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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동한 DM(dream making)리더십포럼이사장, 전 세계일보 사장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며는/ 삼각산이 일어나 두둥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 날이/ 이 목숨이 끊기기 전에 와 주기만 할량이면/ 나는 밤하늘에 나르는 까마귀같이/ 종로 인경을 머리로 들이 받아 울리 오리다/두개골은 깨어져 산산조각 나도/기뻐서 죽사 오매 오히려 무슨 한이 남으오리까''


심훈의 '그날이 오면' 시의 전반부이다. 조국광복을 열망하는 민족의 일제에 대한 저항정신이 담겨있다. 심훈은 1901년 서울 노량진에서 조상숭배 정신이 철저한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본명은 대섭(大燮) 아명은 삼준, 호는 해풍(海風)이다. 중국 유학 시절에는 백랑, 귀국 후에는 훈이라고 불렀다. 1915년 경성제일고보에 입학했으며1917년 전주이씨와 결혼했으며 제일고보 4학년 재학 중 3·1 만세시위 운동에 가담했으며 일경에 체포되어 구금되었다가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그 후 중국으로 망명해 남경, 상해를 거쳐 항주에 이르러 지강 대학 국문학과에 수학했다. 1923년 귀국해 극문회를 조직했다. 1932년부터 동아일보 조선일보 기자를 했으며 1933년 장편 '영원의 미소'를 중앙일보에 연제했으며 1935년 장편 '상록수'가 동아일보 현상 모집에 당선되어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그는 36세를 살았지만 시인, 소설가, 언론인, 영화인으로 알려졌으며 일제의 압박에 저항하는 독립정신이 불타오른 청년이었다. 그는 충남 당진에서 일제의 압박에 신음하는 민족의 통한을 시와 소설로 표현하는 글을 썼다. 1936년 서울대 병원에서 장티푸스로 사망했다. 



 유고집 '그날이 오면'은 그가 세상을 떠난 후 1949년 발행됐다. 심훈이 서대문 감옥에 있을 때 쓴 시에는 옥중에서 죽은 시체를 옥중 동지들과 함께 옮기면서 쏟아지는 비를 맞고 무학재를 넘어가면서 ''산 송장들이 옷을 벗어 죽은 송장이 추울까 덮어주었다''고 한 구절이 있다. 심훈 시인은 처절한 참극의 옥고를 겪으면서 일제의 폭정에 항거했으며 조국 광복의 그날을 애타게 열망했다. 

그는 '그날이 오면' 시를 통해 조국광복의 그날이 오면 인경에 부딪쳐 두개골이 깨져 죽어도 좋고 몸의 가죽을 벗겨 북을 만들어 치고 싶다고 절규했다. 그처럼 비절참절하게 열망했던 그날을 우리는 지금으로부터 74년 전에 맞았다. 감격의 해방과 만세소리가 삼천리강산에 진동한지 74년이 흘렀지만 남북은 분단되어 있고 북한엔 3대 세습 공산독재가 계속되고 10만여 명이 사상범으로 감옥에 갇혀있고 고난의 노예 행군을 하면서 주민의 고혈로 핵무기를 만들어 세계를 겁박하고 있다. 

남한은 어떤가. 하늘이 보호하고 미국이 도와 동란의 참상을 극복하고 경제부흥을 이룩했다.

그러나 일제의 잔재를 청산 못하고 자유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인민민주주의 종북 세력을 말소하지 못했다. 3·8 분단선에는 끝없는 도발이 계속되고 남남갈등은 권력투쟁 거리시위로 국력을 낭비하고 망국적 자해행위가 계속되고 있다.

대통령이 3·1절 100주년 기념사를 하면서 '빨갱이'라는 색갈론을 끝내야 한다는 말을 아직도 하고 있다. 선조들의 처참한 희생의 피로 찾은 조국광복 그 날을 맞은 후 74년을 이 땅에 살고 있는 너와 나와 우리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우리가 사람인가? 금수인가? 나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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