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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터는 명당이다 - 왕현철 전 KBS PD/ 왕PD의 토크멘터리 <조선왕조실록>저자
  • 기사등록 2022-03-21 11:57:21
  • 기사수정 2022-03-21 12:2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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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은 땅에서 생명을 향유하며 그 생명의 마무리도 땅에게 의탁한다. 

그래서 일까? 인간은 땅의 형세가 몹시 궁금한 모양이다. 특히 그 땅이 임금이 살고 대통령이 거주하면 더욱더 그런 것 같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국민 소통을 위해서 청와대를 나오겠다고 밝히자, 청와대 터가 논란이 되고 있다. 

역대 대통령의 불행을 ‘청와대 터의 기가 센 탓이다’라고 이러쿵저러쿵 하기도 한다. 

대통령의 행·불행을 풍수와 연관시킨 것이다. 


청와대 터는 풍수학적으로 길지일까? 흉지일까? 역사적으로 어떤 논쟁이 있었나?

 


경복궁 너머 청와대 본관이 보인다. 그 뒤에 백악산이 우뚝하다.  사진=왕현철.  


청와대 터가 처음으로 주목받은 것은 고려 숙종 때다. 숙종은 김위제의 건의에 따라 고려의 수도 개경(개성)을 옮기고자 했다. 이때 선정된 곳 중의 하나가 현재의 청와대 터다.

 김위제는 우리나라 최초의 풍수지리가로 알려진 도선의 <도선비기>를 인용해서 청와대 터가 오덕을 갖춘 땅이라고 주장했다. 


오덕은 중앙 남산의 둥근 형상이 있는 토덕(土德), 북쪽 감악산의 굽은 형상이 있는 수덕(水德), 남쪽 관악산의 솟아 있는 화덕(火德), 동쪽 남행산의 곧게 뻗은 목덕(木德), 서쪽 북악의 모난 형상이 있는 금덕(金德)이라고 했다. 수도로서 최적의 땅이라고 한 것이다. 


 숙종도 현장 답사를 했고 천문관 문상도 동의했다. 숙종은 개경의 수도를 옮기지는 않았고, 청와대 터를 남쪽의 서울, 남경이라고 해서 별궁을 짓는다. 

숙종은 남경 별궁에 행차해서 머물기도 했다. 청와대 터는 고려의 남쪽 수도로서 <도선비기>에서 인용한 길지였던 것이다.


 청와대 터가 두 번째로 주목받은 것은 조선을 건국한 태조 때다. 태조는 조선 창업 후 수도를 옮기고자 했고, 계룡산을 답사해서 조선의 수도로 정한다. 

후속 조치까지 취해서 공사까지 했다. 


그러나 약 9개월 후 하윤의 반대로 계룡산 수도는 무산되고, 다시 무악(현 서대문구)을 답사해서 수도로 결정하려고 했으나 풍수학자들의 반대가 심했다. 수도를 옮기기 싫은 신하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태조는 스스로 풍수학을 공부하면서 최종적으로 결정을 내려야 했다. 태조는 무학대사와 풍수학자를 대동해서 현재의 청와대 터를 방문하고 수도를 정한다. 

조선 초기 최고의 정무기관인 도평의사사도 동의했다. 풍수학을 참고한 결정이었다. 


청와대 터는 다시 길지로 평가를 받았고 조선의 수도가 된 것이다. 

 

태조는 정도전 등에게 명하여 그 자리에 궁궐을 짓도록 했다. 그러나 그 터가 좁다고 해서 바로 아래의 너른 곳에 궁궐을 짓는다. 현재의 경복궁이다. 청와대 터는 경복궁의 후원이 된다. 청와대 터와 경복궁은 같은 맥락이다. 


 이와 반대로 경복궁이 길지가 아니라고 주장을 한 사람이 있었다. 세종 때 풍수학자 최양선이다. 

 그는 “북악산의 주혈 자리는 경복궁이 아니라 승문원 터”<세종실록15년 7월 3일> 라고 주장했다. 

승문원 터는 현재 종로구 안국동 현대사옥 바로 뒤다. 


