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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현철의 궁궐이야기 (27) 왕비의 공간 교태전(交泰殿) - ① 박(瓢)이 열리다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알게 된 궁궐
  • 기사등록 2019-06-30 07:46:14
  • 기사수정 2019-07-01 12: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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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현철 우리궁궐지킴이, 전 KBS PD


   


 경복궁 교태전은 임금의 사적인 공간인 강녕전 바로 뒤에 자리 잡고 있다. 왕비의 공간이다. 태조가 한양으로 수도를 이전해서 경복궁을 지을 때 근정전, 사정전, 강녕전이 기본 골격이다. 당시 교태전은 없었다. 세종 22년 “임금과 왕비의 처소를 세자의 공간인 동궁으로 옮겼다. 이는 장차 교태전을 지으려고 한 것이다”라고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하는 것이 교태전에 대한 첫 기록이다. 그 9년 후 세종은 교태전, 함원전 등 7개의 전각을 “자신이 지은 자그마한 집이다”라고 했다. 교태전은 세종 22년에서 31년 사이에 지어졌다.

 

근정전이나 사정전처럼 지을 당시 정도전이 그 전각의 의미를 부여한 것처럼 교태전에 대한 뜻풀이를 하지 않았다. 그래서 교태전(交泰殿)의 의미는 한문의 해석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交는‘사귀다, 주고받다, 교차하다’의 뜻이 있고 泰는 ‘크다 통하다 편안하다’의 뜻이 있다. 또한 泰는 주역의 64괘의 하나다. 泰의 괘( ䷊)는 아래는 하늘인 ‘건(☰)’이고 위에는 땅인 ‘곤(☷)’으로 구성돼 있다. 하늘은 ‘양’으로 이루어져 위로 오르고 땅은 ‘음’으로 이루어져 아래로 내려감으로 두 기운이 서로 어울려서 크게 통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교태(交泰)는 음과 양이 화합하고 더불어서 훌륭한 세자의 탄생을 기원하는 의미로 해석이 가능하다. 한자와 주역을 이해해야 하는 해석이다. 필자는 주역 전문가가 아니다. 주역은 쉽게 설명이 안 된다. 교태전의 의미가 제대로 전달되었으면 한다.


 조선왕조실록은 세계기록문화유산에 등재될 만큼 우리의 자랑스러운 역사적 보배다. 8명의 사관이 2명씩 교대로 해서 왕과 조정 대신들 사이에서 오고 간 대화, 정책 보고서, 상소 그리고 해당 부서의 정책과 일기 변화나 지진 정보 등을 기록했다. 왕의 업적에 대한 칭찬도 있지만 왕의 역할을 똑바로 하라는 신하들의 따가운 질책도 가감 없이 기록돼 있다. 

일반 백성의 고단한 삶과 애환도 담겨져 있다. 조선시대의 상당부분을 파악할 수 있는 종합보고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쉬운 점은 있다. 왕과 왕비 그리고 세자의 사적인 생활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왕과 왕비가 어디에서 누구와 잠을 자고 무엇을 먹었으며 개인적으로 어떻게 시간을 보냈는지 참으로 궁금한 것이 많다. 특히 왕비나 세자의 사적인 생활은 거의 알려진 것이 없다. 왕비나 세자의 공간에 사관이 사사로이 출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선왕조실록에서 교태전을 검색하면 94건이 나온다. 거의 세조대에 집중되어 있다. 이것도 세조와 왕비의 관계나 사적인 생활이 아니라 신하들과 공적인 만남을 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교태전을 통해서도 왕비의 사적인 생활은 거의 알 수 없는 것이다. 부득이하게 공적인 활동을 따라 갈 수밖에 없다. 


 세조는 조선의 왕 중에서 신하들과 가장 자주 술자리를 한 왕이다. 그 장소를 정치 공간인 사정전뿐만 아니라 왕비의 공간인 교태전에서도 이루어졌다. 세조는 신하들을 교태전으로 불러 정사도 논의하고 술자리를 베풀기도 했다. 일반적으로 교태전은 왕비의 공간이기 때문에 금남의 공간으로 설명한다. 그러나 세조대의 기록에 비추어 보면 그렇지 않은 것이다. 반대로 세조의 왕비 정희왕후는 교태전뿐만 아니라 사정전의 술자리에도 가끔은 동석을 했다. 신하들과의 술자리에 왕비를 참석시킨 예는 다른 왕에게서는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세조는 후궁을 한 명밖에 두지 않았다. 근빈 박 씨로 2남을 두었다. 세조 2년 의정부 좌참찬 강맹경과 예조참판 하위지가 세조에게 중국의 예에서 제후(왕)는 9명의 여자에게 장가든다고 하면서 후궁을 들일 것을 청한다. 왕의 뒤를 이을 후사를 많이 두기 위함이었다. 세조는 그 뜻은 의로우나 자신은 색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두 번 다시 거론하지 말라고 한다. 그 후에도 세조는 자신이 술에 취해서 여색에 흠뻑 빠지는 일은 없다고 신하들에게 밝히기도 했다. 

 세조가 교태전에서 신하들과 국사를 논의한 중요한 일을 살펴보자. 


