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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현철의 궁궐이야기 (22) 함흥차사, 역사적 근거가 있는가? -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알게 된 궁궐
  • 기사등록 2019-05-25 23:30:36
  • 기사수정 2019-05-27 14:0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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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현철 우리궁궐지킴이, 전 KBS PD


표준국어대사전에 “함흥차사(咸興差使)는 심부름을 가서 오지 아니하거나 늦게 온 사람을 이르는 말로서 조선 태조 이성계가 왕위를 물려주고 함흥에 있을 때에 태종이 보낸 차사를 죽이거나 잡아 가두어서 돌려보내지 아니하였던 데서 유래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함흥차사를 태조 이성계와 태종의 역사적 관계로 풀이하는 것이다. 실제로 함흥차사는 있었는가? 그 역사적 근거는 무엇인가? 

태조가 왕위를 물려 준 이후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태조의 행적을 따라가 보면 함흥차사의 진실에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필자가 조사한 함흥차사 이야기는 이긍익의 <연려실기술> 이유원의 <임하필기> 작자 미상의<축수편> 등 개인 문집에 실려 있다. 이긍익은 조선후기의 학자로 여러 가지 야사(野史)를 채택해서 기사본말체로 <연려실기술>을 기록했다고 밝혔다. 이유원도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임하필기>를 자신이 읽은 책이나 경전의 부연설명, 조정의 정사에서 빠진 사실이나 사대부들이 나눈 여담을 기록했다고 책의 서문에서 밝히고 있다. 두 책 모두 태종이 즉위한 400여 년이 지난 후에 출판됐고 정사를 기록한 것은 아니다. 


SBS드라마 '육룡이 나르샤'의 태조. 사진=네이버이미지 

 

위의 책들에서 나오는 함흥차사의 이야기를 종합해 보자. 태조는 제1차 왕자의 난 이후 왕위를 버리고 함흥으로 갔다. 태종은 태조가 서울로 돌아오도록 여러 번 신하를 파견했으나 돌아오는 이가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태조의 옛 친구이자 판승추부사 박순이 스스로 함흥에 가서 새끼 말은 나무에 매어 놓고 어미 말을 타고 갔다. “어째서 새끼 말을 나무에 매어 둔 것인가?” 라는 태조의 물음에 박순은 “길을 가는 데 방해가 되어서 매어 두었는데 어미와 새끼가 차마 서로 헤어지지 못하였습니다. 미물이라도 지극한 정인가 봅니다”라고 오열을 하니 태조도 감격해서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또한 박순과 함께 장기를 두고 있었는데 마침 쥐가 새끼를 물고 가다가 지붕에서 떨어져 죽을 지경에 이르렀어도 서로 떨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박순이 장기판을 제쳐 두고 엎드려 간절하게 아뢰니 태조가 마침내 서울로 돌아갈 것을 허락하였다. 박순은 돌아오는 길에 태조가 보낸 사자에게 죽음을 당하는데 “신은 죽습니다. 원컨대 전에 하신 말씀을 바꾸지 마소서” 라는 말을 남겼고 태조는 “박순은 어렸을 때의 좋은 친구다. 내가 지난번에 한 말을 번복하지는 않을 것이다”라면서 서울로 어가를 돌렸다는 것이다. 두 종류의 동물까지 등장시켜서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매우 극적으로 감정이입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태조의 퇴위 이후의 행적을 추적해보자. 조선왕조실록에서는 태조의 행보가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돼 있다. 

