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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현철의 궁궐이야기 (26) 경빈 박 씨 억울하고 억울하다 - 왕의 연침(燕寢) 강녕전 ②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알게 된 궁궐
  • 기사등록 2019-06-22 21:08:32
  • 기사수정 2019-06-27 11:2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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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현철 우리궁궐지킴이, 전 KBS PD



  경빈 박 씨는 경상도 상주의 여인으로 그 아름다운 자태는 다른 후궁들을 압도했다. 그녀는 연산군 대에 채홍으로 그 아름다움이 알려져 중종 반정이후 궁중에 뽑혀 와서 중종의 후궁이 되어 빈(嬪)까지 오른다. 

궁중의 여인은 여관(女官)으로서 8단계가 있다. 빈, 귀인, 소의, 숙의, 소용, 숙용, 소원, 숙원으로서 빈은 가장 높은 품계다. 빈은 정 1품으로 왕비의 보좌를 맡고 부녀의 예를 논할 수 있다.

 중종은 연산군의 폭정에 반기를 든 신하들의 반정에 의해서 말 그대로 자고 일어나니 왕이 되었다. 3명의 왕후를 두었고 2남 5녀를 낳았다. 후궁도 7명을 두었는데 7남 6녀를 낳았다. 총 20명의 자녀를 둔 것이다. 

 그 중에서 경빈 박 씨도 1남 2녀를 낳았다. 중종에게 왕비보다 사내아이를 먼저 안긴 것은 경빈 박 씨였다. 복성군이다. 대단히 축복받을 일이었으나 복성군은 화근의 씨앗이 된다. 왕비의 사내아이보다 앞질러 세상에 나왔기 때문이다. 

이것은 경빈 박 씨나 복성군의 탓이 아니다. 임금의 은혜 덕이었다. 그러나 경빈 박 씨와 복성군은 자신들과 전혀 상관없는 일로 죽임을 당한다. 또한 경빈 박 씨는 사후 500년이 지났어도 임금의 사랑과 세자 자리를 놓고 중전과 한판 벌이는 암투와 질투의 화신으로 TV드라마에서 그려지기도 했다. 그 역사적 근거는 있는가? 너무나도 억울하고 억울한 그녀의 삶을 조선왕조실록을 근거로 해서 추적한다. 


 중종 22년 세자가 거처하는 동궁 침실의 창문 밖과 동산 그리고 임금의 침전인 강녕전 뜰에 죽은 쥐가 발견된다. 단순히 자연적으로 죽은 쥐는 아니었다. 쥐의 입, 귀와 눈은 불에 지져져 있었고 사지와 꼬리는 잘려져 있었다. 누군가가 고의로 저지른 소행임이 분명했다. 역사에서 ‘작서의 변’이라고 부르는 사건이다. 그 소문은 내전의 궁인에서 조정의 신하들에게까지 퍼져 나갔다. 범인을 색출해야만 했다. 세자를 저주하고 종묘와 사직을 위협하는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강녕전의 쥐는 중종이 먼저 봤다. 중종은 동침실에서 나와서 세수하러 가다가 뜰에 있는 쥐를 보면서 “저기 쥐가 있다”고 했고 옆에 있던 경빈 박 씨도 “쥐가 어디에서 들어왔을까요?”라고 묻자 중종은 시녀를 불러서 “집어다 버리라”고 했다. 시녀 김 씨가 치마로 쥐를 덮어 싸서 강녕전 서쪽 뜰의 쥐구멍에 버렸다. 경빈 박 씨가 쥐와 관련해서 자신이 겪은 것은 이 대로였다. 

 사건의 범인 조사가 시작됐다. 제 1차 진술은 내전의 일이라서 임금이 세자궁에 일하는 궁인들과 경빈 박 씨를 포함한 강녕전의 여인들로부터 받아냈다. 중종은 “너희들은 한 마디 말이라도 착오가 있으면 의금부에 가서 조사를 받게 된다. 보고 들은 것을 정확하게 이야기하라”고 심문을 했으나 모두가 “죽은 쥐를 봤으나 누가 그 쥐를 갖다 놨는지는 알 수 없다”고 진술했다. 

