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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현철의 궁궐이야기 (7) 세종대왕, 집현전에 물어보다 ③ - -<조선왕조실록>을 통해서 알게 된 궁궐
  • 기사등록 2019-02-02 21:15:00
  • 기사수정 2019-02-03 22:4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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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은 즉위 12년(1430) 12월 아침 회의에서 신하들의 보고를 받은 뒤 자신의 사랑 이야기를 꺼낸다. 

“내가 일찍이 조모(趙慕)의 딸을 궁중으로 들여오고 싶은 생각이 있었다. 나와 그녀는 7촌이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세종은 “지금 5, 6촌끼리 서로 결혼하는 사람이 있느냐”고 신하에게 묻는다. 고려 시대의 가까운 친족끼리 결혼 풍습이 아직도 남아 있는가에 대한 우려에서였다. 세종은 집현전(集賢殿)으로 하여금 “옛 제도를 상고하여 아뢰게 하라”고 지시를 내린다. 

 

세종은 인사행정을 맡은 고위 관리 자제가 관직을 맡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 제도의 하나로 ‘시중(侍中)이나 상서의 자제는 관리가 될 수 없다’는 법을 세우고자 했다. 까닭이 있었다. 세종은 예전의 상피제도(相避制度)와 태종 대의 분경금지법(奔競禁止法)을 좀 더 명확하게 하고 싶었던 것이다. ‘분경(奔競)’은 권세 있는 사람을 분주히 쫒아가서 벼슬을 얻는 것을 말한다. 즉, 분경금지법은 인사청탁금지법이다. 

 세종은 상정소의 책임자인 맹사성과 권진을 불렀다. 세종은 ‘시중(侍中)이나 상서의 자제는 관리가 될 수 없다’는 법을 세우고 싶다는 자신의 뜻을 두 사람에게 설명하고 집현전에 옛 제도를 조사시켰다고 밝혔다. 자신의 뜻이 확고함을 두 사람에게 주지시킨 것이다.

 

다만 세종은 인사행정을 담당하는 고위 관리의 자제가 관리가 될 수 없는 범위에 대해선 두 사람이 정하라고 공을 넘긴다. 두 사람은 우수한 인재 확보와 상피제도의 취지를 살려서 시중이나 상서의‘ 4촌’까지의 자제는 관리가 될 수 없음을 제안하고 세종은 받아들인다. 

 세종은 이처럼 신하들과 국정을 논의하면서 내용을 잘 모르는 경우는 집현전에 옛 제도를 조사시키고, 또한 자신이 펼치고 싶은 정책은 집현전의 옛 제도 조사결과를 보고 받은 후 담당 부서의 책임자를 불러 자신의 뜻을 밝혔다. 

 


세종은 신하들과 논쟁적인 토론을 할 때도 궁극에는 집현전을 활용한다. 

 세종 14년 법률 조항을 이두로 번역해서 반포하게 하는 것을 아침 회의 주제로 올렸다. 세종은 백성들이 법률을 알면 사전에 범죄를 저지르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이조 판서 허조의 생각은 달랐다. 허조는 백성이 법률을 알면 법의 맹점을 파악해서 법을 제 마음대로 농간하는 무리가 있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세종과 허조의 토론이 이어진다.  

세종 : 백성에게 법을 알지 못하도록 하고 법을 어겨서 죄를 주는 것은 조삼모사와 마찬가지로 술책이다. 

허조: 백성이 법을 알면 소송이 그치지 않을 것이고 윗사람을 능멸하는 폐단이 심할 것이다.

세종은 허조의 생각을 존중해서 바로 결론을 내리지 않고 집현전으로 하여금 백성이 옛날에 법을 어떻게 익혔는지 제도를 조사해서 보고하게 한다. 세종은 사실 백성이 법의 무서움을 알아서 죄를 짓지 않는 것이 상책이라는 소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지만 세종은 시간이 걸리더라도 집현전을 활용해 옛 제도와 근거를 충분히 조사해서 납득시키는 방법을 애용했다. 세종은 집현전을 설립목적에 맞게 국정 자문기구로 제대로 활용했다.  

