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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현철의 궁궐이야기 (46) 창덕궁의 정전, 인정전(仁政殿) -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알게 된 궁궐 왕현철 우리궁궐지킴이, 전 KBS PD
  • 기사등록 2019-11-16 15:4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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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정전은 창덕궁의 정전(正殿)이다. 정전은 궁궐의 중심건물로서 월대와 넓은 뜰을 갖추고 있어서 국가적 큰 행사를 치르기에 알맞은 장소다. 


왕과 신하가 정기적으로 만나는 조참, 왕비 즉위식이나 세자 책봉식과 같은 왕실의 의례행사, 외국사신 맞이 등이 이루어졌다.

 또한 인정전에서는 국가의 인재를 뽑는 과거시험도 치렀고 일식처럼 기상이변이 일어날 때 왕은 월대에 나와서 하늘의 노여움을 달래야 했다. 


 인정(仁政)은 “어진 마음(仁心)으로 어진 정사(仁政)를 펼쳐라”는 의미이다. 태종 대에 인정(仁政)을 베푸는 것은 다음 네 가지(환鱞, 과寡, 고孤, 독獨)을 우선적으로 처리해야 한다고 했다. 


아내가 없는 늙은 남자, 남편이 없거나 아들이 없는 여자, 어려서 부모가 없는 고아, 옆에 의지하며 살아갈 친척이 없는 자를 가엾게 여기고 창고를 열어서 스스로 살아가게 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창덕궁 인정전(국보 제 225호) 



 창덕궁은 태종 5년에 지어졌고 이궁(離宮)이라고 했다. 이궁은 왕이 한 때의 거둥에 필요한 곳이다. 

그렇지만 때에 따라서는 이궁은 정궁의 역할을 한다. 임진왜란으로 경복궁이 불타자 창덕궁은 경복궁을 대신해서 정궁 역할을 했다.  

 

창덕궁을 이궁으로 삼았기 때문에 인정전은 처음에는 아주 작은 전각으로 지었다. 태종 17년 인정전을 지은 12년 만에 이조판서 박신은 인정전이 너무 좁으니 다시 고쳐짓자고 건의한다. 

 

그러나 태종은 국가적 큰 행사가 있으면 경복궁으로 옮겨서 치루면 되고 무엇보다도 창덕궁의 주맥을 손상시키는 것을 염려해서 그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창덕궁은 북한산 응봉을 주맥으로 해서 지었고 그 주맥의 흐름은 바로 인정전으로 이어졌다. 태종은 인정전을 크게 지으면 응봉에서 내려오는 산맥을 해칠 수 있음을 우려했던 것이다. 창덕궁은 있는 그대로의 자연과 어울리게 전각을 배치해서 199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 

 

태종은 1년 후 마음을 바꾼다. 태종 18년 이조판서에서 병조판서로 자리를 바꾼 박신에게 인정전을 고쳐 짓자고 명을 내린다. 그 이유는 인정전을 짓는 역사의 부담을 세자(세종)에게 지우지 않고 자신이 짊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태종은 토목의 역사로 인한 백성의 원망은 자신이 지고 세자는 백성으로부터 민심을 얻기를 바랐던 것이다. 태종은 인정전을 고쳐 짓고 세종 즉위년에 완공한다.  


 새로 크게 지은 인정전에서 국가적 첫 행사는 세종이 백관의 하례를 받고 소헌왕후 심 씨가 공비(恭妃)가 되는 왕비 즉위식이었다. 

심 씨는 중전이 되어서 옥책(玉冊)과 금인(金印)을 받았다. 옥책은 왕의 덕행이 감화하는 기초는 내조의 도움이 크고, 또한 심 씨의 덕을 찬양하는 내용으로 담겨져 있었다. 금인은 ‘왕공비인(王恭妃印)’이 새겨져 있었다. 


 세종은 경복궁 근정전에서 즉위하지만 왕이 되어서 첫 새해를 맞이한 곳은 인정전이었다. 세종 3년 원자 이향(李珦)을 왕세자(문종)로 책봉한 곳도 인정전이었다. 


문종은 조선의 왕세자 중에서 가장 오랜 기간 29년이나 왕세자의 자리에 있었다. 성종 대에 폐비가 되는 윤 씨도 인정전에서 왕비로 즉위한다. 인현왕후 민 씨가 왕비로 복위되어서 즉위한 곳도 인정전이었다.


 조선의 정궁은 경복궁이다. 세종은 부왕 태종이 돌아간 후 경복궁으로 옮겨서 정무를 본다. 그 다음 왕 문종도 마찬가지였다. 세종과 문종은 창덕궁을 거의 이용하지 않았다. 창덕궁은  30년 넘게 궁궐의 주인 왕의 왕래가 뜸한 거처하지 않은 공간이었던 것이다. 


 궁궐 건물의 재료는 나무다. 나무로 지은 인정전이 30년 이상 방치되었으니 대들보와 서까래가 썩은 것이다. 단종은 도청(都廳)으로 하여금 인정전을 수리하게 한다. 도청은 의정대신으로 하여금 토목공사를 주관하게 하는 조선 초기의 임시 기구로서 병조의 군사를 동원할 수 있었다.