 신하들은 단서를 찾아내지 못한 중종을 압박해서 자신들이 직접 심문하겠다고 나섰다. 중종은 경빈 박 씨의 계집종 범덕을 포함한 7명의 명단을 넘겼다. 신하들은 신체적 고문을 포함해서 2차례 심문했으나 내용은 제1차 진술과 같았다. 쥐를 보지 못했다고 진술한 범덕은 한 차례 더 조사했으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중종은 내전의 침실을 출입할 수 있는 방자들에게까지 조사를 시켰다. 또한 “너의 주인이 쥐를 가지고 왕래할 때 보았지? 너의 주인이 하지 않았다면 궁궐에 의심 가는 사람은 누구냐?  또 어느 곳에 서 있었느냐?” 등 다양한 심문 방법도 제시했다. 중종과 신하들은 범인을 색출하고자 하는 의지는 강했으나 구체적 성과는 없었다. 

 범인 색출에 대한 분위기를 바꾼 것은 중종의 어머니 정현왕후 윤 씨의 증언이었다. 그녀는 대비로서 쥐가 발견 될 때부터 사건의 전말을 보고 받았다. 그녀는 자신의 생각을 언문으로 써서 내렸다. 그녀는 세자궁에 발견된 쥐에 대해서는 “쥐를 갖다 놓은 사람을 보지 못했다”는 세자궁 시녀들의 진술을 받아들였다. 세자궁에 버린 쥐의 범인에 대해서는 그녀도 모르는 것이다. 그러나 강녕전에서 발견된 쥐에 대해서는 경빈 박 씨를 의심했다. “경빈 박 씨가 오랫동안 강녕전에 혼자 앉아 있었고 그녀의 계집종 범덕이 뜰을 두 번이나 왕래했다. 강녕전의 쥐를 처음 본 것도 그녀였다. 만일 다른 사람이 쥐를 강녕전에 버렸다면 왜 그녀가 그것을 몰랐을까?”라고 했다. 경빈 박 씨가 범인이라고 지목하지는 않았지만 ‘의심이 간다’고 한 것이다. 

 

 오비이락도 있었다. 경빈 박 씨의 딸 혜순 옹주의 계집종들이 인형을 만들어 놓고 참형에 처하는 모습을 하면서 “수레가 몇 대나 왔는가? 쥐를 지진 일을 발설한 사람은 이렇게 죽이겠다” 고 했다는 것이다. 이 내용도 사건 당사자들의 진술은 엇갈렸다.  

 종종은 세 명의 왕후를 두었다. 중종의 첫 째 부인 단경왕후 신 씨는 왕비가 된지 7일 만에 쫓겨났고 둘 째 왕후 장경왕후 윤 씨는 아들(인종)을 낳고 죽었다. 작서의 변이 일어났을 때는 셋 째 문정왕후 윤 씨였지만 아직 남자아이를 잉태하지 못하고 있었다. 당시에 세자(인종)는 모후 없이 12살이었고 경빈 박 씨의 아들 복성군은 18살이었다. 경빈 박 씨는 중종의 사랑도 받고 있었다. 그래서 경빈 박 씨가 자신의 아들을 세자 자리에 올리기 위해서 온갖 암투를 벌인다고 TV드라마 등에서 극적으로 묘사하지만 조선왕조실록에서는 당시까지 세자의 지위 변경에 관한 논의는 없었다.

 

조정대신들은 대비인 정현왕후가 “경빈 박 씨가 의심이 간다”는 증언만으로 마치 자신들이 원하는 대답을 들었던 것처럼 감동해서 경빈 박 씨를 옭아매려고 한다. 그래서 경빈 박 씨의 계집종 범덕에게 열 번 이상, 다른 계집종들에게도 여러 번 고문을 했다. 그래도 자백을 받아내지 못했다. 조정 대신들의 의도대로 범인이 밝혀지지 않은 것이다. 범인은 오리무중이었다. 

 그러나 조정대신들은 범인이 밝혀지지 않았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경빈 박 씨와 복성군이 범인은 아니지만 형편상 죄를 받아야 한다는 이상한 논리였다. 그 밑바탕에는 세자와 종묘사직을 보호해야 한다는 지나친 두려움과 충성심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중종은 의심만으로 죄를 줄 수 없다고 버텼으나 결국 경빈 박 씨를 폐하고 복성군은 작호를 삭탈하고 둘 다 고향으로 귀양을 보낸다.  