 세조 6년 교태전에서 이조판서 구치관 등을 불러서 용관(冗官)을 도태시킬 것을 지시한다. 용관은 쓸데없는 관리로서 즉 잉여 인력을 줄이라는 것이다. 당나라 태종은 관리를 줄여서 6백 명 만으로 정관의 치를 이룩하였다고 하면서 우리나라의 관리들은 너무 많아서 줄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정관의 치는 당 태종 이세민의 치세 기간에 국력이 강성하고 경제적으로 번영한 것을 말한다. 인사를 담당하는 이조에서  다음날 100여 명의 인력을 줄이는 방안을 세조에게 보고했다. 사헌부 장령 박건순과 좌사간 최한경 등이 “임금의 눈과 귀가 되는 사헌부·사간원의 관리나 임금의 스승인 경연관은 줄일 수 없다”라고 상소를 올렸다. 조직과 인력을 줄이는 데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그 조직의 논리로 반발을 한다. 세조는 상소문을 읽고서 사간원의 수장 권반을 불렀다. 


세조 : 인력을 줄이면 불편한 것이 무엇인가? 

권반 : 저희들은 불편하다고 말하지 않았고 줄이는 숫자가 너무 많다고 했습니다.

세조 : 잉여인력을 줄이는 것인데 많고 적은 것이 무슨 관계가 있는가?

권반 : 오랫동안 나라 일을 하다가 하루아침에 도태 당하는 것이 두려운 것입니다.

세조 : 신하들은 녹(봉급)을 위해서 벼슬살이 한다는 말인가? 


 결국 세조의 의지대로 100여 명을 줄인다. 이후의 왕들도 흉년이 들어서 조세 수입이 넉넉지 않으면 용관을 줄여 나갔다. 특히 율곡 이이는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9년 전에 병조판서로서 시무책 6개 조항의 상소를 선조에게 올린다. 현명한 인재를 등용하고 군민을 양성하고 재용을 풍족해야 하며 국경수비를 튼튼히 해야 하고 전쟁에 쓰는 말을 갖추어야 하며 교화를 밝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중에서 국가의 수입이 줄어드는 것을 우려하면서 많은 용관 때문에 2백 년이나 된 나라가 단 1년을 견딜 비축량이 없음을 가슴 아파하고 있었다. 



사진= 네이버이미지 


 세조가 북벌 계획, 즉 북방의 여진족 정벌을 결단한 것도 교태전이었다. 세조는 신숙주를 여진족의 침입이 잦은 동북면의 군무를 지휘하게 하는 강원·함길도 도체찰사 선위사(宣慰使)로 임명한다. 이름을 병조의 직책이 아닌 선위사로 한 것은 적이 도망가지 않도록 속이기 위한 전략이었다. 세조는 신숙주를 내전으로 데리고 가서 비밀히 계책을 주고 전권을 위임한다. 함길도는 세종 대에 6진을 설치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이후에도 여진족의 침입이 있었다. 강원·함길도의 기병과 보병을 합쳐서 4,200명을 5개의 부대로 나누고 신숙주 자신도 기병·보병 4,000명을 거느려서 동, 서로 나누어서 공격했다. 군사를 본격적으로 움직여서 적진을 파괴하는데 까지는 1주일이 걸렸다. 적진을 네 방향에서 쳐들어가서 불을 지르고 화살을 퍼부었다. 430명을 죽였으며, 사로잡거나 죽인 소와 말은 1천 여 마리였다. 불태워 없앤 집도 9백여 구역이었다. 우리 측의 피해숫자는 기록에 없다.


 세조는 그 승리의 보고를 받고 매우 기뻐했다. 어찰을 써서 현지의 신숙주를 격려하고 특별사면도 단행했다. 그리고 어찰의 말미에 “경이 비록 나를 보고 웃었지만 나의 박(瓢)이 열렸다. 쪼개어서 술잔을 만들겠다”라고 덧붙였다. 이것은 세조가 교태전에서 신숙주와 북벌을 결정하던 날 신숙주가 술에 취해서 “담장 아래 심은 박이 바야흐로 덩굴이 져서 박이 열리지 않겠다”고 한 것에 대한 화답이었다. 신숙주의 예상과 달리 박이 열렸음으로 그 박으로 술잔을 만들어서 (그대와 함께 술을)마시겠다는 세조의 정감어린 농담인 것이다. 지금은 경복궁 뜰에 식물 같은 것을 재배하지 않는다. 그러나 세조 당시에 교태전 담장 아래 박을 심어서 열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왕비 정희왕후의 명으로 심지 않았을까 추측한다.


 세조 7년 사냥을 겸한 군사훈련인 강무(講武)를 녹양평에서 실시한다. 녹양평은 나라의 말을 기르는 목장이 있는 양주에 있었다.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의 군사를 징발했고 기병 8,840 명, 보병 800 명이었다. 지휘관들을 불러서 교태전에서 출정식을 했다. 병조판서 한명회를 수대장으로 삼았다. 세조도 녹양평 현장에 가서 강무를 지켜봤다. 두 패로 나누어서 짐승을 잡은 마리 수로 승부를 가렸다. 세조는 강무 결과에 실망했던 것 같다. 규율이 엄격하지 못했고 대오가 정연하지 못했다. “강무는 사냥이 아니다. 병법을 시험하고 훈련하는 것이다. 이런 병사를 장차 유사시에 어떻게 쓰겠는가?” 엄한 질책을 가한 것이다. 야전에서의 세조는 교태전에서 술을 나누며 소통할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이외에도 세조는 군사훈련을 자주했다. 


 박이 주렁주렁 달렸던 교태전, 교태전을 통해서 본 세조는 백성의 세금을 덜기 위해서 관리를 줄였고 국경을 침입하는 여진족을 정벌하는 결단도 내렸으며 군사 훈련을 위한 출정식도 열었다. 이 외에도 자주 연회를 베풀어서 신하들과 소통을 했다. 변덕스러운 면도 있었고 다정한 면도 있었다. 세조를 한 마디로 규정하기는 어려우나 신하들과 소통을 자주한 것은 어느 왕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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