반면 세종이 풍수학에 정통한 인물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은 풍수학자 이양달은 최양선의 주장은 터무니없다는 논리를 폈다. 

양쪽의 주장이 엇갈리자 세종은 “최양선은 미치고 망령된 사람이라 실로 믿을 것이 못된다”라고 전제를 하지만, 무식한 나무꾼의 말도 성인은 가려듣는다고 하면서 양쪽의 주장을 검증하도록 한다. 

 

세종은 태조가 그랬던 것처럼 명당 여부에 대한 안목을 기르기 위해서 집현전과 함께 풍수학을 공부한다. 영의정 황희를 대표로 해서 검증단도 꾸렸다. 세종은 철저했다.  

 

세종은 양쪽의 주장을 검증하기 위해서 자신도 직접 경복궁 뒤 백악산에 올라간다. 세종은 백악산 중봉에 올라가서 삼각산의 내맥을 살펴보고 봉황암으로 내려와서 승문원의 형세도 봤다. 


양쪽의 주장도 직접 들은 후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삼각산 보현봉의 산맥이 바르게 백악산으로 들어왔으니 경복궁은 명당이다.”<세종실록15년 7월 18일>


 세종은 어릴 때나 왕이 되었어도 책을 손에 놓지 않을 정도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고 풍수학까지 공부해서 경복궁을 명당이라고 판단을 한 것이다. 

 

한편 황희를 대표로 하는 검증단은 삼각산(북한산)은 화공을 시켜서 산세를 그리게 했고 풍수학자들의 의견은 문서로 써 올리라고 해서 집현전으로 하여금 검토시켰다. 

목멱산(남산), 백악산, 보현봉에는 직접 올라가서 산세를 살펴봤고 양쪽의 주장도 들었다. 풍수지리서 <의룡경> <금낭경> <감룡경>도 검토했다. 

 

검증단은 한 달여간 활동을 해서 경복궁에 대한 종합 의견서를 냈다. 

 “삼각산 보현봉에서 내려와서 두 번이나 낱봉우리를 일으키고 종횡으로 솟았다 처졌다 하다가 백악산에 이르렀다. 특히 구덩이 땅은 구덩이 땅으로 응하고 돌땅은 돌땅으로 응해서 자식이 어미를 떠나지 아니하고, 또한 목멱산이 남쪽에 있어서 주와 객이 서로 호응하고 있다. 이는 곧 경복궁이 백악산의 정맥임이 분명하다. 경복궁은 그대로 명당이고 정북을 등지고 정남을 향해 앉아서 삼각산의 중심에 응하고 있다. 최양선의 주장은 옳은 논의가 될 수 없다.”<세종실록15년 7월 29일>


 검증단은 현장답사와 조사를 통해서 경복궁은 명당임을 논리적 근거로 명확히 한 것이다. 청와대 터는 고려의 별궁과 조선의 정궁으로서 두 번이나 길지로 대접을 받았고, 특히 세종의 치밀한 검증으로 다시 한 번 더 길지로 판명을 받은 것이다. 

 

그럼에도 조선은 그 마무리가 일제 강점기로 이어졌기 때문에 평가절하를 받기도 한다. 그러나 세계사에서 500년 이상 지속된 왕조는 그리 흔하지 않다. 


풍수학의 발원지 중국에서 조차 300년 이상 지속된 왕조는 거의 없을 정도이다. 경복궁 터가 흉지였다면 조선이 어떻게 500년을 지속할 수 있었을까?

 

터가 무슨 잘못이 있는가.

역대 대통령이 고립과 단절의 공간에서 허위의식에 빠져 국민과의 소통에 실패하고, 결국 불행해진 것은 권력을 올바르게 사용하지 않았거나 친·인척 관리의 실패에서 원인을 찾아야 한다.

이 ‘터’는 두고두고 권력자들에게 성찰의 공간이 돼야할 것이다. 


고려와 조선에서 왕의 공간으로 명당이었고, 현대에서 대통령이 차지했던 이 ‘터’가 역사적 소임을 다하고 국민의 품으로 돌아오는 5월이면 만감이 교차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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