 

도청은 병조의 군사 100명을 동원해서 강원도의 나무를 베어 오게 하고 인정전의 주춧돌, 기둥 등 모두를 새로 고쳐짓는다. 인정전을 수리했다기보다는 새로 지은 것이다. 인정전의 터도 넓혔다.  


 


창덕궁 인정전이 보다 활기를 띠는 것은 성종 대다. 성종 21년 인정전 안에서 잔치가 벌어졌다. 왕과 의정부와 육조만 참여했다. 주서와 사관도 참여하지 못하는 매우 제한된 자리였다. 이 날의 잔치는 술잔이 오고갔다. 우찬성(종1품) 손순효는 술에 취했다. 그는 임금이 앉는 어탑 아래에 가서 엎드렸다.

 

그는 “신은 광명정대한 말씀을 올리고자 합니다”라고 하면서 알아들을 수 없는 내용을 장황하게 술주정을 했다. 성종은 내관을 시켜서 그가 말하는 내용이 무엇인지 알아보게 했고 임금 자신도 허리를 구부렸다. 그의 말을 좌우의 사람들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손순효는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 성종은 결국 내관을 시켜서 그를 부축해 나가게 했다. 


 다음날 문제가 됐다. 손순효는 “어제 술에 취해서 아뢴 것은 기억할 수 없으나 자신이 예를 잃은 것은 분명하다”고 하면서 사직을 청하고 대죄를 했다. 도승지는 손순효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를 임금에게 설명해달라고 했다. 주서 최세걸과 검열 이상은 잔치에 참여하지 못했지만 대신의 말을 기록하지 못했다고 하면서 임금에게 대죄를 했다. 주서와 검열은 <승정원일기>와 <조선왕조실록>을 기록하는 사관이다. 


 성종은 “취중의 말에 무슨 허물이 있겠느냐”라고 사태를 수습하면서 제도를 보완하게 한다. 


성종은 “재상이 아뢴 말은 사관이 기록해야 한다”라고 하면서 앞으로 예를 갖춘 잔치에도 도승지와 사관 1명을 참여시키게 한다. 조정 대신이 술자리에서 아뢴 말이라도 기록해야 한다는 조선시대의 기록 정신이 돋보이는 장면이다. 위의 내용은 <조선왕조실록>을 근거로 했다.  

 

이긍익의 <연려실기술 제6권>‘연산조 고사본말’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다. 손순효가 술에 취해서 임금의 어탑으로 올라가서 연산군이 왕으로서 책임을 다하지 못함을 파악하고 임금이 앉은 평상을 만지면서 “이 자리가 아깝습니다”라고 했다. 성종은  “나도 그것을 알지마는 차마 (연산군을)폐할 수 없다”라고 대답을 했다는 것이다. 


 손순효는 일찍이 연산군의 자질을 알아 본 것일까? 연산군은 인정전에서 양로연을 베풀었다. 예조판서 이세좌는 연산군이 따라주는 술을 받다가 술의 반을 쏟아서 임금의 옷자락을 적시었다. 


연산군은 이세좌를 불경죄로 국문해서 파직시킨다. 그는 6개월 간 유배 생활을 해야 했다. 주연(酒宴)에서 아버지(성종)와 아들(연산군)은 전혀 달랐다.

 

연산군은 인정전을 외형적으로 보다 화려하게 가꾼다. 연산군은 인정전의 지붕을 청기와로 얹고 군사 5백 명을 동원해서 단청을 다시 칠했다. 단청은 궁궐 건물을 화려하게 할 뿐만 아니라 비바람과 병충해로부터 나무를 보호하는 역할도 한다.  

 

인정전은 단청으로 아름답게 단장을 했지만 수난을 당한다. 인정전은 임진왜란으로 선조가 피난길에 오르는 모습을 굽어봐야 했다. 임금과 세자는 말을 타고 왕비는 뚜껑 있는 교자를 타고 인정전을 새벽에 빠져 나갔다.


 왕이 떠난 궁궐은 화마에 휩싸인다. 창덕궁이 불탄 것이다. 인정전이 소실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선조는 인정전을 복원하지만 그 완성은 광해군 대이다. 그러나 또 다시 광해군 15년 인조반정으로 창덕궁은 불탄다. 인정전은 운 좋게 그 화를 면했다. 


 인조는 인정전을 수리하지만 인정전은 또 다시 화마에 휩싸인다. 순조 3년이다. 인정전의 옆 건물 선정전 서쪽 행각에서 불이 붙어서 인정전까지 전소된 것이다. 한 시간이나 불이 났다.

 

순조는 『인정전 영건도감』을 설치해서 호조판서 조진관을 책임자로 임명하고 4개월에 걸쳐서 인정전을 완공한다. 순조 4년 1804년이다. 우리가 현재 인정전을 보는 외형적인 모습은 이때 지어진 것이다. 215년의 세월이 흘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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