화문에서 남산에 이르기까지 정예 기병이 꽉 찼다’는 예빈소경 봉원량의 잘못된 보고에 방석은 두려워서 싸울 엄두를 내지 못했다. 정안군 편의 사람들이 ‘신의 도움’이라고 했다. 태조는 밤새워 몸져 누워있었다. 누구에게도 보고가 없었다.  

 첫 희생자 그룹은 남은의 첩 집에서 술을 마시고 있던 정도전, 심효생, 남은이었다. “한 고조가 장자방을 쓴 것이 아니라, 장자방이 곧 한 고조를 쓴 것이다”라고 조선의 설계사로서 자부심이 가득한 정도전은 정안군에게 “살려주소서” 한마디를 남기고 쓰러졌다. 정도전의 세 아들도 아버지와 운명을 같이한다. 

그러나 나머지 한 명 정진은 살아남아서 지역근무를 자청했고 평판이 좋았으며 형조판서까지 오른다. 67세까지 살았고 두 명의 자식을 둔다. 대를 이은 것이다. 이 외에도 방석의 편에 선 궁궐 수비대장 박위를 비롯한 10여 명이 살해되었다. 

 

왕자의 난의 불씨가 된 세자인 방석과 그의 형 방번은 유배 도중 죽임을 당한다. 방번은 살 기회가 있었다. 정안군이 행동을 같이 하자고 권했으나 방번은 오히려 자신이 세자가 될 수 있다는 허망된 꿈을 품고 거절했다. 

 

왕자의 난으로 느닷없이 세자와 왕이 되는 영안군(정종)은 무엇을 했을까? 그는 당일 소격전에서 부왕의 건강을 빌고 있다가 변고를 들었다. 그는 종 한 명을 데리고 성을 몰래 빠져 나와 김인귀의 집에 숨어서 사태를 관망한다. 그럼에도 그는 맏형이라는 이유로 넝쿨째로 굴러 온 호박을 안게 된다. 정안군이 사람을 시켜서 그를 찾아내어 세자에 오르기를 청하기 때문이다. “나라의 근본을 정하고자 한다면 마땅히 적장자에게 있어야 한다”는 것이 이유였다.

 임금인 태조는 병환 중이었고 난을 주도한 다섯째가 사실상 장남인 둘째 형을 세자로 추대했다. 이 때 첫째 진안군 방우는 죽고 없었다. 그의 졸기에 따르면 “소주를 마시고 병이 나서 죽었다”고 돼 있다. 진안군은 소주와 세자(임금) 자리를 맞바꾼 셈이다. 


 정안군은 다음 날 백관을 거느리고 태조에게 소(疏)를 올린다. “영안군을 세자로 삼게 하소서.” 태조는 한참 만에 입을 연다. “모두 나의 자식이니 어찌 옳지 않음이 있겠는가?”

방석을 돌아보면서 “너는 편리하게 되었다”라고 하면서 윤허한다. 방석은 곧 불귀의 객이 된다. 태조는 열흘 후 정종에게 왕위도 넘긴다. 정종은 열흘 동안 전혀 예상하지 못한 가운데 세자가 되고 왕이 되었다. 어수선한 상황에서 즉위를 한 것이다. 격식을 갖춘 즉위식은 언감생심이었을지도 모른다.


 제1차 왕자의 난에서 정종에게 왕위를 넘기는 열흘 동안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태조가 정무를 처리한 흔적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임금이 서쪽 침실에 거처하니 병이 조금 차도가 있었고, 또한 수정포도(水精葡萄)를 먹고 싶어 해 구해 온 신하에게 쌀 10석을 내리고 병이 조금 호전되었다.” 태조의 병과 먹고 싶은 것, 인사에 대한 기록이 약간 있을 뿐이다.

 태조도 양위교서에서 자신이 물러나는 이유를 명백히 했다. “병이 있고 여러 가지 사무가 많고 복잡해서 정사에 부지런하기 어려워 빠뜨려진 것이 많을까 염려된다”고 했다.

 

정도전은 임금은 어진 인재를 구하는 데 부지런해야 한다고 근정전의 이름을 남겼다. 태조는 정사에 부지런할 수 없어서 근정전을 스스로 물러났다. 근정전은 600여 년 전 그 자리에서 변함없이 우리를 굽어보고 있다. 오늘날 우리는 무엇에 부지런해야 할까? (계속)



<저작권자 이슈게이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
기사수정

다른 곳에 퍼가실 때는 아래 고유 링크 주소를 출처로 사용해주세요.

http://issuegate.com/news/view.php?idx=4377
기자프로필
프로필이미지
Warning: include_once(../news/side_banner_menu.php): failed to open stream: No such file or directory in /home/issuegate.com/www/skin/news/basic/view.skin.php on line 394 Warning: include_once(): Failed opening '../news/side_banner_menu.php' for inclusion (include_path='.:/usr/share/pear:/usr/share/php') in /home/issuegate.com/www/skin/news/basic/view.skin.php on line 394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