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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현철의 궁궐이야기 (21) 내시 김처선 ·김순손 · 김계경의 장렬한 죽음 -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알게 된 궁궐
  • 기사등록 2019-05-11 21:35:08
  • 기사수정 2019-05-11 22:2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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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현철 우리궁궐지킴이, 전 KBS PD


 권벌(權橃)은 중종, 명종 대에 활동한 문신이다. 그는 우찬성(종1품, 부총리급)까지 올랐고 사후 좌의정으로 증직된다. 그는 글 읽기를 매우 좋아해서 항상 책을 품에 지니고 다녔다. 한 번은 중종이 후원에서 잔치를 베풀어서 모두들 부축해서 나갈 정도로 취했는데 바닥에 <근사록>이 떨어져 있어 내시가 주웠는데 임금이 그 책은 권벌의 것이라고 해서 돌려보냈을 정도다. 

 권벌은 연산군 대에 과거 시험에 응시해 합격했으나 이후 합격이 취소된다.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부정행위를 한 것도 아니었다. 그의 답안지를 살펴본 결과 ‘처(處)’라는 글자가 있었고 그것이 합격을 취소한 이유였다. 당시 ‘처(處)’는 사용해서는 안 되는 금지된 글자였다. 그것은 내시 김처선(金處善)의 이름과 관계가 있었다. 연산군은 왜 ‘처(處)’를 사용할 수 없는 금지 글자로 했을까? 연산군 대에 충언으로 장렬하게 죽은 세 명의 내시에 대한 이야기다.

 

조선은 순종까지 포함하면 27명의 왕이 있다. 이 중에서 <조선왕조실록>이 없는 왕은 연산군과 광해군이다. 연산군과 광해군은 폭정으로 인해서 사실을 기록하는 직필(直筆)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왕이 신하들과 국정을 다루는 정청이나 경연에 사관이 참여하지 않은 경우도 많아서 사료(史料)의 신빙성에 의문이 들기 때문이다. 두 왕의 기록은 ‘일기(日記)’라고 한다. <연산군일기>와 <광해군일기>다. 우선 연산군일기에 기록된 김처선부터 보자.


 연산군 11년 내관 김처선이 술에 몹시 취해서 임금을 꾸짖는다. 이런 이유로 김처선과 그의 양아들 이공신은 바로 궁궐에서 죽임을 당한다. 그의 부인은 관노비로 전락되고 재산도 빼앗기고 집은 연못으로 파서 그 터에 죄명을 돌에 새기게 하였다. 그의 본관인 전의(全義, 현 세종시)를 없앴으며 부모의 봉분을 뭉갰고 석물도 치우게 하였다. 이뿐만 아니라 그와 그의 양아들의 친족 7촌까지 연좌제를 적용했다. 임금을 꾸짖은 것이 거의 국가모반혐의 수준까지 죄를 받은 것이다. 임금을 꾸짖은 이유는 연산군일기에는 없다. 

 그러나 다행히도 역사의 다른 면을 볼 수 있는 또 다른 기록이 있다. 연산군이 김처선을 죽인 그 날의 행적과 꾸짖은 이유를 연산군 초기까지 활동한 조신의 <소문쇄록>에 실려 있는 내용을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에 옮겨 놨다. <연려실기술>에 실려 있는 소문쇄록과 연산군일기를 종합해서 재구성해 본다.


 연산군 11년 4월 1일 김처선은 “나는 오늘 반드시 죽을 것이다”라고 부인에게 말하면서 집을 나선다. 김처선은 단종실록에 유배지인 영해에서 풀려나는 것으로 첫 기록이 나온다. 유배를 간 이유는 설명이 없다. 이후 세조를 거쳐서 성종 대에는 내시의 최고위직 상선(尙膳)까지 오른다. 성종 대에 임금을 잘 보필한 공로로 품계까지 올라서 장관급에 해당하는 정2품이 된다. 상선은 종2품인데 그 품계를 뛰어넘은 것이다. 연산군 대에도 김처선은 어서(御書)를 신하에게 전달하는 등 왕의 지근거리에 있었다. 

 이 날 연산군은 처용놀이를 하고 있었다. 김처선이 보기에 처용놀이는 매우 음란한 행위였다. 그동안 처용놀이의 음란함이나 연산군의 잘못에 대해서 김처선은 몇 번이나 충심으로 간언을 했다. 그 간언으로 하옥을 당하기도 하고 장 백 대를 맞기도 했다. 그러나 효과는 없었다. 