 

세종은 그동안 책읽기를 채근한 집현전에 국정자문뿐만 아니라 백성들에게 필요한 서적 출판도 주문한다.

 세종 10년 진주사람 김화가 자신의 아버지를 살해했다는 보고를 받는다. 세종은 깜짝 놀라서 얼굴빛이 변하고 스스로에게 자책을 한다. 세종은 바로 신하들을 소집해서 효를 돈독히 하고 풍속을 바로 잡는 대책회의를 한다. 그 결과 <효행록>등의 서적을 편찬해서 반포하기로 하고, 그 업무를 집현전에 맡긴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삼강행실도>다. 집현전 부제학 설순의 주도로 편찬 작업이 이루어진 <삼강행실도>는 중국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효자· 충신·열녀의 각각 100명을 찾아내서 일반 백성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그림과 사실 그리고 시(詩)를 덧붙인 것이 특징이다. 


<향약집성방> 편찬을 주도한 곳도 집현전이다. <향약집성방>은 세종의 강력한 의지와 집현전의 철저한 자료수집으로 이루어진 결실이다. 세종은 북경에 사신을 보낼 때 의관(醫官)을 같이 보내서 중국의 의학서적을 널리 구하게 한다. 국내자료는 집현전 직제학 유효통 등에게 지시를 해서 우리의 의학서적을 찾아내서 분류하게 한다. <향약집성방>은 중국과 국내의 의서를 망라해서 1년여의 노력 끝에 85권으로 완성했다. 


이 책은 1,476조의 침구법(針灸法) 등을 담은 종합적인 의학서이다. 종래의 병의 증상을 338가지에서 959가지로 확대 분류하고 그 처방을 2, 803가지에서 3배가 넘는 10,706가지로 대폭 늘였다. 이 책 덕으로 병의 증상을 이전보다 훨씬 다양하게 진단하고 그에 맞는 처방을 획기적으로 개선할 수 있게 됐다. 무엇보다 이전의 의학서와 달리 이 땅에서 자라는 풀과 나무에서 약재를 구해서 병을 치료한다는 원칙에 충실했다. 신토불이의 원조 격이다. 사람이 병들면 구하기 어려운 중국의 약을 찾는 안타까움을 줄인 것이다. 집현전은 후에 더욱더 방대한 의학서인 365권의 <의방유취>도 완성한다. 


 집현전은 이외에도 <통감훈의><국어><음의><속등록><지리지><치평요람><사륜전집><사륜요집><동국정운><황극치평도>등을 편찬하고 <강목>·<통감>149권을 찬술했으며 <운회(韻會)> <논어><대학><맹자><중용>등을 언문으로 번역했다. 세종이 집현전을 설립하면서 문풍을 진흥시키겠다는 초기의 목적도 이룬 셈이다. 


세종은 집현전을 통해서 인재를 키우고 국가의 당면 과제를 해결했다. 집현전은 그 후 세조의 왕위 찬탈에 항거해서 일으킨 단종복위 운동에 집현전 출신 학자들이 많다는 이유로 세조에 의해 폐쇄된다. 그러나 집현전 출신 학자들은 세조 대뿐 아니라 성종 대까지 국가의 동량으로서 활약한다.  

집현전을 통해 미래를 준비한 세종의 혜안이 돋보인다. 경복궁 수정전을 돌아보며 책과 씨름하는 집현전의 모습을 떠올려보자. 깊고 그윽한 책의 향기가 전해올지도 모른다.


왕현철 우리궁궐지킴이, 전 KBS PD



*조모(趙慕) : 태조를 도운 개국 공신이자 태조의 초대 경호실장인 한평 부원군 조연의 맏아들이다. 태조는 “비록 내실이나 임금의 처소에라도 마음대로 출입하라”할 만큼 조연을 신임했다.  

조모는 아버지 덕택에 음서로 등용되어 태종 대 세자의 활쏘기 스승인 세자시사관(世子侍射官)에 임명된다. 세종이 조모의 딸을 7촌이라고 한 이유는 조모의 할아버지가 태조의 여자 형제와 결혼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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