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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현철의 궁궐이야기 (34) 숙종의 연애편지 ③장희빈은 어떻게 죽었나 -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알게 된 궁궐
  • 기사등록 2019-08-17 21:00:45
  • 기사수정 2019-08-19 07:3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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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현철 우리궁궐지킴이, 전 KBS PD


  

숙종 인현왕후 장희빈 그리고 인현왕후를 지원하는 서인과 장희빈을 지원하는 남인 등의 얽히고설킨 이야기는 드라마의 주요한 소재다. 여러 방송사에서 다루고 또 다뤘다. 궁녀로 들어와 임금의 사랑을 독차지해서 왕후의 자리까지 오른 장희빈, 왕후의 자리를 빼앗겼다 다시 복위하는 인현왕후, 그 과정에서 고뇌와 분노를 표출하는 숙종, 한 임금 아래서 원수보다 더 한 남인과 서인 그리고 사랑, 질투, 배신, 음모 등 극적인 요소가 많기 때문이다. 특히 사약을 마시면서 한 서린 인생을 절규하는 장희빈의 마지막 모습은 배우가 혼신을 다하는 연기다. 역사적 근거는 없다. 뒷부분에서 상술한다. 


이러한 모든 것이 드라마에서는 극적인 감정을 끌어올리는 판타지일지 모르지만 현실에서는 비극 그 자체다. 왕비가 폐서인이 되고, 궁녀에서 왕비까지 올랐지만 더 많은 욕망을 갈구해서 삶을 단축시키고, 오늘은 승리했지만 내일은 유배를 가거나 죽어야 하는 등 두 번 다시 역사에서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다. 그 중심에 숙종이 있었다. 

 

숙종의 의사결정 방식은 독특했다. 숙종은 신하들과 사전 의논을 통해서 국정을 결정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신하들과 사전 의논도 없이 자신의 생각을 글로 쓴 ‘비망기’를 불쑥 내렸다.  왕의 비서실에 해당하는 승지들조차 처음으로 맞닥뜨린 내용이고 대신이나 관계부처와 사전 협의도 없었다. 신하들의 논리 정연한 반대에 어쭙잖은 변명으로 슬그머니 의견을 철회하기도 하고 임금과 의견을 달리하는 반대나 상소에 바로 파직시키고 귀양을 보내기도 했다. 


심지어 왕의 비서 승지가 반대 의견을 내자 바로 파직하고 귀양을 보냈다. 상소로 올린 글이나 토론으로 파직시키고 귀양을 보내는 것은 조선의 다른 왕들에게 보기 드물었다. 


 숙종을 독재자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어떤 면에서는 감정적이고 즉흥적이었다. 심지어 변덕쟁이라고까지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정국의 소용돌이에서 올바른 방향타를 잡지 못했다. 때로는 스스로 소용돌이를 일으켰다. 지도자의 이러한 자세는 국론 분열과 국가의 인재의 손실을 초래했다. 


숙종은 환국을 통해서 왕권을 강화했다고 역사에서는 평가하기도 한다. 그러나 숙종의 왕권강화가 백성의 삶에 어떤 긍정적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서는 좀 더 따져봐야 한다.  


 쫓겨난 인현왕후가 5년 만에 궁궐로 돌아왔다. 문제가 불거진다. 나라에 왕비가 두 명이 된 것이다. 사전 정지작업을 하지 않은 탓이다. 결과적으로 숙종은 인현왕후를 복위시키고 장희빈을 버린다. 

이  결정은 숙종이 혼자 해서 ‘비망기’로 내린다. “장희빈은 왕비에서 빈으로 강등시키고 옥새를 거두며 장씨(張氏)로 부르고 세자로 하여금 문안인사를 하지 못하게 한다.” 

이어서 인현왕후의 복위를 종묘에 알리고 왕비로 다시 책봉한다. 종묘에 알리는 것은 관련 절차가 마무리 됐고 바꿀 수 없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왕의 비망기가 내려졌음에도 불구하고 세자를 낳고 5년간 국모를 한 장희빈의 대우를 다른 후궁과 달리해야 한다는 상소가 이어진다. 

이러한 상소는 장희빈의 대우에 대한 옳고 그름을 떠나서 왕의 결정에 대한 신뢰성에 의문이 생기고 장희빈으로 하여금 엉뚱한 희망을 갖게 한다. ‘장희빈은 세자의 생모로서 다른 후궁과 차별을 두어야 한다’는 상소 이후 인현왕후는 “궁중의 사람들이 모두 희빈에게 기울어졌고 심지어 희빈의 시녀들이 나의 침전 창구멍을 뚫고 안을 엿보아도 꾸짖는 사람이 없어서 한심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누가 감히 이러한 사실을 주상에게 알리겠는가? 괴롭다”라고 민진후 형제에게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하소연 했다.


