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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현철의 궁궐이야기 (38) 창덕궁 시민당(時敏堂 ) ③ 사도세자, 왜 죽었나? -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알게 된 궁궐 - 왕현철 우리궁궐지킴이, 전 KBS PD
  • 기사등록 2019-09-21 21:34:07
  • 기사수정 2019-09-22 19:5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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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는 세자의 21일간의 대명을 풀어주어서 화해를 하려는 듯으로 보였지만 결국 세자를 자결까지 몰고 간다. 필자는 그 전환점이 휘령전에서 올린 예가 아닌가 추측한다."

       

 

조선왕조실록 영조 38년 윤5월 21일 “사도세자가 훙서하였다”라고 기록돼 있다. 영조가 왕세자를 폐하여 서인으로 삼고 궁궐 내에 엄격하게 가둔 9일 후였다. 27살이었다. 

영조는 세자가 훙서했다는 보고를 들은 후 30년 가까운 부자의 은의(恩意)를 생각해서 시호(諡號)를 사도세자(思悼世子)라고 짓는다. 죽음을 슬퍼하고 안타깝게 여긴다는 뜻이다. 

 융릉(경기도 화성시, 사적 제206호) : 추존왕 장조(사도세자)와 헌경왕후(혜경궁 홍씨)를 합장한 무덤.


사도세자가 죽는 직접적인 계기는 나경언의 고변이었다. 나경언은 액정별감 나상언의 형이다. 그가 벼슬을 한 기록은 없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나경언을 역적으로만 기록돼 있다. 

나경언은 사도세자가 죽기 한 달 전 형조를 거쳐서 영조의 앞에까지 왔다. 그는 “구중궁궐의 임금에게 이 글을 올리고자 했으나 그 방법을 알 수 없어서 우선 형조에 글을 올렸습니다”라고 옷솔기에서 흉서를 내 놓았다. 그 흉서에는 세자의 허물 십 여 가지 패란의 내용이 적혀있었다. 


 영조는 그 내용을 다 읽지 못하고 창문을 치면서 “이런 변이 있을 줄 염려하였다” “ 나경언의 글을 통해서 세자의 과실을 알 수 있었다”라고 하면서 “조정에서 사모를 쓰고 띠를 맨 자는 모두 죄인이다”라고 나경언에게 부끄럽지 않느냐고 신하들을 몰아붙인다. 


임금의 곁에 있던 영의정 홍봉한과 우의정 윤동도가 그 글을 읽었다. 홍봉한은 사도세자의 장인이다. 홍봉한은 글을 읽고서 “신이 먼저 죽고자 합니다”라고 눈물을 흘리면서“이 글을 두어서 어디에 쓰겠습니까? 불태우소서”라고 청을 해서 흉서는 바로 불에 태워진다. 그래서 세자의 십 여 가지 허물이 정확하게 무엇인지를 알 수 없다.


 영조는 국청을 설치해서 나경언을 국문하는 한편 홍봉한은 바로 창덕궁에 있는 왕세자에게 이 사실을 보고한다. 세자는 급히 연을 타고 와서 창경궁 홍화문에 엎드려 대죄를 한다. 영조는 국청을 행하는 뜰로 세자를 불렀다. 세자는 입(笠, 삿갓)과 포(袍, 남자의 겉 옷) 차림이었다. 


 영조가 세자를 책망하는 과정에서 흉서의 내용 일부가 드러난다. 영조는 세자를 향해서 “너는 어째서 왕손(王孫)의 어미를 때려죽이고 여승을 궁으로 들였으며 서로에 행역하고 북쪽 성으로 유람을 나갔느냐? 이것이 세자가 할 짓이고 그러고도 나라가 망하지 않겠는가?”라고 흉서의 내용을 인용해서 질책을 했다. 

서로의 행역은 세자가 약 1년 전 관서에 20여 일간 영조 몰래 다녀온 것을 일컫는다. 이 외에도 ‘변란이 호흡 사이에 있다’고 해서 세자의 반역을 암시하는 글귀가 있었고 세자가 시전 상인 등에게 돈을 빌린 내용도 있었다. 나중에 영조는 시전 상인들을 불러서 그 빚을 갚아준다.

