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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또 다른 충무공, 김응하 장군을 아시나요? - 왕현철 전 KBS PD/ 왕PD의 토크멘터리 <조선왕조실록>저자
  • 기사등록 2022-07-16 11:36:03
  • 기사수정 2022-07-21 19:5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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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응하 장군 묘비. (철원군화지리 포충사) 비문은 좌의정 송시열이 짓고 글씨는 사헌부 지평 박태유가 썼다.  왕현철  




조선에서 충무공으로 시호를 받은 분은 모두 아홉 분이다. 

이 중에서 이순신 장군은 충무공을 대표하고 우리의 뇌리에 깊이 박혀있다. 임진왜란 때 세운 혁혁한 공로로 충무공을 하사받았기 때문이다.  

 

충무忠武는 사후의 공적을 평가해서 시법諡法에 따라서 내리는 시호諡號다. 시호는 사람의 일생을 압축해서 2~3자로 표현하기 때문에 엄격한 절차를 거쳐서 정한다. 시호가 내리면 공公을 덧붙인다.

 시법에서 ‘충’은 임금을 섬기는 데 절의를 다한 것이고 ‘무’는 적을 꺾고 침략을 막아 낸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즉 ‘충무’는 임금(나라)에 대한 충성과 혁혁한 무공을 세운 분에게 내리는 시호로 무인에게 내리는 최고의 명예이다. 

 

조선 초기의 개국공신 조영무가 최초로 충무공 시호를 받았다. 임진왜란 때 진주성을 승리로 이끈 김시민 장군도 충무공의 시호를 받았다. 위에서 언급한 세 분(조영무, 이순신, 김시민)은 교과서나 TV 등에서 소개되어 잘 알려져 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조선의 충무공들이 있다. 세조 때 귀성군 이준과 남이 장군, 인조 때 삼도 통제사 이수일, 병조판서 구인후, 정묘호란 때 부원수 정충신 등도 충무공 시호를 받았다. 광해군 때 활동한 김응하 장군도 충무공 시호를 받는다. 

 




이중에서 김응하 장군을 소개하려고 한다. 

그의 공적은 일반인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조선의 여러 왕들도 높이 평가를 하고 있고, 개인문집에도 소개되고 있다. 

또한 명나라에서도 그의 공적을 기려 ‘요동백’의 시호를 주었다. 이뿐만 아니라 그의 전쟁 상대였던 후금까지 그의 용맹을 높이 평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응하 장군.  네이버이미지 




그는 어떤 활약을 했을까? 

 광해군 10년(1618) 국경의 북쪽 너머가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조선 초기 정벌과 회유책으로 달래던 여진족이 서서히 큰 세력이 되면서 간헐적으로 우리의 국경을 침범했다. 그 중심인물은 추장 누르하치였다. 

 

누르하치는 주변 다른 부족을 쳐서 명나라로부터 용호장군이라는 칭호까지 받는다. 그는 세력을 넓혀갔고 목표물은 중원이었다. 그는 부족들의 통합된 힘으로 명의 무순을 습격했다. 명의 장수급 이상 4명을 죽이는 대승이었다. 그의 존재감이 본격적으로 드러났고 위협적인 세력으로 성장한 것이다. 

 

그는 스스로 칸汗에 오르고 후금이라고 했다(1616). 이것이 중국의 마지막 왕조, 청의 출발이다. 명의 입장에서 누르하치는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이들은 우리와 국경을 마주한 요동도 침범해서 사람과 가축, 재물을 모조리 약탈하고 요동 총병도 죽였다. 후금은 명나라를 침범할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위협적인 존재가 돼버렸다. 

 

명은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 10만 명의 군사를 보냈다. 조선에도 군사 지원을 요청했다. 

 이와 관련, 광해군일기에 “귀국의 병마는 의주에 주둔시켜라”<광해군일기 10년 6월 19일>는 내용이 나온다. 

 명은 요동어사를 통해서 우리에게는 후금의 배후를 위협하는 역할을 맡겼다. 


 조선은 명나라에 대해 200년 넘게 사대지성으로 섬겨왔고, 또한 임진왜란 때 명의 도움을 받았기 때문에 나 몰라라 할 수 없었다.

 광해군은 임진왜란 때 세자로서 분조를 이끌었다. 그는 전쟁의 참혹함이나 우리 군사의 실정을 잘 알고 있었다. 조선은 병농일치였다. 낫과 호미로 들판에서 일을 하다가 갑자기 훈련도 없이 무기를 드는 군사는 힘이 약하고, 또한 상대해야 할 후금은 과거의 여진족과 다른 것도 파악하고 있었다. 

 

광해군은 이렇게 말한다.