 연산군은 어머니 폐비 윤 씨의 일이나 무오사화 등을 거치면서 주색에 빠지고 신하들을 다반사로 죽이고 백성을 벌레보다도 못하게 업신여겼다. 일부 간신과 여인(장녹수, 흥청 등) 외는 보이는 것이 없을 정도였다. 조선 최악의 포악한 왕이다. 

 김처선은 결심을 단단히 했다(연산군일기에 김처선이 술에 몹시 취했다는 기록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연산군이 처용놀이를 하는 곳에 거리낌 없이 들어갔다. “이 늙은 몸이 네 분의 임금을 섬겼습니다. 저도 경서와 사서를 읽었습니다. 그러나 전하처럼 행동하는 분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연산군은 화를 참지 못했다. 활시위를 당겨서 김처선의 갈빗대를 맞혔다. 김처선은 할 말을 했다. “조정의 대신들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데 늙은 내시가 어찌 감히 죽음을 아끼겠습니까. 다만 전하께서 오래도록 보위에 계시지 못할 것이 한스러울 뿐입니다.” 연산군은 화살을 더 쏘아 김처선을 넘어뜨리고 칼로 팔과 다리도 자르곤 일어나서 다니라고 했다. 김처선이 “전하께서는 다리가 부러져도 다닐 수 있습니까”라고 대꾸를 하자 연산군은 김처선의 혀를 몸소 자르고 창자까지 끄집어냈다. 김처선은 목숨이 다할 때까지 말을 그치지 않았다. “사악한 행동을 버리고 착한 임금이 되라”는 충언이 입안에서 맴돌았을 것이다.

 연산군은 그 시신을 호랑이에게 준 것으로 기록돼 있다. 연산군은 2개월 전 호랑이, 곰을 사로잡아 오라고 시킨다. 선전관 최수천은 강원도 군사를 거느리고 호랑이 15마리와 곰, 노루 등을 잡아왔는데 연산군이 크게 칭찬했다는 기록이 연산군일기에 있다.


영화 '왕의 남자'에서 연산(왼쪽)과 김처선 역. 

 

이 사건으로 연산군은 모든 문서에 김처선의 ‘처(處)’를 금지 글자로 했으며 모든 신하의 이름 중에 ‘처선’은 개명하게 했다. 자신을 환락으로 빠지게 한 처용무(處容舞)는 풍두무(豐頭舞)로, 계절의 변화를 일컫는 처서(處暑)는 조서(徂暑)로 고쳤다. 성몽정은 문서에 ‘처(處)’를 사용해서 국문을 당할 뻔 했으나 그 날짜를 조사해보니 법 선포 이전이어서 다행히 국문을 면할 수 있었다. 

 내시는 조선시대 이조(吏曹)의 내시부 소속으로서 정종 대에는 50여 명이 있었다. 내시는 부엌의 음식 감독, 청소, 의복이나 장식품 관리, 임금의 거동을 돕는 잔심부름에서 수행, 왕명 출납, 왕의 밀서 전달까지 왕의 사용설명서에 따라서 그 역할은 다양했다. 성종은 창경궁을 지을 때 김처선이 임금의 명령을 잘 전달했다고 해서 말(馬)을 선물로 주기도 했다. 또한 한명회를 위로하기 위해서 김처선을 보내기도 했다. 내시의 결혼 여부도 논란이 있었으나 허용해 주었고 양아들을 입적해서 자식도 둘 수 있었다. 개인 땅도 소유했으며 노비도 부렸다. 최고직위는 차관급에 해당하는 종2품이다. 조선시대 그 이름은 매우 다양하게 불렀다. 내시, 내관, 내수(內豎), 환관, 환시(宦侍), 환자(宦者), 중관(中官), 시인(寺人) 등이다. 


 잔인하고 포악한 임금 아래에 의로운 인물이 나는 것인가. 연산군 대에 김처선처럼 충언을 해서 죽임을 당한 내시는 더 있었다. 김순손, 김계경이다.

 김순손은 성종실록에 첫 기록이 나오고 문자를 알았기 때문에 성종 대에는 임금의 말씀을 전달하는 승전색 내시로 활동했다. 연산군 대에도 바로 지근거리에서 임금을 모셨다. 연산군은 홍문관에 명해서 김순손에게 <자치통감강목>을 가르치도록 했다. 자신이 하기 싫은 공부를 김순손이 대신하도록 하려는 속셈이었다. 홍문관의 집단 반발로 성사되지는 않았다. 