 

그러나 왕세자는 분함을 이기지 못해서 나경언과 대질을 요청했으나 영조는 대리청정을 하는 세자가 죄인과 대질을 할 수 없다고 거절한다. 사도세자는 자신이 걸핏하면 벌컥 화를 내는 증세인 ‘화증(火症)’의 탓으로 설명을 했으나 영조는 “차라리 미치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라고 하면서 세자를 물러가게 한다. 

세자는 물러나와 창경궁 금천교 위에서 대죄를 한다. 

나경언은 세자를 무고했다고 자백했고 이날 바로 처형당한다. 


 나경언의 고변으로부터 세자는 약 21일 동안 창덕궁 시민당 뜰에서 임금의 처분을 기다리는 대명(代命)을 한다. 대명 기간 동안 세자는 세자궁 소속의 관리를 임금에게 보내서 문안인사를 했으나 영조는 대답하지 않았고 영조는 국사를 돌보지 않겠다고 신하들을 압박했다. 

편차인(編次人) 구윤명은 “요즈음 세자가 많이 뉘우치고 있습니다”라고 영조의 반응을 살피자 영조는 “입도 벙긋하지 말라”고 하면서 세자에게는 남은 희망이 없다고 했다. 영의정 홍봉한과 우의정 윤동도가 세자의 대명을 풀어주고자 건의했으나 바로 파직시킨다. 이들은 며칠 후 다시 좌의정과 우의정으로 임명된다. 영조의 감정 기복이 심함을 알 수 있다.


 또한 옥당(玉堂) 김종정 등 여러 명의 신하들이 나경언의 부인과 아들에게도 죄를 확대하는 노적의 율을 시행하라고 건의했으나 영조는 “나경언이 어찌 역적이겠는가? (세자의 비행을 숨긴)조정의 신하가 모두 역적이다”라고 하면서 이들을 유배 보낸다. 세자의 비행을 감춘 신하들도 불신했다.

 영조도 편한 마음은 아니었다. 영조는 수없이 가슴을 쳐서 자책을 했다. 이럴 때 신하들은 밤 세워 두려워하다가 아침이 되어서야 물러났을 정도다. 세자의 대명도 임금의 마음을 돌릴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영조는 끝내 세자를 폐하여 서인으로 삼고 궁궐 안에다 엄격하게 가둔다. 이로부터 9일 후 왕세자는 죽는다. 사도세자의 부인 혜경궁 홍씨가 쓴 <한중록(閑中錄)>에 의하면 사도세자는 뒤주에 갇혀서 죽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뒤주에 관한 기록이 없다. 뒤주에 관한 내용은 한중록에 나온다. “내관이 들어와서 소주방(궁궐의 음식을 만드는 곳)에 있는 쌀 담는 궤(뒤주)를 내라 한다......궤에 들어가라 하신들 들어가지 마실 일이지 어찌하여 들어가셨는가.” <한중록, 신원문화사, 구인환 엮음>


 다시 조선왕조실록을 보자. 영조가 세자를 궁궐 안에 가두라고 한 이 날의 영조와 사도세자의 행동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나경언의 고변이후 영조는 세자를 폐하여 서인으로 삼고자 하는 마음과 대명을 풀어주고자 하는 마음이 교차하고 있었다. 영조는 역대 임금의 어진을 모신 선원전에 가서 참배를 하고 난 후 세자의 대명을 21일 만에 풀어준다. 영조는 세자에게 휘령전(徽寧殿)으로 같이 가서 예를 올리고자 했다. 그런데 세자가 병이 일어나서 휘령전에 가지 않았다. 


창경궁 문정전 : 영조 대에는 휘령전으로 이름을 바꾸어서 왕후 등의 신위를 모신 혼전으로 사용했다.

 

휘령전은 영조의 왕비 정성왕후의 신위를 봉안하고 있었다. 정성왕후는 자식이 없었음으로 사도세자를 자신의 원자로 삼고 무척 아꼈다. 사도세자도 왕후를 잘 따랐다. <한중록>에도 정성왕후가 돌아가신 후 세자가 더욱더 의기소침해서 병이 더 깊어졌다고 혜경궁 홍씨는 증언하고 있다. 세자가 휘령전에 가지 않아야 할 이유가 없었다. 영조는 정성왕후를 매개로 해서 세자와 화해를 하고자 하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영조는 도승지를 세자에게 보내서 다시 한 번 휘령전으로 가서 예를 올리라고 재촉하고 자신도 직접 휘령전으로 간다. 세자궁은 휘령전으로 가는 중간에 있었다. 영조는 차비관을 시켜서 세자궁 안을 자세히 살피게 했으나 세자는 없었다. 이런 임금의 심경을 도승지가 세자에게 전달 한 것 같다. 세자는 다시 어가를 뒤따라 휘령전으로 간다. 영조는 휘령전에 가서 혼자 예를 올렸다. 세자도 휘령전 뜰에 도착했다. 임금이 예를 마치자 세자가 뜰에서 임금에게 사배례(四拜禮)를 올렸다.