 태조는 제1차 왕자의 난 이후 자신의 두 번째 아들인 영안대군(정종)에게 세자와 왕위를 물려준다. 태조는 나이와 병으로 정사에 부지런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방번과 방석이 불귀의 객이 된 아픔도 있었으리라. 정종은 얼떨결에 세자가 되고 왕이 되어서 몇 개월 후 개성으로 다시 환도한다. 정종은 아버지가 나라를 세우고 새롭게 도읍을 정한 한양과 궁궐(경복궁)을 버리는 것이다. 태조는“한양으로 도읍을 옮긴 것은 자신의 뜻만이 아니라 조정 대신들과 의논해서 결정한 것이다”라고 눈물을 흘리면서 머뭇머뭇하며 한양을 떠난다. 태조는 개성으로 돌아와서도 “내가 한양으로 천도해서 아내와 아들을 잃고 다시 개성으로 돌아왔으니 사람 보기가 부끄럽다. 도성을 출입할 때는 어두울 때에 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보지 못하게 해야겠다”고 밝혔다. 참담한 심정을 흉중에 감추고 있었다.


 개성으로 환도한 이후 태조와 정종, 태종의 관계는 겉으로는 평온하게 보였다. 정종과 태종은 부왕에게 문안인사를 드리고 부왕의 거처에서 조회도 열고 장수를 기원하는 술을 올리기도 했다. 태조와 태종은 같이 춤을 추기도 하고 시를 짓는 즐거움을 나누기도 했다. 부왕이 관심을 갖고 있는 사찰에 대해서는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태조도 중국사신을 만나고 잔치를 베풀었다. 태종에게 자신의 성장과정이나 위화도 회군과 조선의 개국과정을 자세히 설명하기도 했다. 태조는 태상왕으로서 역할을 하는 것이다.

 

태조는 개인적으로 사찰을 왕래했다. 관음굴, 흥천사, 낙산사에 가서 법회를 베풀고 스님에게 “방번, 방석이 다 죽었다. 내가 비록 잊고자 하나 잊을 수가 없구나!”라고 속내를 털어놓기도 했다. 방석의 동생 경순궁주는 여승이 되게 한다. 사위 이제는 제 1차 왕자의 난 때 죽임을 당한다. 경순궁주가 머리를 깎을 때 태조는 눈물을 줄줄 흘렸다. 신암사를 중창하고 방석과 이제 등을 위해서 크게 불사를 베풀기도 했다. 태조의 왕사 무학대사의 부도를 미리 만들어 놓은 회암사도 중창했다. 무학대사를 회암사의 감주로 삼아서 머물기도 한다. 

 태조는 조선의 창업 군주였지만 자신이 세운 도읍과 궁궐은 버려지고 어린 자식이 그의 배다른 형에게 죽임을 당하고 딸은 여승이 된다. 억장이 무너지는 참담한 심경이었을 것이다. 그 마음을 불교에 의지해서 달래고 있음을 보여준다.


 태조는 가끔은 행선지를 밝히지 않고 나갔다. 태조는 자신의 고향인 동북면을 두 번이나 가려고 시도했으나 숯 비가 내리는 괴변이 일어나고 가뭄과 흉년으로 많은 백성이 굶주려 죽거나 중국 사신을 만나야 해서 그만 두었다.

 그리고 태종 2년 11월 1일 태조는 드디어 함흥이 있는 동북면으로 간다. <연려실기술>에서 태조가 왕위를 물려 준 후 함흥으로 갔다고 했으나 조선왕조실록에는 4년 후다. 태조는 자신이 즉위한 이래 10여 년 동안 조상의 무덤을 한 번도 가지 못했다고 하면서 “내가 조상의 능에 참배하지 않으면 어떻게 지하의 조상을 뵐 수 있겠는가? 이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나의 이번 행차를 미쳤다고 할 것이다”라고 하면서 자신의 함흥 행차의 정당성을 강조한다. 태종은 부왕이 떠난 4일 후 그 소식을 전해 받는다. 


SBS드라마 '육룡이 나르샤'의 태종. 사진=네이버이미지  

 태종은 이 날 또 다른 사건의 보고를 받는다. 동북면 안변부사 조사의가 군사를 일으킨 것이다. 조사의는 태조의 두 번째 부인 신덕왕후 강 씨의 친척이었다. 조사의가 거사를 일으킨 명분은 강 씨의 원수를 갚는 것이었다. 태조가 동북면으로 떠난 것과 조사의가 동북면에서 거사를 일으킨 날짜가 공교롭게도 겹친 것이다. 

