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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현철의 궁궐이야기(39) 창덕궁 시민당(時敏堂 ) ④ 사도세자, 영조와 어긋나다 -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알게 된 궁궐
  • 기사등록 2019-09-28 21:55:22
  • 기사수정 2019-09-30 16:1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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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현철 우리궁궐지킴이, 전 KBS PD

      

 

사도세자와 연관된 단어로는 아마도 ‘비극적인 죽음’이 떠오를 것이다. 영조가 세자를 궁중 깊숙이 가두라고 한 시기는 윤5월이었다. 태양력으로 환산하면 7월의 무더위가 절정에 이른 시기다. 

 찌는 듯한 염천의 하늘아래서 9일 동안 뒤주에 갇혀서 죽음에 이르렀다면 그가 겪어야 할 고통은 상상을 초월하리라. 사도세자는 나라의 미래 권력 왕세자로서 비극적인 죽음으로 삶을 마감했지만 그가 남긴 유산은 있었다. 조선의 제 22대 왕 정조와 그가 저술한 책이다. 

 

정조는 아버지가 죽음에 이르는 비극적인 장면을 자신의 눈으로 목격했다. 11살의 세손으로서 기억이 또렷했을 것이다. 정조는 즉위하면서 “아! 과인은 사도 세자의 아들이다. 근본은 둘로 하지 않는다(不貳本)” 라고 분명히 선언한다. 정조는 아버지의 불행한 죽음으로 인해 영조의 첫 아들 효장세자의 양자로 들어가서 왕위에 오르지만 자신의 근본은 하나 뿐인 것임을 신하들에게 각인시킨 것이다.  


 정조는 왕위에 오르자 바로 자신의 아버지를 추숭하는 작업을 시작한다. 사도(思悼)를 ‘장헌(莊獻)’으로 수은묘(墓)는 ‘영우원(永祐園)’으로 바꾸고 사당을 ‘경모궁(景慕宮)’으로 한다. 영우원은 다시 혜경궁 홍씨(후일 헌경왕후)와 합장해서 현륭원으로 격상했다. 현재는 융릉이다. 사도세자는 그 곡절의 생애만큼 무덤도 묘(墓)=>원(園)=>릉(陵)으로 바뀌어 간 것이다. 

 

융릉(경기도 화성시, 사적 제206호) : 추존왕 장조(사도세자)와 헌경왕후(혜경궁 홍씨)를 합장한 무덤. 사도세자의 무덤은 수은묘 =>영우원=>현륭원=>융릉으로 바뀌었다.


정조는 할아버지 영조가 지은 ‘사도(思悼)’를 왜 ‘장헌(莊獻)’으로  바꾸었을까? 정조는 할아버지가 붙여준 이름을 바꾼 것에 대해서 신하들에게 “슬프고 사모하는 마음을 나타내려고 한 것뿐이다”라고 그 의도를 설명한다. 

‘사도’는 죽음을 슬퍼하고 안타깝게 여긴다는 뜻이지만 ‘장헌’은 씩씩하고 왕성하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그 뜻이 전혀 다르다. 정조가 ‘장헌’으로 지은 속내를 알 수 있는 것이다. 사도세자는 ‘장헌’의 이름에 어울린 인물이었을까? 


 또한 정조는 추숭 작업의 일환으로서 아버지의 행적을 낱낱이 기록해서 조선왕조실록에 장헌대왕지문(誌文)을 남겼다. 지문은 사람의 생애를 돌에 새긴 것이다. 주로 무덤의 비석에 새긴 글이다.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장헌대왕지문> <홍재전서> <한중록>을 근거로 해서 사도세자의 또 다른 면을 보자.


 사도세자는 체구가 매우 커고 웅장했다. 사도세자는 아버지의 명에 따라서 어릴 때는 학문에 정진해서 총명했지만 천성적으로 병정놀이 등 바깥에서 활동하기를 좋아 했다. 군사서적도 즐겨 읽었다. 군사의 배치나 작전의 임기응변에도 능했다. 

 

제 17대 효종은 무예를 좋아했다. 그는 궁궐 후원에서 말을 달리며 무예를 시험하고 했다. 효종이 사용하던 청룡도와 쇠로 주조한 큰 몽둥이가 당시 창경궁 저승전(儲承殿)에 남아 있었다. 저승전은 세자의 공부방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이 무기들은 힘깨나 쓰는 무사들도 들지 못하였다. 그러나 사도세자는 15,16세에 그 무기를 들었다고 한다. 

