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왕현철의 궁궐이야기 (18) 작은 거인 김종서, 6진을 경영하다 - ④ 경복궁의 정전 근정전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알게 된 궁궐
  • 기사등록 2019-04-21 07:50:00
기사수정

↳ 왕현철 우리궁궐지킴이, 전 KBS PD


  우리의 국토는 삼면의 바다와 대륙으로 연결돼 있다. 우리의 국토를 넓히기 위해서는 바다를 메꾸거나 북방을 개척해야 한다. 우리 국토의 북방 한계선은 함경북도다. 그 함경북도의 최북단이 조선시대 세종 대에 개척한 6진이다. 진(鎭)은 군의 방어시설이 있는 군사기지다. 함경북도는 세종대에 함길도로 불렸고 군사책임자는 함길도 도절제사인 김종서였다. 김종서를 무관으로 오해할 수 있지만 문관이다. 


 조선후기 이유원의 <임하필기>에 따르면 김종서는 16세에 등과했다. 이직과 더불어 최연소 합격자다. 김종서는 조선왕조실록에 그의 ‘졸기(卒記)’가 남아 있지 않다. 세조가 일으킨 계유정란으로 희생된 탓일 것이다. 세조에 의해서 유명을 달리한 사육신인 성삼문, 박팽년 등의 졸기도 남아 있지 않다. 보통 졸기에는 생과 사, 직책과 활동 등 삶의 이력서와 더불어 사관의 인물평이 남아있다. 

 그 대신 김종서의 인물평은 세종이 남겼다. ‘김종서는 몸집이 작고 무예는 모자란다. 그러나 관리로서 넉넉한 재주를 갖추고 있고 일을 처리하는 데는 부지런하고 정밀하다’고 평가하고 있다. 세종의 인물평을 보면 김종서는 국경의 장수로서 상상되는 덩치가 큰 무장의 외모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세종이 김종서를 옛 땅을 회복해야 하는 중요한 곳에 군사책임자인 도절제사로 임명 한 것은 김종서의 장점과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뭔지를 잘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김종서는 도절제사가 되기 전 왕명 출납을 담당하는 비서실에 해당하는 좌·우부대언을 5년 가까이 했다. 세종과 김종서는 지근거리에서 호흡을 맞춘 왕과 신하였다.

 조선 초기 북방의 국경선인 두만강 부근에는 우리 백성과 더불어 여러 여진족도 살고 있었다. 이들은 명나라 황제로부터 받은 직책이나 거주해도 좋다는 성지도 갖고 있었다. 당시의 국경선은 명확하지 않았다. 여진족의 잦은 침입으로 우리 땅에서 백성이 철수하자 명나라가 그곳에 군사기지의 하나인 위(衛)를 설치하려고 했다. 함길도가 명나라 땅이 될 수도 있었던 것이다. 

 

함길도에 6진을 설치하고 그 곳을 경영하기 위해서는 많은 난관을 극복해야 했다. 우선 사람이 일정 규모로 지속적으로 살아야 했다. 김종서는 남쪽의 백성을 이주시키는 사민정책을 주도했다. 이주하는 백성들에게 여러 가지 혜택을 주었지만 정착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이주하는 첫 해에는 흉년이 들었고, 그 다음해는 역질이 돌고 눈도 많이 내려서 사망자가 속출했다. 이주한 백성들이 고향으로 다시 돌아가고자 했다. “새로운 마을은 영원히 세울 수 없다”라고 비관적인 전망을 내놓는 관리도 있었다. 

 

정확한 인구 파악도 쉽지 않았다. 호적을 기록해야 하는데 이것은 부역과 세금의 기초자료가 되기 때문에 이주한 백성의 동요를 일으키지 않고 시행해야 했다. 새로 설치한 진(鎭)에는 여진족도 같이 섞여서 살고 있었다. 조선 백성의 구분이 필요했다. 10가구, 50가구, 100가구 단위로 묶어 책임자를 두는 인보법((隣保法)으로 해결하고자 했으나 이 또한 민심의 향배를 살펴야 했다. 새로운 진을 설치하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건물이나 튼튼한 성도 쌓아야 하는 토목역사도 해야 했다. 도망가는 군인들도 있었다. 북방의 백성은 거센 기후에 걸맞게 용맹했으나 어른을 섬기는 것을 잘 몰랐다. 백성의 교육도 필요했다. 경서도 없어서 책도 구해 와야 했다. 유교 국가에 어울리는 풍속을 갖추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풍족한 땅으로 만들어야 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에 중요한 벼농사를 잘 짓고 뽕나무를 많이 심는 자는 벼슬도 주고 세금도 면제해 주었다. 


김종서 장군 묘(세종특별자치시 시도기념물 제2호) 네이버이미지

 

김종서는 해결해야 할 문제를 낱낱이 세종에게 보고했다. 세종은 번거롭고 자질구레한 것까지도 보고하라고 하면서 후방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화포 등 군수물품에서 일성정시의, 현주일구 등 시각을 알 수 있는 천문기구도 내려 보냈다.

 이와 더불어 김종서는 여진족 문제를 처리해야 했다. 북방의 여진족은 족속이 다양하고 흩어져 살았다. 얽히고설킨 족속의 정체를 정확하게 파악해야 했다. 함길도는 험준한 지형이 많았다. 백성의 생명과 재산이 위협을 받아도 산속 깊이 도망가는 여진족을 일일이 추적할 수 없었다. 한 두 번의 대규모 전쟁으로 해결할 성질이 아니었다. 김종서는 우선 목책이나 성곽을 쌓아서 방비를 튼튼히 하고 차츰 정벌을 통해서 여진족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그러나 세종은 가능한 한 위무정책을 펼치고자 했다. 군 통수권은 임금인 세종에게 있었다. 임금의 뜻에 따라야 했고 위무정책에는 정확한 정보와 인내가 필요했다.    