 그 때 영조가 갑자기 손뼉을 치면서 “여러 신하들은 신(神)의 말을 들었는가? 정성왕후가 ‘변란이 호흡 사이에 달려 있다’고 나에게 정중하게 말하였다”라고 외쳤다. 평소 엄격한 영조의 모습과는 딴판이었다. 영조는 왕의 어가를 호위하는 협련군에게 명령을 해서 휘령전 문을 4,5겹으로 막도록 하고 오위도총부 총관으로 하여금 호위하게 했으며 담 쪽을 향해서 칼을 뽑아들게 하였다. 궁궐의 문을 막고 사람의 출입을 금했으며 각(角)을 불어 군사를 모으게 했다. 영조는 세자에게 관(冠)을 벗게 하고 맨발로 머리를 땅에 조아리게 하면서 자결할 것을 명했다. 세자가 조아린 머리에서 피가 나왔다. 창졸간이었다.  

 

영의정 신만 좌의정 홍봉한 등이 따라 들어왔으나 말리지 못했다. 영조는 따라 들어온 대신들을 바로 파직시키고 물러가게 한다. 당시 11살이던 세손(후일 정조)도 이 광경을 지켜봤다. 세손이 들어와서 관(冠)과 포(袍)를 벗고 사도세자의 뒤에 엎드렸다.

 “아비를 살려 주옵소서”

 “나가라!” - <한중록>

 영조는 세손을 안아다가 세자의 교육기관인 시강원으로 보내고 금위대장 김성응과 그의 아들로 하여금 지켜서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하였다. 


 영조가 칼을 들고 재차 자결을 명했다. 세자가 자결하고자 했으나 세자의 스승 여러 명이 말렸다. 영조는 군사를 시켜서 세자의 스승들을 쫓아낸다. 이어서 영조는 세자를 폐하고 서인으로 삼는다는 명을 내렸다. 당시 사관은 한림(翰林) 임덕제였다. 한림은 예문관 소속의 정 7품 관리로 보통 사관이라고도 한다. 임덕제는 굳게 엎드려서 떠나지 않았다. 영조는 “세자를 폐하였는데 어찌 사관이 있을 필요가 있는가?”라고 해서 임덕제도 사람을 시켜서 내보내게 한다. 


왕세자가 임덕제의 옷자락을 붙잡고 울며 따라 가면서 “너 마저 나가버리면 나는 누구를 의지하란 말이냐?”라고 좋은 방도를 묻는다. 세자는 다시 뜰로 돌아와서 개과천선하겠다고 엎드려 애걸했다. 영조의 마음은 바뀌지 않았다. 

 영조는 세자를 깊이 가두라고 명한다. 아울러 세자가 폐하여 서인이 되었음으로 세자빈, 세손 및 여러 왕손들도 궁궐을 나가게 한다. 세자빈과 세손은 그날 바로 친정으로 돌아간다. 


 이 날 영조의 행동은 극과 극이다. 영조는 세자의 21일간의 대명을 풀어주어서 화해를 하려는 듯으로 보였지만 결국 세자를 자결까지 몰고 간다. 


필자는 그 전환점이 휘령전에서 올린 예가 아닌가 추측한다. 영조가 세자에게 휘령전에 같이 가서 예를 올리자고 한 것은 화해의 손짓이었다. 그러나 세자는 병을 핑계로 댔다. 영조는 결국 휘령전에서 혼자 예를 올린다. 

세자가 21일 동안 대명을 했으나 무엇을 반성한 것인가? 세자에게 내민 화해의 손길이 독한 마음으로 바뀐 것이다. 그리고 영조는 갑자기 돌아간 정성왕후의 음성을 끌어와서 세자를 서인으로 삼고 자결하도록 한 것이다. 휘령전의 참배 전과 후 영조의 심경에 상당한 변화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만일 영조의 처음 명령대로 휘령전에 같이 가서 함께 예를 올렸다면 세자의 목숨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라고 가정도 해 본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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