“이번의 후금은 천하의 강적이다. (우리는)호랑이가 산속에 웅거하는 형세를 지은 다음 적의 동태를 살피면서 움직이는 것이 어떠한가?” <광해군일기10년 5월 1일>

 광해군은 우리의 병력이 잔약하므로 섣불리 움직이는 것을 경계했다. 명의 지원 요청을 받아들이는 것은 어쩔 수 없으나 현지에서 전투는 여러 사정을 고려해야 한다고 했다. 광해군은 한쪽 편만 드는 자세를 취하지 않은 셈이다. 


 조선은 1만3천여명을 뽑아 군사 지원키로 결정했다. 원수는 강홍립, 부원수는 김경서였다. 강홍립은 문관, 김경서는 무관으로 임진왜란 때 활약했다. 김응하는 선천군수로서 김경서 휘하에 좌조방장으로 임명되었다.

 명과 조선 그리고 후금 사이에서 본격적인 전투가 심하에서 벌어졌다. 평안 감사의 보고가 올라왔다. 

 “명나라 대군과 우리 삼영三營의 군대가 대패했습니다.”<광해군일기11년 3월 12일> 

 

명은 선두와 중간을 맡고 조선은 후방에 포진했다. 누르하치의 후금은 매복을 해서 명의 대군을 기습했다. 명은 적의 기습에 전열을 재정비하지 못하고 지리멸렬하고 순식간에 무너졌다. 이유가 있었다. 

명은 군량 보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서둘러 전진을 하고 있었다. 허기지고 지쳐서 서둘러 가는 10만 명의 군사는 의미 없는 숫자에 불과했다. 


명의 도독은 군사를 독려했으나 철기로 무장해서 맹렬하게 돌격하는 후금을 당해낼 수 없었다. 명의 군사 10만 명은 전멸에 가까웠고 도독이하 장군들은 패전임을 인정하고 자결을 선택했다. 

 조선 군사는 후방에서 좌군, 중군, 우군으로 나누었고 명과 마찬가지로 식량 보급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우군은 미처 진을 펼치기도 전에 전멸을 했다. 

원수 강홍립이 이끈 중군은 싸울 의지가 없이 산으로 올라갔다. 

강홍립은 적에게 은밀하게 밀서를 보내서 싸울 의사가 없음을 밝혔다. 강홍립은 왕의 밀명에 따른 것이라고 했다. 

 

철원군철원읍 포충사 (김응하 장군 사당).  왕현철 



이러한 상황에서 좌군을 이끄는 김응하 장군만 전쟁터에 외롭게 남았다. 그의 부대 3천 명은 6만 명의 후금을 상대해야 했다. 장군 휘하의 군사들은 똘똘 뭉쳤고 들판에 포진하고 목책까지 설치했다. 

화포가 위력을 발휘했다. 승세를 타고 달려오는 적을 향해서 화포를 쏘았고 아군의 탄환에 적은 쓰러졌다. 

 

그러나 날씨가 도와주지 않았다. 갑자기 서북풍이 불어와서 먼지와 모래로 앞이 캄캄해졌고, 날아가는 화포의 불이 꺼졌다. 화포를 더 이상 쏠 수 없었다. 


육박전이 벌어졌다. 김응하 장군은 버드나무에 의지해서 수없이 화살을 쏘아서 적을 무너뜨렸다. 자신도 수없이 화살을 맞았으나 갑옷 덕택에 화살이 몸 안까지는 미치지 못하였다.

 그는 화살이 떨어지자 칼로 적과 열 번 싸워서 모두 이겼다. 

 

후금의 군사는 감히 그의 정면으로 다가서지 못하고 뒤로 돌아서 등에 창을 찔렀다. 

창이 가슴까지 관통했으나 그는 칼을 놓지 않고 노기가 등등했다고 한다. 그의 나이 40세였다. 


김응하와 그의 부하들은 용감했으나 중과부적이었다. 마지막 보루 김응하 장군은 장렬하게 전사했다.


 김응하는 상관과 달리 목숨을 걸고 용감하게 싸웠다. 그는 사후 어떤 평가를 받았을까? 

 명의 황제 신종은 김응하에게 ‘요동백’이라는 시호와 가족에게 백금을 내렸다. 또한, 제사를 올리고 글도 내려서 그의 영혼을 위로했다.