 연산군의 즉위 초기는 부왕 성종이 돌아가셨기 때문에 삼년상 기간이었다. 상복을 입고 모든 일에 근신을 해야 한다. 그럼에도 연산군은 궁궐 뜰에 암수 말을 끌어와서 교접을 하게하고 구경을 하거나 부왕의 후궁을 강간하려고 하는 등 부도덕한 짓을 많이 했다. 내시만 알 수 있는 왕의 은밀한 행위다. 김순손은 왕의 이러한 부도덕한 짓에 대해서 간언을 했다. 그러나 연산군은 김순손의 충언이 오히려 자신을 업신여겼다고 생각했다. 김순손을 바로 극형에 처하려고 했으나 삼년상 중이었음으로 제주로 귀양을 보내고 후에 능지처참을 한다.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김순손이 군왕을 업신여긴 내용이 무엇이냐며, 죄상을 모르는 데 죽일 수 없다고 몇 개월 동안 끈질기게 반대를 한다. 대사헌· 대사간도 김순순의 죄는 법관도 대신도 온 나라 사람도 모른다고 하면서 죄상을 밝힐 것을 간청했으나 연산군은 “(김순손은)오만해서 죽어야 한다”는 말만 되풀이 했다. 김순손의 죄상을 구체적으로 밝히면 자신의 부도덕한 행위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홍문관조차도 극형은 삼심제를 실시해야 한다고 건의했으나 연산군은 막무가내였다. 김순손은 충심을 다해서 임금을 모셨지만 비정상적인 왕에 의해서 자신의 죄가 무엇인지 모르는 채 희생이 되었다. 


 김계경도 성종실록에 첫 기록이 나오고 그 활동이 연산군 대로 이어진다. 연산군 대에 그는 자주 매를 맞는다. 이유가 뭣인지는 기록에 없다. 그가 죽임을 당하는 이유는 왕의 명령을 따르지 않아서인데 연산군은 풍속을 바로잡는 일이라고 했다. 연산군이 정의하는 풍속을 바로 잡는 것은 무엇인가? 이것을 살펴보면 김계경이 목숨과 맞바꾼 그 명령이 무엇인지를 추정 할 수 있다.

 연산군 10년 경복궁 주변에 금표를 세운다. 일반 백성이 궁궐을 굽어보지 못하도록 하는 출입금지 표시다. 그 범위를 차츰 넓힌다. 서쪽의 금표는 30리가 좁다고 해서 늘렸고 북쪽도 30~40리까지 했다. 이 안의 민가는 철거해야 했고 농사도 짓지 못하게 했다. 대신 왕의 사냥터, 유흥 장소로 바뀐다. 농사를 수확할 시기에 금표를 설치해서 백성들은 땀 흘려 지은 곡식을 수확하지 못해서 울부짖었다. 그러나 불만을 표시하면 삼족을 멸했고 금표 안에 들어오면 참형을 했다. 실제로 금표 안에 들어온 2명을 참수하고 효수를 했다.

 이 제도가 실시된 1년 후 연산군은 요사이 금표가 잘못됐다고 따지는 사람이 없으니 풍속이 바로 잡혔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김계경 따위가 풍속을 어지럽혔다고 예를 들었다. 연산군이 말한 올바른 풍속은 백성의 고통이나 실정을 이야기 하지 않고 자신에게 간언을 하지 않는 것이다.    


 김계경이 자주 매를 맞고 죽음을 당한 것은 연산군의 귀에 거슬리는 말을 자주 했고 연산군이 내리는 부도덕한 명령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김계경은 김처선보다 앞서 처벌을 받는데 그 처벌 내용이 김처선과 거의 같다. 그의 부인은 관노비가 되고 집은 연못으로 파고 그의 본관인 자산군(현 평안도)을 없앴고 그의 친족의 7촌까지 연좌를 받는다. 이러한 것을 종합해 보면 김계경도 김처선처럼 목숨을 던지는 간언을 했을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김처선과 김순손은 사후 평가를 받았다. 김처선은 영조 대에 김순손은 중종 대에 정문(旌門)을 세워준다. 정문은 조선시대 충신, 효자, 열녀 등을 그 동네의 어귀나 집 앞에 붉은 문을 세워 표창하는 것이다. 

김처선과 김순손은 그들의 행동과 죽음에 대한 기록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김계경은 사후 평가를 받지 못했다. 그의 죽음에 대한 증거 기록이 미진하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연산군이 밝힌 처벌 이유와 그가 받은 처벌 내용 등을 고려하면 김계경도 평가를 받아야 할 것이다.

 TV드라마나 예능 프로그램에서 내시는 꾸부정한 자세와 중성적인 목소리로 희화화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김처선 · 김순손 · 김계경은 인륜과 천륜을 어긴 포악한 연산군의 내시였지만 조선의 신하로서 목숨을 던져 역할을 다했던, 동서고금에 보기 드문 충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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