 

언어와 삶의 방식이 다른 여진족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사정을 잘 알고 진심으로 우리 편이 되어주는 또 다른 여진족이 필요했다. 벼슬이나 물질적인 이익도 주어야 하지만 신뢰가 쌓여야 했다. 여진족 거아첩합은 그의 족속과 함께 수시로 국경을 침범하여 우리의 장수를 살해하고 도둑질을 하는 등 죄질이 아주 나빴다. 그가 사로잡혔다. 김종서의 건의로 살려 준다. 그에게 기와집, 의복, 생활도구, 말은 물론 녹봉을 받는 벼슬도 주고 노비까지 붙여준다. 그의 아들을 부잣집 딸과 결혼도 시킨다. 그의 삶은 조선으로 귀순해서 천양지차로 바뀌었다. 지난날의 허물도 진심으로 뉘우치면 조선의 국가가 보듬어 준다는 홍보효과를 노린 것이다. 이러한 노력으로 적의 침입 정보를 미리 알려주는 우군도 생겼고 조선이 자신의 국가라고 여기는 여진족도 차츰 늘어났다. 소규모 전투도 있었다. 승전이 더 많았다.  


 김종서가 이룬 성과는 눈에 띄었다. 북방이 안정돼 갔다. 그러나 개인적인 불행이 겹쳐왔다. 노모의 임종을 지켜보지 못한 것이다. 효를 다하고자 했던 평생의 원이 무너졌다. 충을 위해 효가 희생된 셈이다. 부인의 병구완도 하지 못했다. 6년여 변방의 근무로 자신의 몸도 쇠약해졌다. 잘 먹지도 못해 여생을 고향에서 보내고자 사직을 청했으나 세종은 “북쪽의 관문은 적임자가 아니면 맡길 수 없다”고 받아주지 않았다. 더욱이 터무니없는 비방도 받았다. 김종서는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상소를 올려야 했다.  


 비방은 김종서 자신이 추천해서 회령절제사가 된 부하 장수 박호문이가 했다. 회령은 도망간 백성과 군인이 다른 진에 비해서 너무나 많았다. 김종서는 그 원인을 파악했다. 회령은 토목공사가 많았고 형벌이 너무 지나쳤다. 박호문을 두세 번 만나서 나무랐으나 듣지 않아서 쓸데없다고 판단한 병영 청사를 허물어 버렸다. 또한 적의 침입으로 서울에서 원정 군사까지 왔음에도 박호문은 병을 핑계로 출전하지 않았다. 당연히 책망을 했다. 이러한 것이 박호문에게는 개인감정으로 쌓였던 것이다. 

 세종은 박호문을 직접 만난 적이 있었다. 세종이 국경의 사정을 물었는데 박호문이 대답 중에 김종서를 헐뜯었다. 세종은 박호문이 자신의 상관을 참소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판단해서 의금부로 하여금 그를 국문하게 했다. 김종서의 잘못이 없음이 밝혀졌다. 세종은 김종서에게 마음의 동요 없이 직무에 충실하라고 신뢰를 보낸다.

 

세종은 도승지 성염조 등에게 변방에서 공을 세운 고려 장군 윤관, 최윤덕, 김종서 등에게 모두 모함이 있었음을 지적하면서 변방의 장수를 우대하고 권한을 전적으로 위임했기 때문이라고 해석했다. 그러면서 윤관의 후손이 왕실과 혼인을 맺은 자가 십여 명이 된다고 하면서 허물을 지적한 사람이 잘못이라고 했다. 

 

 김종서는 함길도 감사와 도절제사로서 7년간 국경을 수비하고 경영했다. 백성을 모으고 이주시켜서 수풀이 우거진 버려진 땅을 곡식을 생산하는 풍요의 땅으로 바꾸도록 온 힘을 다했다. 이를 위해서 갑옷과 병장기를 마련하고 군사를 훈련시켜서 무력으로 적을 제압하는 한편, 덕으로 나라를 넓혀야 그 땅을 잃지 않는다는 신념으로 적의 마음을 얻으려고 했다. 이러한 그의 노력에 세종은 “김종서는 이주한 백성들을 잘 다스려서 흩어진 백성들을 삶의 터전으로 다시 돌아오게 했고 여러 여진족의 항복을 받아서 북방을 안정시켰다”고 공을 높이 평가했다


 6진 개척과 안정화는 세종과 김종서의 합작품이다. 세종이 북방영토 개척의 계기를 만들고 김종서를 믿으며 후방지원을 든든히 해주자 김종서는 최일선에서 세종과 호흡을 잘 맞춰 흔들림 없는 자세로 6진의 경영을 성공하는 위업을 달성했다. 



<저작권자 이슈게이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
TAG
기사수정

다른 곳에 퍼가실 때는 아래 고유 링크 주소를 출처로 사용해주세요.

http://issuegate.com/news/view.php?idx=4589
기자프로필
프로필이미지
Warning: include_once(../news/side_banner_menu.php): failed to open stream: No such file or directory in /home/issuegate.com/www/skin/news/basic/view.skin.php on line 394 Warning: include_once(): Failed opening '../news/side_banner_menu.php' for inclusion (include_path='.:/usr/share/pear:/usr/share/php') in /home/issuegate.com/www/skin/news/basic/view.skin.php on line 394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