장희빈묘(경기도 고양시 서오릉). 사진=네이버이미지 



 후궁의 시녀들은 중전의 뜰에 들어갈 수 없다. 그럼에도 장희빈의 시녀들은 거리낌 없이 드나들었던 것이다. 국왕이 신하들과 의견을 사전에 조율하지 않고 독단의 결정을 비망기로 내린 폐해다. 


 인현왕후는 복위 이후에 시름시름 앓았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인현왕후의 병과 관련해서 “편치 못한 증후, 환후가 위중, 다리 통증, 메스껍고 토하는 기분, 명치가 꽉 막히는 증세” 등으로 기록하고 있다. 

24시간 돌보는 의약청도 설치했다. 약원의 총책임자 남구만이 대기하고 인현왕후의 오빠 병조판서 민진후가 입시해야 했으며 세자는 궁을 떠나지 않고 약탕 시중을 들었다. 

정기의 과거시험 식년시와 별과 시험도 1년을 연기했다. 내의원은 그 노고로 품계까지 올려 받았으나 인현왕후는 복위한 7년 후 창경궁 경춘전에서 승하한다. 35살이었다.

 

숙종은 인현왕후가 승하한 한 달 여 후 '장희빈 자진' 비망기를 밤에 내린다. 비망기에는 한나라 무제(武帝)가 ‘어린 임금에게 젊은 어미가 있으면 폐단이 있을 것이다’라고 후궁을 죽인 예를 들면서 “(장 씨의) 죄가 밝게 드러났으니 나라와 세자를 위해서 자진하라”라고 했다. 그 죄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비망기에는 적시하지 않았다. 


이 비망기 역시 승지들에게 조차 의논하지 않았다. 신하들의 반발에 부딪친다. 

“죄가 밝게 드러났다고 했습니다만 우리는 장 씨(장희빈)의 죄를 알지 못합니다.” -부수찬(副修撰) 이관명

“인현왕후를 쫓아낼 때는 충분히 의논을 하고 했지만 후회했습니다. 지금의 일은 격분한 감정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까?” -  가주서(假注書)  이명세

“‘조정에서는 알지 못하고 한밤중에 처분하였다’라고 역사에 기록된다면 이것은 성군이 하는 일입니까?” - 기주관(記注官) 권상유


 숙종은 반대하는 신하들을 설득시키지 못했다. 신하들이 건의한대로 대신들과 협의하겠다고 하면서 한 발 물러섰다. 그러나 비망기의 내용은 궁궐에 쫙 퍼졌다. “세자를 보호하기 위해서 세자의 생모를 처벌해서는 안 된다”는 상소가 이어진다. 숙종의 즉흥적 결정이 내린 폐해가 연달아 발생하는 것이다.


 숙종은 또 다른 비망기를 내려서 장희빈의 시녀 축생, 설향, 시영 등 궁녀를 잡아오게 한다. 인현왕후의 죽음은 장 씨의 저주와 관련이 있음을 보고 받았기 때문이다. 

이를 보고한 사람은 영조의 생모 숙빈 최 씨였다. 숙빈 최 씨는 인현왕후가 베푼 은혜를 추모해서 통곡하는 마음으로 “장희빈이 무속으로 왕후를 저주하고 있다”라고 숙종에게 몰래 알렸던 것이다.


 조사는 왕의 친국(親鞫)과 내병조의 국문(鞫問)으로 1주일간 이루어졌다. 조사를 종합하면 장희빈은 장희재의 첩, 무녀, 자신을 따르는 상궁 그리고 시녀들과 함께 취선당 서쪽에 신당을 차리고 “민 중전을 잡아서 그물 속에 넣겠다” “장 중전(장희빈)이 곧 복위할 것이다” 등의 저주의 축원을 올렸다. 왕비의 침전으로 사용한 통명전, 대조전의 침실에는 죽은 새, 쥐, 붕어 등을 섬돌 아래에는 흉악하고 더러운 물건들을 묻었다. 인현왕후를 빨리 죽이고 장희빈을 왕비로 곧 복위하기 위한 술책이었다.  


취선당(就善堂) :창덕궁 낙선재 주변으로 추정. 장희빈은 여기서 경종을 낳았다.


