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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현철의 궁궐이야기(42) 인조, 왕위에 오르다 -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알게 된 궁궐
  • 기사등록 2019-10-20 07:07:10
  • 기사수정 2019-10-21 07:3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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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현철 우리궁궐지킴이, 전 KBS PD

         

 

인조 1년(1623) 3월 13일 인조실록은 “인조가 의병을 일으키고 별당에서 즉위하여 밤을 새워  일을 보았으며 임금을 가까이에서 모시는 신하 및 장사들이 칼을 차고 숙위하였다”라고 기록돼 있다. 

경운궁에 유폐되어 있던 인목대비가 “별당은 선왕(선조)께서 업무를 보시던 곳이라 궁인으로 하여금 청소를 하게 하였다”라고 밝혔다. 

인조가 즉위한 별당은 현재의 덕수궁 즉조당이다. 덕수궁은 당시 경운궁 혹은 서궁으로 불렸다. 경복궁 서쪽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 경복궁 동쪽에 있는 창덕궁, 창경궁을 동궐이라고 한다. 


 덕수궁은 여러 이름을 거쳐서 왔다. 덕수궁은 원래 성종 형 월산대군의 집으로 명례궁(明禮宮)이었다. 명례궁은 임진왜란으로 경복궁 등 궁궐이 불타자 서울로 돌아온 선조가 임시 거처로 사용했고 정릉동 행궁으로 불렀다. 그 후 광해군은 정릉동 행궁의 이름을 경운궁으로 고친다. 인조도 반정 이후 경운궁에서 잠시 거처했다. 


 그러나 인조는 창덕궁으로 옮겨서 본격적인 업무를 했다. 이후의 왕들도 창덕궁, 창경궁 등을 주로 이용했기 때문에 경운궁은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고종은 아관파천이후 외국 공사관으로 둘러 싸여있는 경운궁을 복원했고 경운궁은 황제의 나라 대한제국의 정궁으로 사용된다. 


경운궁이 현재의 덕수궁으로 되는 것은 순종 대다. 순종은 부왕(고종)의 장수를 빈다는 의미로 덕수궁으로 붙였고 현재까지 사용되고 있다. 명례궁=>정릉동 행궁=>경운궁=> 덕수궁으로 같은 장소를 시대에 따라서 다르게 불렀던 것이다.


 인조는 광해군이 있던 창덕궁으로 쳐들어가서 광해군을 쫒아내고 인목대비가 갇혀 있던 경운궁으로 옮겨와서 별당(즉조당)에서 즉위를 한 것이다. 인조의 즉위는 인목대비가 인조에게 임금의 세 가지 어보(소신보, 수명보, 유서보)를 전하는 것이었다. 인조가 반정을 한 그 날 밤 간단하게 즉위의 절차가 이루어진 것이다. 



인조가 반정 후 즉위한 덕수궁 즉조당. 사진=네이버이미지 

 

인조의 첫 번째 조치는 광해군이 각종 공사와 유희 등을 위해서 임시로 설치한 기구 영건도감, 나례도감 등 12개의 도감을 폐지하고 의금부와 전옥서를 열어서 죄인들을 모두 풀어주며 간신의 상징이었던 이이첨의 무리를 수색하고 체포해서 처형하라는 명이었다. 

 

인조는 어느 시점에, 왜 반정을 결심했을까? 

 인조는 광해군이 권좌에 오른 10년 쯤 ‘윤리와 기강이 무너져서 종묘·사직이 망해가는 것’을 볼 수 없어서 반정을 결심했다고 밝혔다. 광해군의 폭정이 인조가 반정을 일으킨 명분이었던 것이다. 광해군은 어떤 폭정을 한 것인가? 광해군의 폭정과 인조와 직접 관련된 것은 없을까? 인조의 가족사를 살펴보면 그 이유를 보다 구체적으로 알 수 있다. 

 

인조의 아버지는 정원군(定遠君) 이부다. 인조가 왕이 된 후 정원군은 원종대왕으로 추존된다. 정원군은 선조의 두 번째 후궁 인빈 김씨의 4남5녀 중 세 번째 아들이다. 광해군은 선조의 첫 번째 후궁 공빈 김씨의 2남 중 차남이다. 정원군과 광해군은 선조의 배 다른 형제로 광해군이 5살 위다. 