 

영조와 청룡도에 얽힌 다른 이야기를 보자. 영조는 어느 날 사도세자의 첫 아들 의손 세손의 묘에 참배하고 돌아오는 길에 관왕묘(關王廟)에 들렀다. 관왕묘는 촉나라 장수 관우를 기리는 사당이다. 영조는 “청룡도를 들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라고 주위를 둘러보면서 물었다. 별군직 이의배가 나와서 청룡도를 빼 들고 두 번 휘둘렀다. 영조는 “장사로다”라고 칭찬하면서 바로 첨사로 제수하게 한다. 이의배는 청룡도를 들 수 있는 힘만으로 병졸에서 지휘관으로 발탁된 것이다. 이처럼 청룡도는 병사들의 힘자랑을 가늠할 수 있는 무기이다. 

 

사도세자는 청룡도를 휘두를 만큼 힘이 셌을 뿐만 아니라 활쏘기와 말타기에도 능해서 과녁을 정확하게 맞혔으며 사나운 말도 잘 다루었다고 한다. 영조 대에 우의정을 지낸 조현명은 이런 세자를 보고 “사도세자는 효종을 빼 닮았다”라고 하면서 일찍이 그 싹을 알아보았다.


 사도세자는 대리청정을 하면서 병사들이 무예에 익숙하지 못한 것을 걱정했다. 거기에는 훈련 방법에 문제가 있음을 알아차렸다. 그 방법을 개선하고자 자신이 직접 무예지를 저술한다. <무기신식(武技新式)>이다. 무예를 새롭게 다루는 방법의 책인 것이다.

 

<무기신식>은 명나라의 장수 척계광의 책에서 제시한 여섯 가지 곤봉(棍捧)·등패(籐牌)·낭선(狼筅)·장창(長槍)·당파(鐺鈀)·쌍수도(雙手刀)의 잘못된 연습 방법을 바로 잡고, 또한 옛 군사 관련 책들을 모조리 고증해서 새로운 열두 가지 무예를 만들었다. 죽장창(竹長槍)·기창(旗槍)·예도(銳刀)·왜검(倭劍)·교전월도(交戰月刀)·협도(挾刀)·쌍검(雙劍)·제독검(提督劍)·본국검(本國劍)·권법(拳法)·편곤(鞭棍) 등으로서 찌르고 치는 자세를 도식으로 그려서 병사들이 쉽게 배울 수 있게 했다. 사도세자는 이 책을 편찬해서 훈련도감에 내려서 훈련하게 한다. 

 

사도세자는 “우리나라는 영토가 좁다. 동쪽은 왜 북쪽은 오랑캐와 접하고 있으며 서쪽과 남쪽은 바다와 중원으로 둘러싸여 있다”라고 해서 우리나라의 지정학적 위치를 고려한 군사 훈련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현재는 국경의 위험이 없지만 평소에 그 위험을 대비하고 방어태세를 구축해야 한다고 한 것이다. 

 

사도세자는 효종이 열망한 북벌과 창덕궁 후원에 설치한 황단(皇壇)을 생각하면서 잠을 자다가도 탄식을 했다. 황단은 임진왜란 때 명나라가 조선을 도와준 공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서 숙종 대에 창덕궁 후원에 설치한 제단이다. 사도세자는 효종의 북벌과 나라를 스스로 지키지 못해서 설치한 황단을 마음에 새기면서 <무기신식>을 저술해서 강한 군대를 만들고자 한 것이다. <무기신식>은 사도세자가 25살에 저술한 것으로서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 사도세자가 문(文)보다 무(武)에 더 재능과 관심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사도세자의 또 다른 저술로 <능허관만고(凌虛關漫稿)>가 있다. 이 책은 전해져 온다.


 조선의 왕자는 세자를 제외하고 10세가 되면 궁궐 밖으로 나간다. 사도세자는 태어난 이듬해 바로 세자가 된다. 왕의 허락이나 공무가 있을 때 궁궐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것이다. 병정놀이와 무예, 말타기 등 움직이는 것을 좋아한 사도세자였지만 15세가 될 때까지 궁궐바깥 세상을 거의 구경하지 못했다.