 반란군의 초기 기세는 대단했다. 태종은 조영무 김영렬 신극례 등이 포함된 진압군을 파견한다. <연려실기술>에서 어미 말을 타고 태조를 찾아가서 설득한 박순도 진압군 장군이다. 박순은 상호군(上護軍) 직책으로 동북면의 도순문사 박만과 수령들에게 “조사의를 따르지 말라”고 설득을 하다가 조사의 군사들에게 피살된다. 박순은 <연려실기술>에서 태조의 사신에 의해서 죽지만 조사의 반란군 진압과정에서 목숨을 잃은 것이다. 그의 직책도 판승추부사가 아니라 상호군이었다.

 

태종은 한편으로는 무학대사를 보내서 태조가 서울로 돌아오도록 설득한다. 또한 안평부원군 이서, 익륜과 설오스님을 태조의 임시처소인 행재소에 보낸다. 이 셋은 태조가 평소 믿고 중하게 여기는 사람들이었다. 만일 이들 4명이 태조에게 살해당하고 돌아오지 못했다면 함흥차사가 성립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일은 없었다.

 조사의 난은 한 달 만에 스스로 무너진다. 조정에서 4만 여 명의 군사를 파견했다는 소식이 반란군 진영에 퍼져서 반란군은 스스로 흩어졌다고 기록돼 있다. 


 태조는 함흥으로 떠난 지 38일 만에 서울로 돌아온다. 그 이동 경로를 보자. 태조는 동북면으로 떠나기 4일 전 임진강 나루터 징파도에서 중국 사신을 위해서 잔치를 베푼다. 이 때 태조를 호위한 별시위군에게 동북면으로 행차하려는 뜻을 밝혔다. 그리고 안변의 석왕사로 가서 김화현에 머물고 철령을 지나서 함주로 향했다. 함주는 함흥으로 가는 길목이다. 그런데 9일 후 원래의 목적지인 동북면이 아니라 서북면 맹주로 방향을 바꾸고 원중포에 이르렀다. 반란군이 궤멸한 장소도 서북면 안주이다. 반란군과 태조의 진행 방향이 비슷한 것이다. 여기에 태조의 핵심 경호원이자 당상관인 정용수와 신효창도 조사의 반란군에 가담한다. 태조도 조사의가 반란을 일으킨 1년 7개월 전 안변부에 간 적이 있었다. 또한 태조는 반란군이 무너진 다음 날 서울로 돌아가겠다고 했다. 그래서 조사의 반란군을 태조와 연계시킨다. 직접적인 증거는 없다.


 이후 태조는 평양부에 머무르다가 서울로 돌아온다. 38일 간의 일정 중에서 원래 목적지로 했던 함흥으로 가서 조상의 묘를 참배했다는 기록은 없다. 조사의 반란군으로 길이 막혀서 가지 못했는지 실제로 갔는데 기록이 없는 것인지 그 이유는 알 수 없다. 

 이후에도 태조가 함흥으로 간 기록은 조선왕조실록에는 없다. 즉 태조가 정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승하하기까지 10여 년 동안 태조가 함흥에 가려고 했지만 머문 기록은 없다. 태조는 퇴위 이후 주로 불교와 함께했다. 불교 계율 첫 번째가 ‘살생을 하지 말라’이다. 태조가 아들과의 불화 때문에 조선의 신하들을 명분 없이 죽였다는 것도 설득력이 떨어진다. 태종은 부왕을 극진히 모셨고 사이도 좋았다. 함흥차사로 죽은 신하에 대한 기록도 없다. 조선왕조실록 기록을 종합하면 ‘함흥차사’는 없었다.

 역사는 때로는 정사보다 야사가 힘을 발휘하기도 한다. 야사는 인간의 이성보다 감성을 보다 더 자극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TV프로그램이나 영화에서 ‘함흥차사’는 부자지간이라도 권력을 나눌 수 없는 비정함으로 그려지기도 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역사의 정사와 야사는 구분되어야 한다. 야사가 정사는 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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