 정원군은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12살의 나이로 둘째 형 신성군과 함께 피난길의 임금을 호종했다. 그는 부왕의 명으로 기성부원군 유홍 이조참판 이항복과 더불어 평양에 먼저 가서 성터를 수리하고 평양을 사수할 계획을 세우면서 병사들을 불러 모으기도 했다. 그는 피난길에서 배고픔도 겪었지만 청천강을 건너서 부왕 선조로부터 맨 뒤에 따라오라는 명을 받기도 했다. 사관은 이 명령을 “왕자의 교만을 억제시키는 조치”라고 설명하고 있다.  

 

정원군은 부왕의 교육에도 불구하고 어른이 되어서도 별로 달라진 것이 없었다.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그의 행실 대부분은 나쁜 쪽이다. 정원군은 왜군에게 군기를 누설한 개인 노비 희남을 위해서 포도청에 문서로 청원을 넣어서 사헌부가 그의 파직을 요구했고, 그의 종들이 남의 종들과 패싸움을 하는데도 그저 바라보기만 했으며, 또한 남의 농토와 노비를 빼앗기도 했으나 왕의 보호로 처벌은 받지 않았다. 사관은 왕자들의 이런 폐단이 극도에 이르러서 그 원망이 모두 임금에게 간다고 한탄을 했을 정도다.

 

정원군은 광해군과도 악연을 맺는다. 광해군은 임진왜란으로 불탄 궁궐을 복원한다. 광해군은 궁궐을 복원하거나 새로 지을 때 조정의 대신들보다 지관(풍수가)이나 술인(점성술사)들의 의견에 더 귀를 기울었다. 

광해군은 먼저 창덕궁을 복원한다. 그럼에도 광해군은 창덕궁에 거처하기를 꺼려했다. 단종과 연산군이 창덕궁에서 폐위된 사실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광해군도 창덕궁에서 쫓겨나고 폐위된다.


 그래서 광해군은 자신의 새로운 거처로 인왕산 아래에 궁궐을 하나 더 짓는다. 인경궁이다. 인경궁은 처음에는 이궁으로 단출하게 지으려고 했으나 차츰 규모가 커져서 광해군의 폐위로 다 완성되지 못한 채 건설이 중단된다. 

광해군은 인경궁을 지으면서 스님이자 풍수가 성지(性智)로부터 인왕산 아래 왕기(王氣)가 있다는 말을 듣는다. 그 터가 바로 정원군이 사는 새문동 집이었다. 광해군은 그 왕기를 누르기 위해서 술인(術人)김일룡의 건의로 그 터에 궁궐을 짓는다. 경덕궁으로 현재의 경희궁 터다. 광해군은 왕의 기운이 있다는 정원군의 집터를 빼앗아서 새로운 궁궐 경덕궁을 지은 것이다. 그리고 왕기설은 정원군의 셋째 아들이자 인조의 막내 동생 능창군과 연결된다. 

 

광해군 7년 유학 소명국은 옥중에서 역모사건이 있다고 고변을 한다. 그는 “정원군의 셋째 아들 능창군 이전은 말을 잘 타고 활 쏘는 솜씨가 뛰어나다. 그는 배우지 않아도 글을 잘한다. 그는 40년 간 국가를 다스릴 군주로 타고난 운명이다”라고 점을 잘 치는 사헌부 장령 윤길의 말을 옮겼다. 


 광해군은 평소 정원군 집터가 왕의 기운이 있다는 것과 정원군과 능창군의 얼굴상이 범상치 않다는 것도 듣고 있었다. 능창군의 외모는 훤칠하고 풍채가 있었으며 성격도 호탕했다고 한다. 광해군은 이런 능창군을 의심의 눈초리로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소명국의 상소는 근거가 없는 무고였지만 광해군은 이 상소를 근거로 해서 능창군을 역모사건으로 엮어서 교동으로 유배를 보낸다. 능창군은 위리안치 되어서 찬 돌방에서 자야 했고, 또 모래와 흙이 섞인 밥을 먹어야 했다. 그는 그 괴로움을 이기지 못하고 부모에게 편지를 남기고 스스로 목을 매어 죽는다. 16살이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교동은 서울과 182리 떨어져 있는 절해고도였다. 교동은 왕실의 유배지로 자주 활용되었다. 세조의 동생 안평대군, 연산군, 광해군의 형 임해군 등이 유배를 가서 죽은 곳이기도 하다. 교동은 강화도에 있다.