 그래서 사도세자는 바깥세상을 구경할 수 있는 임금의 능행(陵行)을 매우 따라가고 싶어 했다. 예조에서 임금의 능행에 세자도 모시고 따라가야 한다는 품을 올리면 허락이 떨어질까 해서 초조하게 기다렸다. 영조는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세자의 능행을 허락하지 않았다. 태어나자 이듬해에 세자가 되어 스승들에게 포위되어 <소학>을 외우고 <논어>나 <대학> 등에서 올바른 말만 배워야 하는 자신의 환경을 한 번쯤은 벗어나고 싶었을 것이다. 그 기대가 매번 무너졌던 것이다. 사도세자는 예조에서 올린 보고가 거절될 때마다 너무나도 서운하고 화가 나서 울기까지 했다. 궁궐 밖의 넓은 세상을 보고자 했으나 궁궐에 갇혀서 아버지의 명에 따라서 책과 씨름을 해야 했다. 과연 책에 얼마나 흥미를 느꼈을까, 짐작이 간다. 


 사도세자는 10살에 혜경궁 홍씨를 맞이했다. 5년 후 첫 합례를 한다. 공교롭게도 그 첫 합례를 하기로 한 영조 25년 1월 27일에 부왕으로부터 국사의 일부를 위임받는 대리청정을 해야 했다. 

사도세자는 15세가 되어 신부와 함께 오순도순 깨알 같은 삶의 재미를 즐겨야 할 때 국정의 무게가 자신에게 다가온 것이다. 사도세자에게 대리청정은 국정에 차지하는 아버지의 그림자가 너무 커서 자신이 끼어들 여지가 거의 없었다. 

신하들과 정사를 논하면서 ‘그리하라’ ‘깊이 유념하겠다’ 등 상투적인 대답이 대부분이었다. 흥미가 없는 억지 업무였던 것이다. 대리청정 이후에 사도세자의 병이 점점 더 깊어진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사도세자가 궁궐 밖을 벗어난 두 번의 기록이 있다. 

 그 첫 번째가 온양 온천행이다. 부왕의 허가를 얻어서 공식적으로 병을 치료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사도세자는 출발 당일 거의 죽어가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세자는 성문을 벗어나자 울화증이 사라졌는지 활기가 돌아왔다. 

군사들이 민가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등 백성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를 줬다. 군마가 대열을 탈출해서 콩 밭을 망치자 밭주인에게는 쌀 한 섬을 배상하기도 했다. 온양 행궁에서 사도세자는 병마가 물러갔고 천성이 돌아와서 덕을 베풀었고 백성들은 북을 치고 춤을 추며 성군이라고 칭송을 했다. 사도세자가 궁으로 돌아온 뒤 그 효과는 오래가지 못했다. 

 

두 번째는 관서미행(微行)이다. 이것은 영조 몰래 이루어졌다. 사도세자의 대리 청정이후 영조는 경희궁에서 사도세자는 창덕궁에서 주로 생활했다. 사도세자는 자주 일어난 병으로 인해서 부왕에 대한 문안인사도 세자궁의 관리가 대신하기로 했다. 아버지를 속이고 외출을 할 수 있는 것이다. 혜경궁 홍씨는 영조와 사도세자가 따로 사는 그 거리만큼 둘 사이도 멀어지고 있다고 여겼다. 

 사도세자는 궁궐에서는 병을 핑계로 내부 사람을 속이고 백성들은 자신을 모를 것이라 여겼으며 당시 평안감사 정휘량은 자신과 인척이었으므로 국왕에게 밀고하지 않으리라고 짐작하고 관서미행을 감행한 것이다. 


이 미행은 결국 드러나서 수행한 내시들은 처형당하고 그 사실을 숨긴 승지나 세자의 스승들은 파직을 당하거나 유배를 가야 했다. 혜경궁 홍씨는 자신도 연좌되어서 몸을 보전할 수 없음을 각오하고 세손(정조)을 보전할 방도를 궁리하고 있었다. 

사도세자가 많은 위험을 무릅써서라도 바깥세상을 구경하고자 하는 강한 열망을 읽을 수 있다. 이 관서미행은 후일 사도세자가 서인으로 폐하는 나경언의 밀고 쪽지에도 적혀있었다.

 

사도세자는 천성적으로 무예 등을 즐겨하는 활동적이었다. 아버지 영조는 학문적으로 총명하기를 바랐다. 영조는 노론과 소론의 틈바구니에서 신하들을 잘 다스리기 위해서는 임금이 신하들보다 학문적 우위에 있어야 된다고 여겼기 때문이리라. 사도세자의 천성이 반응하는 무(武)보다는 문(文)을 기반으로 한 강한 세자를 열망했던 것이다. 세자의 천성과 영조의 훈육이 어긋난 것이다. 

 사도세자가 궁궐 밖에서 출생해서 무장이 되었다면 우리는 또 다른 이순신 장군을 만날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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