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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현철의 궁궐이야기(48)창덕궁의 편전, 선정전(宣政殿) -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알게 된 궁궐 왕현철 우리궁궐지킴이, 전 KBS PD
  • 기사등록 2019-12-14 21:13:40
  • 기사수정 2019-12-19 16:5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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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궁궐에서 임금이 정무를 처리하는 곳을 편전(便殿)이라고 한다. 창덕궁의 편전은 선정전이다. 즉 선정전은 왕과 신하들이 만나서 국가의 중요사항을 결정하는 정치1번지의 전각이다. 


 창덕궁의 편전 선정전은 하나의 방으로 구성돼 있고 내부 구조도 단조롭다. 방에는 일월오봉도를 배경으로 해서 임금의 공간 어탑과 어좌가 있고 좌우 아래로 책상들이 있다.

 다른 장식물은 거의 없다. 임금은 어좌에 앉고, 책상은 <조선왕조실록>의 사초(史草)를 기록하는 사관(史官)과 <승정원일기>를 기록하는 주서(注書)의 자리다. 이 책상에서 조선의 역사가 기록된 것이다. 


창덕궁 선정전 내부 모습.  사진=왕현철 



신하들은 방의 빈 공간에 엎드린 자세를 취한다. 편전은 신하들 10여 명이 들어가면 꽉 찰 정도다. 


 필자가 선정전 내부를 해설하면 관람객 대부분은 “매우 좁아요”라는 반응을 보인다. 드라마에서 왕은 높은 의자에 앉고 신하들은 좌우로 줄지어 서 있는 넓은 모습과 너무나 다르기 때문이다.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고 역사가 아니다. 

 

창덕궁 선정전에서 주로 정무를 본 왕은 제9대 성종이다. 성종은 하루 만에 왕이 되었다. 제8대 예종은 진시(오전 7시-9시)에 갑자기 병으로 승하한다. 국가의 상주가 필요했다. 


일반적으로 왕이 승하하면 세자가 상주가 되고 차기 왕위에 오른다. 예종은 아들 2명을 두었는데 첫째 아들 인성대군은 3살에 죽는다. 둘째 아들 제안대군은 당시 4살로서 세자로 책봉되지 않았다. 예종은 19세에 즉위해서 재위기간이 1년 2개월로 매우 짧았다. 

예종은 어린 왕이었고 세자를 책봉할 시간적 여유도 없었던 것이다. 당시 왕실의 최고 어른은 제7대 임금 세조의 비 정희왕후 윤 씨였다.


 예종의 승하로 상주를 정해달라는 신하들의 요청에 대비 윤씨는 “원자(元子,제안대군)는 바야흐로 포대기 속에 있고 월산군(성종의 형)은 본래부터 질병이 있다. 자산군(성종, 13세)은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은 세조께서 늘 그의 기상과 도량을 칭찬하면서 태조에게 견줄 정도였다. 자산군으로 하여금 상주로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라고 하교해서 성종은 상주가 되고 차기 임금이 된 것이다. 



성종은 예종이 승하한 당일 신시(오후 3시-5시)에 면복을 갖추고 경복궁 근정문에서 즉위를 한다. 성종은 예종이 승하하고 10시간이 채 안돼서 왕으로 결정되고 즉위까지 한 것이다. 

 

성종은 비록 세자를 거치지 않고 하루 만에 왕이 되었지만 조선에서 가장 모범적인 왕으로 일컫는다. 성종은 재위 25년 동안 신하들과 하루에 세 번 공부하는 경연을 거의 빠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왕의 경연에서 다루는 책은 왕의 덕을 기르는 사서삼경 등 경전과 통치철학과 경험을 담고 있는 역사서들이다. 성종은 경연을 통해서 실력을 키우고 후일 자신의 장인이자 조정의 실권자 한명회를 귀양 보낼 정도였다. 


 성종은 경복궁에서 즉위를 했지만 한 달도 안돼서 창덕궁으로 옮긴다. 성종은 재위 11년에 자신이 경복궁에 거주하기 싫은 이유를 밝혔다. 창덕궁은 습하고 좁아서 경복궁으로 이어하고 싶지만 경복궁은 그 전각이 너무 크고 훌륭해서 거주하기 싫다는 것이다. 

필자는 원문을 포함해서 이 내용을 몇 번 읽었으나 솔직히 이해가 잘 안 된다. 또한, 이 내용을 뒷받침하고 성종의 속내를 들여다 볼 수 있는 여러 가지 기록을 찾았으나 실패했다. 독자들의 양해를 구한다. 


성종은 재위 25년 간 거의 창덕궁 선정전에서 정무를 처리한다.

 창덕궁 선정전은 현재 우리 궁궐에 남아 있는 유일한 청기와 지붕이다. 우리나라 대통령이 계신 곳도 청와대다. 푸른 기와집이라는 뜻이다.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청와(靑瓦)를 살펴보자. 

 <조선왕조실록>에서 청기와가 처음으로 등장하는 것은 세종 15년이다. 조선에서 경복궁을 짓고 청기와로 지붕을 이은 것은 근정전과 사정전이었다. 세종 15년 경복궁을 지은 38년 후 근정전 취두가 비로 인해서 무너졌다. 취두는 망새라고 해서 용마루 끝에 얹은 장식 기와다. 