 이러한 조사를 통해서 장희빈의 죄를 신하들도 알게 됐다. 숙종은 비로소 장희빈을 처벌할 수 있는 명분을 확보한 것이다. 장희빈을 자진하라는 비망기를 승정원에 두 번째 내린다. 이번에는 구체적으로 죄가 명시되었다. “장 씨(장희빈)는 왕비를 질투하고 원망해서 모해하려 했고 궁궐에 신당을 설치하고 저주를 했으며 흉악하고 더러운 물건을 대조전과 통명전에 묻은 죄가 다 드러났다.” “자진하라(스스로 목숨을 끊어라).”

 

이 비망기에 대해서도 반대하는 일부의 상소가 있었으나 왕의 뜻이 확고했고 그 죄가 드러났음으로 어떻게 자진을 시킬 것인가의 방법으로 논의가 옮겨졌다. 

 이조판서 이여가 “‘자진하라’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전한(前漢)때의 문신 가의(賈誼) 는 ‘고귀한 대신에게는 형벌을 가하지 않는다’라고 했듯이 유사(攸司)의 형벌을 시행하기는 어렵습니다”라고 운을 뗐다. 숙종은 “사약(賜藥) 이외에 달리 다른 방도가 없다”라고 사약을 자진의 방법으로 제시한다. 그러나 다른 대신들도 왕의 제안에 반대를 한다. 


“비망기의 뜻은 유사의 형벌을 시행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우의정 신완

“세자를 낳은 사람에게 유사의 형벌을 가할 수 없습니다. 사약은 궁궐 밖으로 내보내서 내려야 합니다. 이것도 유사의 형벌에 해당되기 때문에 감히 아뢰는 것입니다.”-중추부사 서문중

“왕의 가까운 친족에게 유사의 형벌을 시행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습니다.” -이조판서 이여

 

세 대신이 이야기 한 유사의 형벌은 무엇인가? 유사(攸司)는 해당관청을 의미한다. 유사의 형벌은 해당관청(형조, 의금부)이 시행하는 벌이다. 국가의 조직이 개입해서 시행하는 참형, 교수형, 사약, 장형(杖刑) 등이 유사의 형벌인 것이다. 세 대신이 장희빈의 죽음에 “유사의 형벌을 시행할 수 없다”고 한 것은 국가 조직이 형벌의 시행에 관여할 수 없다는 의미를 밝힌 것이다. 장희빈은 어쨌든 미래 권력 세자의 생모다. 누가 용의 역린을 건드리고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겠는가? 


 장희빈처럼 궁녀 숙의(淑儀)로서 성종의 왕비가 되어 쫓겨난 폐비 윤씨(연산군 생모)는 사약으로 죽는다. 연산군은 이 때의 일을 <조선왕조실록>과<승정원일기>를 조사해서 사약을 내리는데 관여했던 부서나 신하 대부분을 죽인다.


 숙종도 “자진하라는 것은 유사의 형벌을 의미한 것은 아니다”라고 물러섰다. 사약을 내리는 방법을 철회한 것이다. 그러나 ‘자진하라’는 내용은 조보(朝報)에 실어 내보내라고 한다. 조보는 왕의 비서실 승정원에서 매일 처리한 내용을 전국에 알리는 오늘날의 신문이다. 조보에 내 보내는 것은 나라 전체에 알리는 것이다. 숙종은 “승정원에 명령을 내리지 않고 처리할 방도가 없겠는가?”라고 자문을 하면서 대신들과 의논을 마친다. 

 

이틀 후 숙종은 “장 씨가 이미 자진하였으니 예조는 장례 절차를 마련하라”라고 하교를 한다. 예조는 “임금의 명으로 장 씨가 자진하였다”는 것을 알리고 시신은 창덕궁 동장문인 선인문으로 나가게 하겠다고 보고한다. 임금이 다니는 창경궁 명정전의 어로(御路)를 피하기 위한 방안이었다. 

 

조선왕조실록을 종합하면 장희빈은 숙종의 명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그 방법은 알 수 없다. 그러나 드라마에서 표현한 것처럼 사약으로 죽은 것은 아닌 것이다. 


 숙종은 장희빈을 사랑해서 궁녀에서 왕비까지 올렸다. 그 대가로 왕후를 내치고 많은 나라의 인재들을 유배 보내고 죽였다. 5년의 세월이 흘러 역전이 됐다. 사랑도 오래 가지 못했다. 숙종은 장희빈의 왕후 저주 사건을 보면서 후궁은 왕비의 자리에 오를 수 없도록 법전에 싣도록 한다. 너무 늦은 깨달음이었다. 그 희생도 너무나 컸다. 신하들의 의견을 충분히 수렴해서 종합적인 사고와 판단을 하지 않은 임금으로 인한 폐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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