 정원군은 자신의 셋째 아들이 무고로 유배지에서 비참하게 죽은 후 시름에 빠진다. 그는 “해가 뜨면 간밤에 무사했음을 알겠고 날이 저물면 오늘이 다행히 지나갔음을 알 수 있으며 하루 빨리 집에서 죽어 지하의 선왕을 따라 가고 싶다”라고 자주 읊조렸다. 그는 술에 의존했고 병까지 얻어서 40세에 죽는다. 광해군은 정원군의 죽음조차도 용납하지 않았다. 광해군은 정원군의 조문객까지 감찰을 하게 한 것이다.  


 인조는 그의 막내 동생 능창군과 아버지를 죽음으로 내 몬 광해군의 조치를 지켜봤다. 인조가 반정을 결심한 시기도 능창군과 아버지의 죽음을 전후로 한 때다. 인조가 그의 가족사를 반정의 명분으로 직접 이야기한 기록은 없지만 충분히 영향을 미쳤음을 짐작할 수 있다. 

 

광해군의 폭정은 이 외에도 헤아릴 수 없다. 그는 인왕산 아래 인경궁과 경덕궁을 짓기 위해서 민가 수천 채를 철거하기도 했다. 백성들은 영문도 모른 채 삶의 터전에서 보상도 못 받고 쫓겨나야 했다. 광해군은 자신의 왕위에 위협이 되는 선조의 적장자 영창대군과 자신의 형 임해군도 죽인다. 영창대군의 어머니 인목대비도 경운궁으로 유폐시켰다. 이이첨, 상궁 김개시를 비롯한 자신의 뜻에 맞는 간신들에 둘러싸여서 관직은 뇌물을 주고받는 장사꾼처럼 거래를 했다. 


 광해군이 반정으로 쫓겨나던 날 왕의 침실에서 은 4만여 냥이 나왔다. 광해군은 창덕궁에서 쫓겨나 경운궁으로 옮겨가는 길에서 백성들로부터 “돈 애비야, 돈 애비야, 거두어들인 금은(金銀)은 어느 곳에 두고 이 길을 가는가”라고 비난을 들어야 했다. 기개와 능력 있는 선비는 초야에 숨거나 유배를 가야했다.


 인조는 반정이후 대대적인 물갈이를 한다. 인조는 광해군 대에 간신이나 벼슬을 돈으로 주고 산 무리들을 내쫓고 그 자리에 초야로 떠난 명망 있는 선비나 간언을 하다가 유배를 간 관리들을 불러들인다. 그와 반정을 같이 한 동지들은 요직에 앉히는 것은 물론이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조금씩 틈이 생겼다. 대표적인 사례가 간신의 상징 이이첨의 아들 이대엽의 처리문제였다. 이이첨은 4명의 아들을 둔다. 광해군 대에 모두 요직을 독차지 했다. 인조반정 6일 후 이이첨과 그의 세 아들은 처형된다. 그러나 이대엽은 인조가 목숨을 살려서 섬으로 위리안치 시킨다. 이대엽은 겨우 글자를 아는 수준이었지만 아버지의 힘으로 정언, 부수찬, 직제학, 승지 등 핵심 요직을 차지한다. 위의 자리는 보통 과거에 급제해서 똘똘한 관리들이 가는 자리다. 이이첨도 부정으로 과거에 합격했고 그의 다른 자식들도 거의 글자를 몰랐다. 이이첨의 또 다른 아들 이원엽은 순천부사를 지냈으나 일(一)에서 열(十)까지와 천(天)지(地)일(日)월(月)산(山)천(川) 16자만 알았고 이 글자도 겨우 썼다. 광해군의 무능 방탕과 이이첨의 국정농단 폐해가 얼마나 심각했는가를 알 수 있다.


 인조가 이대엽의 생명을 살린 데는 이유가 있었다. 인조가 처음으로 반정을 모의한 신경유와 이대엽은 처남 매부 사이였다. 신경유는 거사를 모의할 때 다른 동지들에게 이대엽의 목숨을 살려주기로 약속을 받았고 그 청을 인조에게 했기 때문이다. 사간원 사헌부에서 사적인 청을 한 신경유를 파직시키고 이대엽도 처형해야 된다고 계속 주장을 한다. 양사의 간원들은 자신들의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사직을 청하고 인조는 사직을 말리는 줄당기가 계속됐다. 결국 옥중의 이대엽은 이런 분위기를 듣고 자살을 한다.


 사관은 이대엽을 처형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분노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라고 분위기를 전하면서 “개혁 초기에 사심으로 공의를 무시하는 일은 식자들이 모두 걱정하였다”라고 인조의 국정운영을 우려하고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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