세종은 그 망새를 고쳐 덮기 위해서 청기와로 하고자 했으나 청기와 제작비용 문제 때문에 아련와(牙鍊瓦)로 대체한다. 세종은 별와요(別瓦窯)에서 기와를 굽게 한다. 조선은 태종 대에 별와요를 설치해서 기와를 굽는 제도가 있었다. 


 세종은 5년 후 재위 20년에 다시 근정전 수리를 위해서 청기와를 굽고자 했으나 실현하지 못했다. 청기와는 그 재료가 염초로서 군수물자이고 굽기가 어렵고 비용이 많이 들어서 신하들이 반대했기 때문이다.

 

제5대 문종도 부왕(세종)의 명복을 빌기 위해서 대자암을 새로 짓고 청기와를 얹고자 했다. 이 역시 신하들의 반대에 부딪친다. 태조와 신의왕후 한 씨의 혼을 모신 문소전과 종묘에도 청기와를 얹지 않았는데 불당을 청기와로 하는 것은 말도 안 된다는 것이었다. 신하들은 청기와 제작비용도 문제를 삼았다. 문종은 포기해야 했다.


 세조는 회암사의 원각법회에서 석가여래가 나타나고 감로가 내리는 기이한 상서로움이 나타났다고 해서 원각사를 짓는다. 원각사를 짓는 데는 민가 2백여 채를 철거하고 군사 2천 1백 명이 동원된 거대한 불사였다. 원각사 법당을 덮을 청기와 8만 장이 필요했다. 세조는 결국 비용 문제로 청기와 얹는 것을 포기한다.


 조선의 초기 세종이나 세조는 불심이 깊었다. 성종은 세조의 혼을 달래기 위해서 중창한 봉선사를 수리하면서 청기와를 얹는다. 이 역시 신하들의 심한 반대에 부딪쳤으나 성종의 효심을 꺾지는 못했다. 


봉선사 수리에는 성종의 명으로 청기와가 사용됐다. 성종은 사실 즉위 초기에 경복궁의 광화문, 홍례문(현재의 흥례문), 근정문을 청기와로 얹고자 했으나 그 제작에 드는 수고가 2배에서 5배로 든다고 해서 포기했었다. 조선시대 청기와 제작은 이처럼 많은 비용이 들어야 했다.


 연산군은 재위 11년(1505년)에 사찰도 청기와를 얹은 곳이 많다고 하면서 왕의 정전(正殿)을 청기와로 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여겼다. 연산군은 다만 청기와는 갑자기 마련하기 어렵기 때문에 해마다 구워서 창덕궁 인정전과 선정전을 청기와로 이을 것을 명했다. 


연산군의 명에 대해서 신하들의 반대나 그 후의 변화 과정에 대한 기록이 없기 때문에 이 때에 선정전에 청기와를 얹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그 후 창덕궁은 임진왜란으로 불탔기 때문에 현재의 선정전 청기와는 임진왜란 이후 이은 것이다. 


 중종도 경회루에 청기와로 수리하고자 했으나 흉년으로 백성을 괴롭힐 수 없고, 궁궐의 검소한 덕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신하들의 주장에 막혀서 실천에 옮기지 못했다. 

 청기와에 대한 수요와 생산이 늘어난 것은 광해군 대이다. 광해군은 임진왜란으로 불탄 창덕궁을 재건하고 인왕산 아래에 새로운 궁궐 두 개(인경궁, 경덕궁)를 더 짓는다. 

 

창덕궁 선정전 (보물 제 814호) 사진=네이버이미지 



청기와를 굽는데는 불순물이 들어가지 않은 쇠, 진흙을 운반할 소, 화약 원료로 사용하는 염초(焰硝)가 필요했다. 이 중에서 가장 구하기 어려운 것은 염초였다. 


광해군 대에 염초는 중국으로부터 수입에 의존해야 했다. 염초의 가격과 공급이 들쑥날쑥했다. 때로는 염초의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았고, 물량이 부족해서 돈이 있어도 살 수가 없었다. 낭청 한사성과 역관 방의남은 염초를 매우 싸게 사왔다고 해서 직급을 올려 받기도 했다. 청기와 굽는 기술자도 부족했다. 


임진왜란으로 청기와를 굽는 핵심 기술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역관이 중국에서 기술을 배울 정도였다. 시행착오를 거쳐야 했으나 청기와의 제대로 된 색도 나오지 않았다. 


 광해군 대에 청기와 제작 초기에는 2년 동안 구운 것이 3눌(訥), 즉 3천 장에 불과했다. 눌은 기와를 세는 단위로 한 눌은 천 장이다. 광해군은 청기와 생산 속도를 높이기 위해서 낭청과 감역을 설치하고 매일 감독해서 연 간 35눌까지 구어내기도 했다. 그러나 그만큼 제작비용의 부담은 컸다. 비용 부담은 백성이다. 광해군도 결국은 신하들의 건의로 궁궐의 일부에만 청기와를 얹기로 한다. 


 

조선시대 청기와는 고급 기술자가 필요했고 많은 비용이 들어가는 것이었다. 왕은 궁궐에 청기와를 얹고자 했으나 신하들은 궁궐의 검소함을 보여주고 백성의 부담을 줄이고자 해서 청기와 제작을 반대했다. 궁궐의 일부에만 청기와가 남아있는 이유다. 

 현재의 선정전 청기와는 광해군 대에 얹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조선왕조실록>에서 광해군 이후 청기와 제작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우리 궁궐에서 홀로 남아 있는 선정전 청기와가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 이유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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