 “충신 김응하 장군은 삶을 버리고 의리를 취하였다. 장군의 전사는 나를 부끄럽게 하고 또한 나에게 신하가 있었음을 증명한다. 김응하 장군을 요동백으로 증직하고 그의 충혼을 위로한다.”<속잡록> <송자대전 제171권>

 

광해군은 전사한 김응하를 증직하고 그의 사당에 ‘충렬忠烈’이라는 편액을 하사했다. 또한 그의 충성과 의리는 명과 후금에까지 알려졌다고 하면서 아들 김익련에게 선전관을 내리고 승급과 상도 주어서 가족의 생계를 돌봐 주었다.

 

인조는 그를 충의지사로 높이 평가하고 우리가 금수禽獸의 처지를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김응하의 덕택이라고 하면서 가족에게 은 3백 냥을 내렸다. 


 현종은 병조판서로 증직한 김응하에게 시호를 ‘충무’, 묘호를 ‘포충褒忠’으로 내렸다. 개인문집 <정재집> <속잡록> <월사집> 등은 영의정으로 증직했다고 기록돼 있다. 


 숙종은 이순신과 김응하의 자손을 수령으로 임명하고 두 장군의 제사를 폐하지 말라고 엄명을 내렸다. 

 

영조는 장군의 사후 120여 년이 지났어도 그의 충절을 기리기 위한 국가의 제사를 올리게 하고 부조不祧의 신위로 삼으라고 명했다. 부조는 나라에 큰 공훈이 있는 사람의 신주를 사당에 영구히 모셔서 제사를 지내는 것이다. 

 

정조는 보다 구체적으로 추모하고 장군의 후손을 챙겼다. 

 “심하전투를 기록한 전기를 읽을 때마다 매번 눈물이 난다. 김응하의 사당이 철원에 있다고 하니 그 자손을 찾아내서 보고하라.”<정조실록11년 3월 19일>

 그의 봉사손 김택기를 권무군관으로 삼고, 바로 월천해서 남행선전관으로 올려준다. 정조는 직접 글을 지어서 철원의 포충사에 걸도록 했다. 정조가 내린 시다. 


 “남아의 고귀한 명성이 사방에 알려져서

  천자의 고명 요동백이 해동에 내리었네

  심하의 늙은 버들이 사람마냥 서 있노니

  장군이 칼 기대고 서 있는 모습이구나.”    


 정조는 이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정조는 세 분의 충무공(김시민, 이순신, 김응하)의 자손에게는 절차에 얽매이지 말고 벼슬을 주고, 제향의 집사로 임명하라고 명을 내렸다.  

 정조는 김응하 장군이 비록 나라 밖에서 싸웠으나 국내에서 왜적을 물리친 김시민, 이순신 장군과 같은 반열에 올렸다. 

정조는 훌륭한 인물을 사모하는 마음이 간절하다고 하면서 충신 집의 자손들을 끝까지 대우하라고 지시했다. 


 좌의정 송시열은 김응하의 비문을 지었고 그의 저서 <송자대전>에도 수록했다. 장군의 충절과 함께 인품을 소개하고 있다.

  “김응하 장군은 8척 장신으로 과묵하고 건실했다. 18세에 호랑이를 맨손으로 잡아서 고향 사람들이 장군이라고 불렀다. 재물과 여색을 멀리하고 효도와 우애가 뛰어난 대장부였다. 그의 부모가 일찍 돌아가서 낮에는 사냥으로 생계를 꾸리고 밤에는 병서를 읽었다. 그는 무과에 합격하고 백사 이항복의 추천으로 변방의 장수가 되었다. 

 심하전투에서 화친의 말을 못들은 체 하고 적과의 싸움으로 전사했으니 올바른 의義를 이루었다. 장군의 죽음은 천하의 대의를 밝히고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를 세운 것이다.” <송자대전 제171권/ 비碑>

 

이외에도 김창협의 <농암집>, 정약용의 <목민심서>, 이익의 <성호사설>, 심하전투에 참여한 이민환의 <책중일록> 등 조선의 여러 개인문집에도 그의 무공과 절의를 칭송하고 있다. 

 적이었던 후금도 김응하 장군을 높이 평가했다.  

“만약 김응하 같은 자가 두어 명만 있었다면 실로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이다.”<광해군일기11년 3월 12일>


 또한 그를 ‘의류장군依柳將軍’ 이라고 했다. 버드나무에 기대어서 활로 자신들을 수없이 죽인 장군에게 별칭을 붙여준 것이다. 


필자 왕현철이 쓴 '왕PD의 토크멘터리 조선왕조실록'  



 역사는 과거의 자료를 발굴하고 새롭게 조망해서 현재에 말을 건다. 우리는 그 역사를 통해서 삶을 되돌아보기도 하고 앞으로 나아가기도 한다. 

 나라와 대의를 위해서 목숨을 바친 김응하를 비롯한 조선의 충무공들, 그들의 발자취를 계속 발굴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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