 이로부터 5년 후 중종은 두 모자의 누명을 벗기고 목숨을 살릴 기회가 있었다. 생원 이종익이 옥중 상소를 올렸다. 그는 상소에서 ‘작서의 변’을 꾸민 사람은 연성위 김희라고 주장했다. 김희는 중종의 둘째 왕후의 딸 효혜공주와 결혼한 부마로 김안로의 아들이었다. 그러나 조정대신들은 이종익을 정신이상자로 몰아가고 6일 후 이종익은 그 상소로 인해서 이례적으로 처형당한다. 작서의 변이 무고라는 그의 주장은 더 큰 풍파를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이종익의 죽음으로 재조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중종이 묻힌 서울강남구선릉동 정릉. 사진=네이버이미지.


조선왕조실록 번역본에는 어려운 용어나 사건 등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주(注)를 달고 있다. 여기에 작서의 변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작서의 변은 중종 22년에 쥐를 잡아 세자를 저주한 사건으로서 경빈 박 씨가 의심을 당하여 그의 아들 복성군과 함께 폐서인이 되어 쫓겨났다. 그러나 중종 27년 이종익의 상소에 의해서 김안로의 아들 김희가 진범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김희는 귀양 중인 아버지의 사주를 받아서 원한을 품고 있는 심정(沈貞)과 유자광(柳子光)을 제거하기 위해서 저주했던 사건이다.”

 

귀양중인 경빈 박 씨와 복성군의 죽음을 재촉하는 일이 벌어진다. 작서의 변이 일어난 6년 후 익명서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세자궁의 울타리 위에 사람의 머리 모양으로 만든 나무패가 달려 있었다. 거기에 ‘세자의 몸을 능지할 것, 임금의 몸을 교살할 것, 중전을 참할 것’과 ‘5월16일 병조 서리 한충보 등 15인이 행함’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한충보와 원한을 품은 자, 나무 판에 새겨진 필적과 나무 재질 등의 조사과정을 거쳐서 궁궐 노비 수견과 강손 등이 행동대원으로 좁혀졌고 그 배후로 경빈 박 씨의 막내 사위 홍여가 지목되었다. 수견의 진술에서 “상전이 사람을 보내어 그 일을 굳게 숨기라고 했다”는 내용 때문이었다. 수견은 상전이 누구인지 밝히지 않았고 홍여도 자신의 배후설을 부인했다.

 그럼에도 사건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익명서 사건의 행동대원으로 수견, 강손, 보모 효덕, 대궐별감 이은석 등은 자신의 죄를 모두 인정하지 않았으나 바로 처형되었다. 홍여는 조사 도중 맞아서 죽었다. 이것도 이례적이었다. 조선시대 육체적 형벌을 가할 때는 사람이 죽지 않도록 최소한의 조치를 취한다. 이번 사건의 다른 사람 조사에서도 이 원칙은 비교적 잘 지켜졌다. 그러나 유독 홍여에게는 그런 조치가 미흡했던 것 같다. 

 경빈 박 씨와 복성군에게도 바로 사약이 내려졌다. 경빈 박 씨와 복성군이 살아있기 때문에 이런 익명서 사건으로 조정을 흔든다는 것이 이유였다. 작서의 변과 익명서 사건의 연관 관계를 전혀 밝혀지지 않은 상태였다. 중종은 자신이 그토록 듣기 싫어했던 ‘제왕이 아들을 죽였다’는 말을 스스로 자초하고서 작서의 변이나 익명서 사건에서 티끌만한 연관성도 없는 복성군의 죽음에 대해서 오열했다고 기록돼 있다.

 

성종 대에 조선을 법치국가의 반열에 오를 수 있도록 <경국대전>이 완성됐다. 그러나 작서의 변 처리과정을 보면 조선은 법과 제도를 갖춘 나라가 아니다. 작서의 변에서는 <경국대전>의 법과 제도가 전혀 적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당시의 신하들이 그토록 국본(國本)으로서 지키려고 했던 세자(인종)는 왕위에 오른 지 9개월도 안 돼 병으로 죽었다. 후사도 없었다. 작서의 변은 법과 제도가 적용되지 않은 조선의 불명예를 남겼고 한 여인을 너무나도 억울하게 죽이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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